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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돌의 궤적 - 심은섭

맷돌의 궤적 심은섭 어둠이 덧칠되는 저녁마다 백열등 불빛 아래에서 남녀 댄서가 부둥켜안고 탱고 춤을 추는 줄 알았으나 그는 누대로부터 이어온 단단한 극빈을 타파하려고 입가에 흰 거품을 물며 도는 나의 파수꾼이었다 전쟁터로 나가는 장수의 얼굴 표정으로 개화한 지상의 꽃을 부정하며 하루 종일 공터를 배회하는 궁둥잇바람인 줄 알았으나 땀으로 생의 간을 맞추며 무릎이 해진 나의 영혼을 수선하는 늙은 미싱사였다 그가 허무를 신으로 숭배하며 공회전하는 물레방아인 줄 알았으나 제 몸을 갈아 인기척이 없는 굴뚝에 저녁연기를 피워 올리며, 어린 꽃들의 서늘한 하루를 봄날 같은 아랫목에 묻어 데우는 어머니였다 -2022년 《시현실》 봄호 〈악력〉-심은섭 -2004년 『심상』으로 등단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나의 자작시 2022.03.25

궁서체의 여자 - 심은섭

궁서체의 여자 심은섭 허기에 찬 굴뚝에 저녁연기를 피워내려고 그녀는 겨울나무처럼 서서 잠을 잤다 어느 날 불현 듯 얇아진 귀에 들려오는 풍문으로 사치와 부귀를 초서체로 써보았지만 풀잎처럼 흔들릴 뿐, 붓 끝에 젖은 먹물보다 몸은 더 어두워만 갔다 반칙은 타락을 낳는다는 것을 눈치 챈 그녀는 다시 진지한 생의 획을 그어보려고 빈 들판으로 나가 새의 발자국을 주워오거나 사랑가를 부르다 죽은 매미들의 목록을 찾아 나섰다 달빛이 수수밭에 벗어놓고 간 유행을 타지 않은 푸른 새벽을 데려 오기도 했다 폭설이 내리는 날에 예정된 상견례로 궁핍과 정중한 악수를 나누기도 했지만, 그녀는 삼색 볼펜으로 밤의 수염을 그리지는 않았다 은자령에 뭉게구름이 걸어놓은 자유 한 벌이나 보릿고개를 넘다가 해산한 대추나무의 꽃잎 한 장..

나의 자작시 2022.03.25

가문비나무엔 허파가 없다 - 심은섭

[사화집 원고 – 심은섭] 가문비나무엔 허파가 없다 심은섭 이동의 욕망이 화산처럼 솟구칠 때마다 신은 나의 허파를 떼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친정집 마당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습니다 까마귀가 스무 가지의 감각을 주고 갔지만 눈과 귀를 닫고 삽니다 오랜 시간은 이동의 습성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그 죄로 직립의 자세로 저녁마다 굵고 긴 반성문을 씁니다 수은주의 붉은 혓바닥이 빙점 아래로 통과할 때 벌목공의 톱날에 온몸이 잘려 나가도 이젠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둣빛살점이 뜯겨나가도 피죽바람을 불러와 생손을 앓습니다 나는 어떤 계절에도 한 장의 잎만으로도 천공을 뚫고 부활을 합니다 2022년 《K-POEM》 사화집 게재 《심은섭 시인》 ∙2004년 『심상』으로 등단 ∙2006년 『경..

나의 자작시 2022.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