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의 순교
심은섭
벌목공의 톱날에 무참히 순교한 등나무가
고해기 회전원판 사이를 통과한 뒤 하얀 이념의 A4를
낳았다
그때부터 그 하얀 이념의 A4에서
죽은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거나 혹은 쉼 없이
흰 피가 흘러내렸다
그 하얀 이념의 A4는
만년필의 펜촉이 닿을 때마다 경련을 일으키며,
어느 재벌가 금괴를 그려주거나
허름한 벽난로의 불쏘시개 노릇을 할 뿐이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신이 떠난 푸른 별이 신열을 내며 몹시 앓았다
누구도 하얀 이념이 나무의 상처인 것을 모른다
하얀 이념은 나무의 신음이고
한 올의 신경이며, 끝을 모르는 탄식이다
한 절음의 생살이다 지금도
프린터의 허기진 욕망을 채우는 한 장의 식사로
통과하고 있다
-출처 : 2022년 《시와세계》 여름호 게재
심은섭 시인
《심은섭 시인》
∙2004년 『심상』으로 등단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 『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평론집 : 『한국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 『상상력과 로컬시학』 외
∙(현)가톨리관동대학 교수
'나의 자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얀 목련 - 심은섭 (0) | 2022.07.01 |
---|---|
늙은 도둑의 오후 - 심은섭 (0) | 2022.06.21 |
독도학개론 - 심은섭 (0) | 2022.05.26 |
회전목마 - 심은섭 (0) | 2022.05.07 |
멍게- 심은섭 시인 (0) | 2022.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