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작시 259

패가전제품 - 심은섭

패가전제품 심은섭 신이 입력한 운명의 프로그램을 따라 길을 걸으며 한 번도 멈춰선 적이 없다 그는 스스로 생의 궤적을 1mm도 이탈하지 않았다 불혹의 시절, 그는 선술집에서 부패한 진실을 놓고 소주와 이마를 맞대고 한판 싸우던 날들과 새벽과 저녁사이에서 들려오는 극빈의 아우성으로 반성문을 쓰던 날도 있었다 또 한때는 무궁화꽃이 가득 핀 나비넥타이를 목에 걸고 초고속 엘리베이터가 승천하는 고층빌딩 회전의자에 앉아있던 날들도 있었으나 지금은 재활을 위해 서비스센터에서 이마에 붉은 띠를 두르고 전신을 닦고 조이고, 기름 치던 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새파란 감각이 무뎌져 겨울에 핀 꽃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시간을 접고 펴는 한 올의 신경은 여전히 푸르다 그는 내가 매일 읽어야 할 고전서이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부..

나의 자작시 2022.09.24

목어木魚 - 심은섭

목어木魚 심은섭 너의 전생은 살구나무였다 몸속 내장을 다비우고 오랜 수행 끝에 물고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순간에도 뜬 눈으로 허기진 맹수처럼 울어야 한다 아니다 오직 가마솥의 사골이 우러나는 것처럼 울어야 한다 그러할 때 지친 강물들이 발맞추어 바다에 도달할 수 있고 황금빛 정장을 한 태양이 밤을 몰아낸다 천둥소리로 울어야 한다 그렇게 울지 않으면 저녁 들판의 허수아비들이 천년의 잠 속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북극의 빙하가 갈래지는 소리로 또 울어야 한다 한낮, 우박의 습격으로 생이 무너진 배추잎들이 다시 신발 끈을 동여매고, 태풍에 정신을 잃고 깜빡이는 신호등이 깨어날 수 있다 아니다 길거리에서 저렴하게 매매되던 나의 낡은 영혼이 새벽처럼 깨어날 수 있다 -출처 : 2022년 계간지 『동안』 가을호 발표..

나의 자작시 2022.09.24

■ 다시 보는 최고最高의 시【60】누드와 거울 - 심은섭ㅣ시집 『K 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문학의전당, 2009) tnfhr【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2016년 10월19일 e-메일[출처]

https://blog.naver.com/w_wonho/222545991799 ■ 다시 보는 최고最高의 시【60】누드와 거울 - 심은섭ㅣ시집 『K 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 다시 읽는 최고最高의 시 60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2021년 10월호 누드... blog.naver.com

나의 자작시 2022.09.22

제22회 박인환문학상 수상작 '가문비나무엔 허파가 없다' - 심은섭 시인

가문비나무엔 허파가 없다 심은섭 이동의 욕망이 화산처럼 솟구칠 때마다 신은 나의 허파를 떼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친정집 마당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습니다 까마귀가 스무 가지의 감각을 주고 갔지만 눈과 귀를 닫고 삽니다 오랜 시간은 이동의 습성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그 죄로 직립의 자세로 저녁마다 굵고 긴 반성문을 씁니다 수은주의 붉은 혓바닥이 빙점 아래로 통과할 때 벌목공의 톱날에 온몸이 잘려 나가도 이젠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둣빛살점이 뜯겨나가도 피죽바람을 불러와 생손을 앓습니다 나는 어떤 계절에도 한 장의 잎만으로도 천공을 뚫고 부활을 합니다

나의 자작시 2022.09.22

빙어의 비망록 - 심은섭

빙어의 비망록 심은섭 참선하는 나의 선방은 얼음장 밑입니다 오랫동안 뜬 눈으로 수행을 해야만 몸속 등뼈가 훤히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두운 항아리 속 밀주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깊이를 발설하지 않는 폐광 속 어둠으로 살아서는 더욱 안 됩니다 휘어진 바깥세상의 등을 펴주려고 오직 지느러미로 목어만 두드리며 삽니다 금식의 규율을 지키려고 식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무젓가락을 한 번 사용해 본 적이 없어 그 젓가락이 몰락한 왕조의 황후가 사용하던 비녀로 기억될 뿐입니다 이곳 수행의 엄한 계율은 저렴한 눈물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 까닭에 강물이 짤 리가 없으므로 비단잉어 혓바닥에 욕망의 이끼가 끼기도 하지만 달밤에 수달피가 던져놓은 어망과 악수를 거부한 지 오래되어 이미 나의 두 손..

나의 자작시 2022.09.08

바다로 가지 않는 강물은 없다 - 심은섭

바다로 가지 않는 강물은 없다 심은섭 강변에 사는 수양버드나무들은 강물이 허리에 권총을 숨기고 서부지역 금광을 찾아 떠도는 총잡이일 뿐이라며 빈정댔다 그러나 그믐달이 뜨면 산란을 위해 강의 하구를 찾아드는 연어 떼를 맞이하려고 밤낮 쉬지 않고 걸어갔던 것이다 바위 밑에 은신 중인 민물고기들은 강물이 푸른 문신이 새겨진 팔뚝을 보여주러 호프향이 가득한 나이트클럽으로 간다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먼 바다에서 푸른 고독의 꽃이 온몸에 피어난 무인도를 예인하려고 황급히 달려간 것이다 바다가 강물의 무덤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바다로 가지 않는 강물은 없다 나침판도 없이 바다로 간다 파도는 안타까운 마음에 온몸으로 그를 만류해 보았지만 강물은 한 평생 꿈꿔왔던 수평을 유지하려고 낮은 곳을 찾아 흘렀던 것이다 -출처 : ..

나의 자작시 2022.09.08

말 - 심은섭

말 심은섭 말 좀 붙여 보려고 딱풀 하나 산다 말을 걸어보려고 옷걸이를 산다 말을 깨물어 보려고 인포메이션을 찾는다 식도를 타고 올라온 말과 말 사이에는 풀어지지 않는 ‘이해’가 울고 풀어지는 ‘오해’가 웃고 마음속에 슬픔이 기쁨으로 오면 목청을 울리게 하는 하나의 몸짓, 말은 칼이다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신발을 벗은 말이 달린다 울음소리가 난다 징의 울음소리에 사람들은 생을 건다 생이 깨지고 깨진 그 생을 다시 잡으려고 말이 아니다 사람들은 말에 먹히고 말은 사람들에게 먹혀서 말은 할 말을 잊고 말없이 말발굽 아래에 묻힌다 달린다 말을 몰고 달린다 입에 말을 물고 말은 말하지 않으며 말이 말을 업고 간다 말처럼 달린다 〈악력〉-심은섭 - 2004년 『심상』으로 등단 -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나의 자작시 2022.08.09

텃밭의 수난기 - 심은섭

텃밭의 수난기 심은섭 파꽃에 벌들이 모여 꿀파티를 하고 있다 만개한 사과나무도 수정을 서두르고 있다 재래시장으로 나갈 채비를 마친 쑥갓의 입술엔 나비가 한창이다 모두가 텃밭에 모여 생의 천을 짜는 오후 007가방을 든 먹구름이 텃밭으로 떼지어 몰려와 푸른 지폐를 난사한다 그로부터 담장을 기어오르던 강낭콩이 회색빛 얼굴로 황급히 교회당으로 몸을 숨기고, 하늘을 찌를 듯한 굴뚝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연신 검은 교만을 뿜어낸다 그 교만을 마신 풍뎅이들은 입술에 돋아난 물집 몇 채를 들고 변두리로 이주했다 그로부터 하늘에 더 이상 달이 뜨지 않았다 -출처 : 2022년 《심상》 8월호 심은섭 시인 〈악력〉-심은섭 - 2004년 『심상』으로 등단 -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 시집, 『K과장이 노량..

나의 자작시 2022.08.04

밥꽃의 여자 - 심은섭

밥꽃의 여자 심은섭 코로나19로 아내가 밥을 짓지 못했다 내가 밥을 지었다 철이 덜든 밥알, 모래알 같은 밥알 영혼이 빠져나간 밥알 훅 불면 민들레홀씨처럼 날아갈 듯한 밥알이다 서툴게 생의 돌담을 쌓는 나의 모습에 그녀가 벌떡 일어나 밥을 짓는다 철이 든 밥알, 별사탕 같은 밥알이다 경전의 활자 같은 밥알 이팝꽃이다 흰 미소를 짓는 다이아몬드의 집합체, 철이 들어야 철이든 밥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 겨우 눈치 채는 저녁이다 -출처 : 2022년 《심상》 8월호 심은섭 시인 〈악력〉-심은섭 - 2004년 『심상』으로 등단 -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 시집, 『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2009),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2021) 외 - 평론집, 『한국현대시의 표정과 ..

나의 자작시 2022.08.04

감나무 100년사 - 심은섭

감나무 100년사 심은섭 그는 청호동으로 건너오는 갯배가 잘 보이는 망향탑 한 귀퉁이 공터에 자리잡고 산다 홀로 바다를 지키던 갈매기섬을 흔들어놓고 해풍도 가끔 다녀간다 그는 밤새도록 외등을 끄지 않는다 긴 목을 더 길게 내밀고 북쪽의 흰 그림자를 한 번만이라도 보려는 백 년의 기다림, 상봉의 그 날까지 버티려고 온몸에 이정표처럼 살이 찐 잎을 달고 산다 무사히 찾아오라고 혹은, 그 잎을 보고 찾아올 수 없을 거라는 스스로의 의심으로 홍시의 깃발을 흔들며 북쪽을 응시하고 있다 눈꽃이 나뭇가지에 피어나는 계절이 수십 번 반복되어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지막 갯배가 굳은 표정으로 부두에 닿았다 한 양동이의 그리움이며, 한 상자의 절망과 한 됫박의 슬픔만 타고 있을 뿐, 100년을 기다리던 그 사람은 보이지..

나의 자작시 2022.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