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작시 259

몽환의 기우 - 심은섭

몽환의 기우 심은섭 1. 달 둥근 시간이 귀향을 꿈꾸며 방점을 찍어 놓은 표식이고, 갈증의 뒤편에서 죽음의 시점을 기억하는 접시꽃의 만개다 어쩌면 종부성사를 받은 환자의 마지막 알약이다 때론 망각의 강을 건너갈 비행접시다. 하지만 석공이 새기고 있는 비문의 주인공이다 2. 돌 자물쇠로 입술을 굳게 잠근 독락당이며, 머리를 삭발한 목어가 즐겨먹던 물렁한 견과류다 아니다 계시의 일정을 잊어버린 신들의 은신처다 혹은, 궁핍의 얼굴이 피멍을 어루만지며 찾아간 암자다 그의 몸속에 푸른 사리가 자란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3. 탈 그 영토 안에는 비가 오는 겨울, 혹은 눈 내리는 봄의 공존이다 얼굴을 숨길 때마다 탈이 났다 그러므로 사립탐정이 새벽마다 찾아와 발문수를 재어 갔다 하지만 어떤 단서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

나의 자작시 2021.11.09

달의 자화상 - 심은섭

달의 자화상 심은섭 서른을 넘긴 첫째아이가 말을 건넬 때마다 그의 몸속에서 내가 빠져나왔다 내가 그 아이에게 말을 건넬 때는 내 몸속에 나의 아버지가 산다는 것도 알았다 태양이 붉은 체온을 식히는 시간을 내가 수없이 생산해 내는 동안, 내 몸 속에서 열두 개의 달이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쉰 살의 9부 능선을 넘는 나에게 저녁노을을 등에 업고 들려주시던 아버지의 사냥교본을 읽으며 산다 낮달이 무심코 교차로를 건너는 동안 라일락꽃이 피고 늦은 오후가 밤 아홉시 쪽으로 점점 기울어질수록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필사하며, 혹은 그가 헛기침하며 뱉어낸 생의 질박한 무늬와 질량마저 표절한다. 내가 서있던 언덕에 긴 칼을 찬 첫째아이가 해원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의 몸속에서도 내가 푸르게 기억하던 열 두 개의 달이 ..

나의 자작시 2021.10.02

능금의 조건 - 심은섭

능금의 조건 심은섭 청동시계가 멈춰도 지상으로 내려와서는 안 된다 최상의 꿈을 출시하려면 민낯에 구릿빛 화살촉도 무수히 꽂아야 한다 그럴수록 너는 산모가 산통을 잊은 것처럼 홀로 꽃을 피워내던 통점을 잊은 채 또 낙화를 서둘러야 한다 어느 4월, 군중을 향해 낭독한 하얀 선언문대로 온몸의 모서리를 허물어야 한다 그때 돌칼이 아니라 풍상風霜으로 지워야 한다 그것은 제법 무게가 나가는 선조의 유전자가 허무의 원을 그리며 살기를 원하지 않는 까닭이다 늦가을, 흰서리를 맞고 겨우 둥근 영토를 얻어낸 늙은호박이나, 숯불에 영혼을 태워야 정품이 되는 삼겹살의 운명을 떠올리며, 전신에 붉은 화인을 찍어야 한다 그래야만 눈이 큰 짐승들의 검은 입속을 점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 2021년 《시와 편견》 가을호 ..

나의 자작시 2021.10.02

만삭의 여인 2 - 심은섭

만삭의 여인 2 심은섭 그는 태아의 역마살을 지우려고 정갈한 의식을 치르고 난 뒤, 궁궐 한 채를 짓기 시작했다 서른 살의 주춧돌 위에 잘 다듬은 행운목으로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사이의 벽은 늪에서 홀로 잘 익은 갈대로 엮고, 암반수로 반죽한 황토를 발랐다 사계절 부활하는 산맥과 싱싱한 새벽종소리가 떼 지어 몰려오도록 동창을 냈다 먼 길을 떠날 때 좌표로 삼을 북두칠성이 보이도록 지붕은 무명천으로 씌웠다 질긴 모성애로 담장을 치고 밤이 주도하는 집회를 막으려고 문설주에 외등도 달았다 사방을 살핀 뒤에 실눈의 산짐승들의 수상한 이동을 감시하려고 망루를 세웠다 상수리나무들의 그림자가 성문의 사타구니로 빠져나갈 때 그녀는 궁궐로 들어와 방에 가만히 누웠다 그때 만월의 자궁 속에서 어둠을 깨는 첫울음소리가..

나의 자작시 2021.10.02

아내 - 심은섭

아내 심은섭- 얼굴은 하얀 목련이지만 뒷모습은 사월 초파일이다 나와 함께 한 방향으로 기관총을 쏘는 총잡이다 내가 마른 강물로 흐를 때면 기우제를 지내주는 제사장이고 대기권을 이탈하는 유성을 바라보며 서로 슬픔을 수혈하기도 했다 때로는 통기타 1번 선의 C단조였다가 내가 어둠의 깃발로 펄럭일 때 푸른 새벽을 불러주었다 붉은 장미꽃이 지천으로 핀 5월이면 초병의 눈초리로 경계를 강화하지만 10월이 오면 어김없이 황금불상의 미소를 건네는 능금이다 오랜 생의 전투로 사기가 저하된 패잔병인줄로 알았으나 탄알이 장전된 38구경 6연발 권총 한 자루였다 단단한 몇 개의 고독이 실밥이 터진 나의 정신을 향해 조준사격을 가할 때마다 내 손을 잡고 함께 군가를 불러주는 전우였다 -출처 : 2021년 《한국미소문학》가을호..

나의 자작시 2021.10.02

쉬파리 - 심은섭

쉬파리 심은섭 반 평 남짓 백반집 식탁에 앉아 점심 밥상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몸무게가 1g도 채 안 되는 쉬파리 한 마리가 식탁에 내려앉는다 그는 두 눈을 굴리며 발 빠른 걸음으로 나에게 바짝 다가와 다짜고짜로 두 손이 닳도록 빈다 그때 “나는 여의도 황금뺏지도 아니고 홀로 핀 패랭이꽃일 뿐이고, 신용카드사용 대금을 틀어막으려고 월말마다 두통을 앓는 샐러리맨이고 비를 맞아 땅위에 납작 엎드린 폐허의 종이박스일 뿐···”이라고 중얼거리는 사이에 더 가까이 다가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싹싹 빈다 흰 고봉밥을 허물며 또 생각했다 “노상방요 범칙금도, 교회의 헌금도 꼬박꼬박 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것은 며칠 전 고스톱 판에서 광값을 떼먹은 것에 대한 팔뚝질이었다 -출처 : 2021년 《시와시학》 가을호에 게재

나의 자작시 2021.09.23

독도학 개론 - 심은섭

독도학 개론 심은섭 열도列島의 신분이 섬이라서 너를 섬으로 보는 거다 그러나 너는 섬이 아니다 무면허 사냥꾼에게 영혼이 거세된 강치들의 울음이 굳어진 대릉원이다 저녁마다 후지산의 수상한 기침소리가 들려오면 도요새들이 어금니를 깨물며 맞서던 항쟁지이다 너의 영혼을 앗아 가려고 하면 할수록 대장장이가 무녀의 눈빛으로 찬물에 칼날을 담금질 하듯 너는 온 몸을 바닷물에 절이며 산다 그 소금기로 목숨을 연명할지언정 한 뼘의 영토를 넓혀본 적이 없다 괭이갈매기들의 절망만을 건져 올렸을 뿐, 화산폭발로 너의 온 몸이 화상을 입을 때 신이 흘린 눈물 한 방울이다 피멍이 들어도 동해바다가 산맥의 두 팔로 너를 떠받치고 있으므로 시지푸스가 정상으로 들어 올리던 바윗돌을 가슴에 무수히 올려놓아도 너는 결코 가라앉지 않는다 ..

나의 자작시 2021.09.08

물의 하산下山 - 심은섭

물의 하산下山 심은섭 혀가 검은 사람들이 떼 지어 산을 오른다 그때부터 계곡물은 산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걸으며 야생화의 혈관을 짓밟을까봐 맨발로 계곡을 따라 걸었던 것이다 그래서 발톱이 없는 까닭이다 몇 개의 빗방울만 내려가는 줄로 알았으나 수천 개의 은빛여자들이 빈 젖을 입에 물고 우는 어린물방울을 등에 업은 채 걷고 있었다 그래서 계곡의 물소리가 요란했던 것이었다 오직 허기를 채우려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하산하는 줄 알았으나 어둡기 전에 두 무릎 꿇고 온갖 폐수를 받아주는 바다를 만나야 했다 그래서 앞만 보고 흘렀던 것이다 -2021년 『문예감성』 여름호

나의 자작시 2021.08.28

만삭의 여인 1 -심은섭 시인

만삭의 여인 1 심은섭 어제 밤의 취기가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절벽에 매달린 한낱 말벌집이거나 사막여우의 발자국인 찍힌 모래언덕쯤으로 알았다 그러나 심해에서 길어 올린 양수로 가득 채워진 후원이 있는 궁궐 한 채였다 컴컴한 밤에도 위조지폐의 표정을 읽어내는 수전노의 감각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본적을 잃어버린 높새바람이 살던 둥근 움막집이거나 몰락한 왕조의 능인 줄 알았다 그러나 화강암으로 촘촘히 쌓아올린 산성이었다 양귀비꽃의 가슴에 붉은 허무가 채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얼굴 없는 당목을 섬기는 성황당이거나 카인의 후예들의 갈비뼈를 널어놓은 폐석장인 줄 알았다 하지만 천 개의 여신들이 지키는 신전이었다 -2021년 『문예감성』 여름호

나의 자작시 2021.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