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레종
심은섭
아파야 한다 더 아파야 한다 네가 아파 울 때
해산날이 다가오는
말리꽃이 나뭇가지에서 몸을 풀 수가 있다
아니다
식사를 거르며 공전하던 에스컬레이터가
겨우 땀을 식힐 수가 있다
아파야 한다 아파서 죽도록 피울음을 토할 때
천 년 동안 잠들었던 내가
정정한 가을연못처럼 깨어날 수가 있다
아니다
맹금류들의 발톱이 어느 때보다 청빈해지고
길고양의 빈 내장에 화색이 돌 거다
아파야 한다 더 아파야 한다 네가 한없이 울면
태풍으로 실명한 일개미에게
컵라면이 익어가는 저녁이 다가올 수 있다
아니다
종착역을 잊어버린 그믐달이
새벽마다 어둠 속에서도 열반에 들 수 있다
-2022년 《시》 7월호에 게재
심은섭 시인
〈악력〉-심은섭
- 2004년 『심상』으로 등단
-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 시집, 『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2009),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2021) 외
- 평론집, 『한국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2015). 『상상력과 로컬시학』(2021)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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