참 좋은 시 394

침몰하는 저녁 /이혜미

침몰하는 저녁 /이혜미 내가 밑줄친 황혼 사이로 네가 오는구나. 어느새 귀밑머리 백발이 성성한 네가 오는구나 그 긴 머리채를 은가루 바람처럼 휘날리며 오는구나 네 팔에 안긴 너는 갓 태어난 핏덩이, 붉게 물든, 모든 저물어가는 것들의 누이가 되어 오는구나 네가 네에게 젖을 물리고 세계의 발등이 어둠으로 젖어든다. 너의 모유는 계집아이의 초경혈마냥 붉고 비리고 아픈 맛, 나는 황홀하게 너의 젖꽂지를 덧그리고 있었다 내가 붉게 표시해 둔 일몰이 세상으로 무너져 내리던 날 배냇시절의 너를 안고 네가 나에게 오는구나 네가 발디딘던 곳마다 이름을 버린 잡풀 잡꽃들이 집요하게 피어나던 거라. 옅은 바람에도 불쑥 소름이 돋아 위태로운 것들의 실뿌리를 가만 더듬어 보면 문득, 그 뿌리들 내 속으로 흘러 들어와 붉게 흐..

참 좋은 시 2021.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