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작시

늙은 도둑의 오후 - 심은섭

자크라캉 2022. 6. 21. 09:57

 

은 도둑의 오후

 

 

심은섭

 

 

이 지상에 잠시 들렸다가 많은 것을 훔쳤다

 

다시 돌려줄 수도 없거니와

신의 재산목록에서도 삭제될 수 없는 장물들이다

 

한 평생 나는 도둑으로 살아왔다

성탄저녁에 어느 도심의 슬래브집 지붕아래에서

꽃녀* 한 송이를 보쌈 했다

그때 우체국의 출입문 돌쩌귀가 닳도록

강건체로 주절거린 편지 수십 통을 날려 보냈고

사기 치다시피 했다

 

원적지가 어딘지 해독할 수 없는

살찐 박달나무 모종 두 그루를 대낮에 또 훔쳤다

그들은 애증의 볕을 받아 잘 자랐다

가문의 비밀을 드러낸 채

시조부의 허락도 없이 버젓이 족보에 올렸으나

나를 훔친 시조부는 태클을 걸지 못했다

 

나는 지금,

박달나무가 훔쳐온 손자묘목을 은닉한 장물아비,

오후쯤, 천국경찰서로부터

구류처분 출두명령서가 곧 도착하리라

 

   

*꽃 같은 여자

 

 

 

 

  -출처 : 2022년 《시와세계》 여름호 게재

 

 

심은섭 시인

 

 

《심은섭 시인》

 

∙2004년 『심상』으로 등단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 『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평론집 : 『한국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 『상상력과 로컬시학』 외

∙(현)가톨리관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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