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의 순교 심은섭 벌목공의 톱날에 무참히 순교한 등나무가 고해기 회전원판 사이를 통과한 뒤 하얀 이념의 A4를 낳았다 그때부터 그 하얀 이념의 A4에서 죽은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거나 혹은 쉼 없이 흰 피가 흘러내렸다 그 하얀 이념의 A4는 만년필의 펜촉이 닿을 때마다 경련을 일으키며, 어느 재벌가 금괴를 그려주거나 허름한 벽난로의 불쏘시개 노릇을 할 뿐이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신이 떠난 푸른 별이 신열을 내며 몹시 앓았다 누구도 하얀 이념이 나무의 상처인 것을 모른다 하얀 이념은 나무의 신음이고 한 올의 신경이며, 끝을 모르는 탄식이다 한 절음의 생살이다 지금도 프린터의 허기진 욕망을 채우는 한 장의 식사로 통과하고 있다 -출처 : 2022년 《시와세계》 여름호 게재 심은섭 시인 《심은섭 시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