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작시 259

지명수배자 제1호 - '봄'

지명수배자 제1호 -봄 심은섭 그는 겨울을 살해한 사형수다 온몸에 살구꽃 문신이 새겨져 있다 어느 그믐날, 2월의 담장을 넘어 탈옥하여 긴급 지명수배 되었고, 인상착의는 벚꽃을 빼닮았다 새들은 몽타주가 인쇄된 수배 전단지를 물어다 온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다 순찰을 돌던 배추흰나비가 그를 체포했을 때 동물원의 침팬지들이 술렁거렸다 아무도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하지만 그의 전신엔 태양의 모발이 바늘처럼 자랐고, 동면에서 깨어난 비단뱀이 사냥을 위해 앞발을 손질하는 중이었다 그가 들판에 구금되던 날, 자폐증을 앓던 패랭이꽃은 우울의 끝이라고 단정했고, 흰 피를 흘리며 순교를 꿈꾸던 암탉은 일곱 마리의 새벽을 부화했다 벽난로가 이마를 식힌다 내 목덜미를 할퀴던 바람도 방죽에 앉아 손톱을 깎는다 *[출처..

나의 자작시 2021.08.28

만삭의 여인 1 - 심은섭

만삭의 여인 1 심은섭 어제 밤의 취기가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절벽에 매달린 한낱 말벌집이거나 사막여우의 발자국인 찍힌 모래언덕쯤으로 알았다 그러나 심해에서 길어 올린 양수로 가득 채워진 후원이 있는 궁궐 한 채였다 컴컴한 밤에도 위조지폐의 표정을 읽어내는 수전노의 감각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본적을 잃어버린 높새바람이 살던 둥근 움막집이거나 몰락한 왕조의 능인 줄 알았다 그러나 화강암으로 촘촘히 쌓아올린 산성이었다 양귀비꽃의 가슴에 붉은 허무가 채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얼굴 없는 당목을 섬기는 성황당이거나 카인의 후예들의 갈비뼈를 널어놓은 폐석장인 줄 알았다 하지만 천 개의 여신들이 지키는 신전이었다 -2021년 『문예감성』 여름호

나의 자작시 2021.07.20

트로트 1 - 심은섭 시인

트로트 1 심은섭 판자촌굴뚝의 저녁연기처럼 겨우 목숨을 연명하며 살아온 풍각쟁이의 북소리이다 이것이 한낱 여름에 양철지붕을 두드리며 객기를 부리는 소낙비인줄 알았으나 어둠 속에서 달빛이 그려놓은 악보 위에서 달맞이꽃이 몸 푸는 소리였다 시간을 갉아먹은 누에가 은실을 뽑아내듯 가락을 숭배하며 살아온 네 박자이다 이것이 허공의 고막을 찢어낼 것만 같은 금관악기가 세상을 비관하는 유언인줄 알았으나 사내를 징용 보내고 돌아오는 여인의 치맛자락 끄는 소리였다 자정의 어둠보다 깊은 절벽 아래로 한없이 떨어지며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실폭포이다 이것이 바람이 던진 돌멩이에 도시의 뒷골목 선술집의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인줄 알았으나 옥탑방 악사가 반음표의 허기를 끓이는 소리였다 -2021년 〈문학저널〉 봄호 게재 --..

나의 자작시 2021.06.25

붉은 동백의 선언문 - 심은섭

붉은 동백의 선언문 심은섭 눈이 내린다 무릎까지 차오른다 오와 열을 맞춰 서서 추위에 떨고 있는 저들을 한낱 나무로 생각했으나 나무가 아니다 기필코 세 번의 꽃을 피우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언 손으로 작성한 붉은 선언문이다 먼 섬나라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와도 허공에 꽃을 매달아야 한다는 것과 목을 꺾어, 통째로 땅 위에 떨어져서라도 꽃으로 다시 환생해야 한다는 것과 나의 부패한 정신의 마루에 꽃을 피워주겠다는 맹서이다 한낮에 마른 천둥소리 같은 선혈의 선언문 낭독에 산사를 오르내리던 바람도 고개를 끄덕인다 -출처 : 2021년 『See』 4월호에 발표

나의 자작시 2021.06.20

봄 - 심은섭

봄 심은섭 불혹이 넘은 여인의 마음을 이토록 들쑤셔놓은, 찬바람이 폭력을 휘두르던 들판에 따스한 온풍기를 틀어 놓은 넌, 누구니? 욕망을 채운 고양이에게 또 다른 욕망을 채울 수 있는 힘을 준, 꽃들의 유언이 열매라고 채찍질로 가르쳐 주는 넌, 누구니? 내 그리움의 길이만큼 아버지의 무덤에 잔디가 자라게 만든, 생에 지쳐 우시던 어머니의 슬픔만큼 찬란한 넌, 누구니? -출처 : 2021년 『See』 4월호에 발표

나의 자작시 2021.06.20

가문비나무엔 허파가 없다 - 심은섭

가문비나무엔 허파가 없다 심은섭 이동의 욕망이 화산처럼 솟구칠 때마다 신은 나의 허파를 떼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친정집 마당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습니다 까마귀가 스무 가지의 감각을 주고 갔지만 눈과 귀를 닫고 삽니다 오랜 시간은 이동의 습성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그 죄로 직립의 자세로 저녁마다 굵고 긴 반성문을 씁니다 수은주의 붉은 혓바닥이 빙점 아래로 통과할 때 벌목공의 톱날에 온몸이 잘려 나가도 이젠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둣빛살점이 뜯겨나가도 피죽바람을 불러와 생손을 앓습니다 나는 어떤 계절에도 한 장의 잎만으로도 천공을 뚫고 부활을 합니다 -출처 : 계간지 『시인시대』 2021년 여름호에 재발표

나의 자작시 2021.06.07

[시인의 세계관, 그리고 시작 모토] - 2021년 계간지 「상징학연구소」 여름호 - 심은섭

나의 시작 행위는 ‘접신된 광기의 상태’에서 상상력으로 공복의 정신을 채우려는 일이며 나의 시는 일체의 허구다. 그 허구에서 찾아낸 진실을 담을 언어의 질그릇을 가마에서 굽는 일이다. - [시인의 세계관, 그리고 시작 모토] - 2021년 계간지 「상징학연구소」 여름호에 게재

나의 자작시 2021.06.02

회전목마 - 심은섭

회전목마 심은섭 허공이 나의 출생지이다 그러므로 네온사인이 발광하는 지상에 발을 내디뎌서는 안 된다 나의 운명은 자본에 조련된 동전을 등에 업고 결정된 생의 궤적을 그려내는 일이다. 이것이 신이 내린 첫 계명이다 오래도록 변두리를 배회하며 사는 동안 두 눈은 퇴화 되었으나 무딘 감각으로 겨우 허공에 길을 낸다 그런 까닭에 운명의 축을 이탈할 수도 없었거니와 갈기를 날리며 광란하는 질주의 본능을 잊어버렸다 밤꽃이 발정하는 유월, 변압기가 구워낸 찌릿한 전류 한 덩어리로 식사를 한다 그것마저 배식이 중단된 날엔 공중에 정박해야 한다 오늘도 고독의 깃발을 나부끼게 만든 개똥벌레 한 마리 찾아오지 않는다 ------------------------------------------------------------..

나의 자작시 2021.06.02

열 세 살의 셀파 / 심은섭 시인

열 세 살의 셀파 심은섭 히말라야산맥은 신의 발가락이다 그는 그 발가락에 도달해야 한 끼의 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30kg의 업을 지고 남체 바자르 3440km를 오른다 출생의 환희보다 빈 젖의 맛을 먼저 눈치 챈 열 세 살의 셀파, 산을 내려오는 하얀 얼굴의 황금빛 등산화와 발목에 맷돌을 매달은 것 같은 발걸음, 그것으로 산을 오르는 그의 고무슬리퍼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까닭을 알 수 없는 전생의 죄라도 씻어낼 요량으로 마니차*를 돌려본다 그의 손금으로 일몰이 몰려온다 어둠을 몰아낼 등잔 하나 없다 이를 위해 어떤 신神조차 고민하지 않는 세상을 지켜보던 개잎갈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이빨을 갈며 ‘고통이 고통에게 기대어 산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원통형 불교도구 -출처 : 2021년 《시산맥》 ..

나의 자작시 2021.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