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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의 순교 - 심은섭

등나무의 순교 심은섭 벌목공의 톱날에 무참히 순교한 등나무가 고해기 회전원판 사이를 통과한 뒤 하얀 이념의 A4를 낳았다 그때부터 그 하얀 이념의 A4에서 죽은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거나 혹은 쉼 없이 흰 피가 흘러내렸다 그 하얀 이념의 A4는 만년필의 펜촉이 닿을 때마다 경련을 일으키며, 어느 재벌가 금괴를 그려주거나 허름한 벽난로의 불쏘시개 노릇을 할 뿐이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신이 떠난 푸른 별이 신열을 내며 몹시 앓았다 누구도 하얀 이념이 나무의 상처인 것을 모른다 하얀 이념은 나무의 신음이고 한 올의 신경이며, 끝을 모르는 탄식이다 한 절음의 생살이다 지금도 프린터의 허기진 욕망을 채우는 한 장의 식사로 통과하고 있다 -출처 : 2022년 《시와세계》 여름호 게재 심은섭 시인 《심은섭 시인》 ∙2..

나의 자작시 2022.06.21

독도학개론 - 심은섭

독도학 개론 심은섭 열도列島의 신분이 섬이라서 너를 섬으로 보는 거다 그러나 너는 섬이 아니다 무면허 사냥꾼에게 영혼이 거세된 강치들의 울음이 굳어진 대릉원이다 저녁마다 후지산의 수상한 기침소리가 들려오면 도요새들이 어금니를 깨물며 맞서던 항쟁지이다 너의 영혼을 앗아 가려고 하면 할수록 대장장이가 무녀의 눈빛으로 찬물에 칼날을 담금질 하듯 너는 온 몸을 바닷물에 절이며 산다 그 소금기로 목숨을 연명할지언정 한 뼘의 영토를 넓혀본 적이 없다 괭이갈매기들의 절망만을 건져 올렸을 뿐, 화산폭발로 너의 온 몸이 화상을 입을 때 신이 흘린 눈물 한 방울이다 피멍이 들어도 동해바다가 산맥의 두 팔로 너를 떠받치고 있으므로 시지푸스가 정상으로 들어 올리던 바윗돌을 가슴에 무수히 올려놓아도 너는 결코 가라앉지 않는다 ..

나의 자작시 2022.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