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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가전제품 - 심은섭

패가전제품 심은섭 신이 입력한 운명의 프로그램을 따라 길을 걸으며 한 번도 멈춰선 적이 없다 그는 스스로 생의 궤적을 1mm도 이탈하지 않았다 불혹의 시절, 그는 선술집에서 부패한 진실을 놓고 소주와 이마를 맞대고 한판 싸우던 날들과 새벽과 저녁사이에서 들려오는 극빈의 아우성으로 반성문을 쓰던 날도 있었다 또 한때는 무궁화꽃이 가득 핀 나비넥타이를 목에 걸고 초고속 엘리베이터가 승천하는 고층빌딩 회전의자에 앉아있던 날들도 있었으나 지금은 재활을 위해 서비스센터에서 이마에 붉은 띠를 두르고 전신을 닦고 조이고, 기름 치던 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새파란 감각이 무뎌져 겨울에 핀 꽃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시간을 접고 펴는 한 올의 신경은 여전히 푸르다 그는 내가 매일 읽어야 할 고전서이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부..

나의 자작시 2022.09.24

목어木魚 - 심은섭

목어木魚 심은섭 너의 전생은 살구나무였다 몸속 내장을 다비우고 오랜 수행 끝에 물고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순간에도 뜬 눈으로 허기진 맹수처럼 울어야 한다 아니다 오직 가마솥의 사골이 우러나는 것처럼 울어야 한다 그러할 때 지친 강물들이 발맞추어 바다에 도달할 수 있고 황금빛 정장을 한 태양이 밤을 몰아낸다 천둥소리로 울어야 한다 그렇게 울지 않으면 저녁 들판의 허수아비들이 천년의 잠 속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북극의 빙하가 갈래지는 소리로 또 울어야 한다 한낮, 우박의 습격으로 생이 무너진 배추잎들이 다시 신발 끈을 동여매고, 태풍에 정신을 잃고 깜빡이는 신호등이 깨어날 수 있다 아니다 길거리에서 저렴하게 매매되던 나의 낡은 영혼이 새벽처럼 깨어날 수 있다 -출처 : 2022년 계간지 『동안』 가을호 발표..

나의 자작시 2022.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