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자화상
심은섭
서른을 넘긴 첫째아이가 말을 건넬 때마다 그의 몸속에서 내가 빠져나왔다 내가 그 아이에게 말을 건넬 때는 내 몸속에 나의 아버지가 산다는 것도 알았다
태양이 붉은 체온을 식히는 시간을 내가
수없이 생산해 내는 동안,
내 몸 속에서 열두 개의 달이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쉰 살의 9부 능선을 넘는 나에게 저녁노을을 등에 업고 들려주시던 아버지의 사냥교본을 읽으며 산다
낮달이 무심코 교차로를 건너는 동안
라일락꽃이 피고
늦은 오후가 밤 아홉시 쪽으로 점점 기울어질수록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필사하며, 혹은 그가 헛기침하며 뱉어낸 생의 질박한 무늬와 질량마저 표절한다.
내가 서있던 언덕에 긴 칼을 찬 첫째아이가 해원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의 몸속에서도 내가 푸르게 기억하던 열 두 개의 달이 원형을 간직한 채 떠오르리라
-출처 : 2021년 《시와 편견》 가을호에 [초대시]로 재발표
심은섭 시인
∙2004년 『심상』으로 등단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 『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평론집 : 『한국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 『상상력과 로컬시학』
∙(현)가톨리관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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