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가전제품
심은섭
신이 입력한 운명의 프로그램을 따라 길을 걸으며
한 번도 멈춰선 적이 없다 그는
스스로 생의 궤적을 1mm도 이탈하지 않았다
불혹의 시절,
그는 선술집에서 부패한 진실을 놓고
소주와 이마를 맞대고 한판 싸우던 날들과
새벽과 저녁사이에서 들려오는 극빈의 아우성으로
반성문을 쓰던 날도 있었다
또 한때는
무궁화꽃이 가득 핀 나비넥타이를 목에 걸고
초고속 엘리베이터가 승천하는
고층빌딩 회전의자에 앉아있던 날들도 있었으나
지금은 재활을 위해
서비스센터에서 이마에 붉은 띠를 두르고 전신을
닦고 조이고, 기름 치던 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새파란 감각이 무뎌져
겨울에 핀 꽃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시간을 접고 펴는 한 올의 신경은 여전히 푸르다
그는 내가 매일 읽어야 할 고전서이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부활의 몸이다 그러므로 그를
꼰대라고 부르지 마라
-출처 : 2022년 계간지 『동안』 가을호 발표
심은섭 시인
〈악력〉-심은섭
- 2004년 『심상』으로 등단
-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 시집, 『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2009),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2021) 외
- 평론집, 『한국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2015). 『상상력과 로컬시학』(2021) 외
- 2008년 「제1회 5,18문학상」 수상
- 2022년 「제22회 박인환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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