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작시

등나무의 순교 - 심은섭

자크라캉 2022. 6. 21. 09:50

 

 

나무의 순교

 

 

심은섭

 

 

 

벌목공의 톱날에 무참히 순교한 등나무가

고해기 회전원판 사이를 통과한 뒤 하얀 이념의 A4를

낳았다

그때부터 그 하얀 이념의 A4에서

죽은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거나 혹은 쉼 없이

흰 피가 흘러내렸다

 

그 하얀 이념의 A4는

만년필의 펜촉이 닿을 때마다 경련을 일으키며,

어느 재벌가 금괴를 그려주거나

허름한 벽난로의 불쏘시개 노릇을 할 뿐이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신이 떠난 푸른 별이 신열을 내며 몹시 앓았다

 

누구도 하얀 이념이 나무의 상처인 것을 모른다

하얀 이념은 나무의 신음이고

한 올의 신경이며, 끝을 모르는 탄식이다

한 절음의 생살이다 지금도

프린터의 허기진 욕망을 채우는 한 장의 식사로

통과하고 있다

 

 

 

  -출처 : 2022년 《시와세계》 여름호 게재

 

 

심은섭 시인

 

 

《심은섭 시인》

 

∙2004년 『심상』으로 등단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 『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평론집 : 『한국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 『상상력과 로컬시학』 외

∙(현)가톨리관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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