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경대 사대부고 10회>님의 카페에서
[월간「우리시」 2008 상반기 당선작]
달콤한 지구 / 황연진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건물들 사이로 차량이 질주하고
도시가 앓는 소리를 낸다
아프지 않은 과육은 더디게 숙성한다고
농익은 불빛들이 말한다
달리면서 상처를 내지 않는 건 없다
종잡을 수 없는 발자국들이
무수히 보도블록에 찍힌다
줄지어 다가오는 가로등과 신호등
불빛에서 불빛으로 이어지는
뜨거운 순례,
숨 막히는 통증이 불을 켠다고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른다고
벌레 먹은 사과 속이 물크러지듯
골밑을 덮어 흐르다 시득시득
웃음을 베어 무는 강,
사람이 만들어내는 상처가 너무 향기로워서
지구는 빛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숨이 차올라
불빛들은 소리 지른다
벌레들이 어두운 살 속을 통과하고 있다
장미꽃 다발
장미꽃 삼십 송이를 한데 묶어 비닐에 싼다
비닐은 꽃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꽃에게 말 걸지도 않는다
장미꽃 노란 다발을 투명 비닐에 싼다
비닐은 꽃을 흠향하지 않는다
비닐은 꽃을 시기하지도 않는다
장미꽃들이 이 빠진 상어처럼 웃는다
장미 꽃다발이 흐드득 흐드득 웃는 소리를
비닐이 듣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비닐은 무심하여 청각을 유지하려 하지 않았다
이 세상 버려질 것과 사라질 것들에 대해
마음을 집중하지 않았다
장미꽃은 웃고 찔리고 아프지만
그런 것들이 투명한 중독에 이르지는 못한다
세상에는 무미건조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를테면 주사액은 절대로 마르지 않는다
향기를 그리워하지 않은 지 오래,
비닐은 장미꽃 다발을 구겨 안고 거리를
활보하는 일이 절대로 불편하지 않다
장미가 시들어가는 것은 애초부터 아름다웠다
창
아파트 앞동 수많은 창들이
밤낮으로 수년간 내 쪽을 향하여 있다는
이 견고한 사실로부터 그윽이 불안해질 때 있다
뒷동 어느 집 사내가
홀딱 벗은 채 목욕탕에서 나오는 것을
내가 불시에 목격하였던 것처럼
앞동의 어느 누군가가 엊그제 소파에 무너져 울던
내 모습을 보았을지 모를 일
감춰진 누군가의 절망을 또 다른 누군가가 들여다보고 안쓰러워했을 거라고
달콤한 위안을 느껴야 할까, 수치에 떨어야 할까
더러 미끈해 보이는 거울 속 내 각선미에 취해
혼자 밟아보던 스텝들을
누군가 똑같이 따라 밟기라도 했을까
베란다 넓은 창문은 총천연색 무대의 투명한 막이었을까
집집마다 똑같이 현관에 문 닫아걸고
다른 쪽으로는 몇 개씩 구멍을 내어 시종
침묵하는 무수한 이웃들의 눈
야간비행
밤에는 날개를 펴지 않는다
땅 위를 걸으며 길바닥에 박음질한다
날아오를 때의 아찔함,
분간할 수 없는 항로의 아득함,
던져버리듯 꾹꾹 발자국 내리찍는다
허공의 아침은 풋사과의 향내를 풍기며 왔다
붕붕, 까딱이는 꽃모가지들을 건드리면
서로 부딪히는 나뭇가지와 빛살,
현수막들이 금세 얽혀들어
푸르르 불꽃을 내며 타올라 버렸다
연기와 그을음에 눈이 아렸다
길은 길 사이로 빠져나가고 날개 끝으로 그리는 노선은 언제나
반복을 연출하기만 했다
이젠 더 날아오르지 않는 그윽한 저녁
몰래몰래 내려와 숨 쉬는 것들이 이리저리 길바닥을
누비고 돌아다닌다, 그렇다
향기도 빛깔도 없는 맨바닥에 수놓아지는
끈질긴 목숨의 얼굴,
거대한 활주로가 밤새 완성되고 있다
한밤의 천 원짜리들
아파트 단지 쥐똥나무 울타리 아래
한 개 천 원짜리 길게 길게 줄지어 있다
파릇한 형광램프 불빛에 며칠째
나뭇잎들은 잠 못 이루고 있다
손거울, 장식액자, 국자, 등 긁개에서 로봇인형까지
낮에 다 갖지 못한 물건들
지친 귀갓길엔 단 한 장의 지폐로 살 수 있다고
행인들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긴다
환한 대낮 제자리에 놓여 있으면
눈에 띄지도 않을 세간들
갖가지 체위로 그림자 깔고 앉아서
아롱아롱 복숭아 색 살빛을 내뿜고 있다
네모난 플라스틱 바구니에 칸칸이 담겨
밤거리에 불 밝혀지면
사람의 살림살이도 한 편의 긴 춘화가 되는구나
그저 구경만 하고 지난다 해도 어쩌진 못할
굳이 만져만 보고 간다 해도 어쩌진 못할
빛 좋은 천 원짜리들
긴 밤, 뜬눈으로 한바탕 꿈꾸고 있다
[심사평]
해외에서 투고해온 분들을 포함하여 많은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시가 감동을 주지 않는 시대에도 시인지망생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 앞에서 한국시의 앞날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그것도 젊은이들보다는 나이든 분들이 문학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고 시인이 되고자하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자리였다.
투고한 시의 전반적인 경향은 전통 서정시의 큰 흐름을 넘어서는 실험적 시도라거나 또는 새로운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획기적인 작품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단지 시의 수준이 평준화되어 가는 모습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만큼 패기만만하면서도 신인으로서의 놀라운 역량을 엿보게 하는 발군의 작품들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중에도 한성규의 「말랑말랑한 진흙이 되고 싶다」 외 9편, 안사라의 「꽃이 붉은 이유」 외 9편, 황연진의 「달콤한 지구」 외 12편이 최종심에 올랐다.
한성규는 투고한 10편의 작품 중 절반이 봄을 노래하고 있었는데, 봄의 정서를 우리 전통적인 시의 기법으로 잘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딘가 낡았다는 느낌을 끝내 지울 수가 없었다. 시선의 깊이가 좀처럼 느껴지지 않을 뿐더러 구태의연한 시적 진술방법에 너무 안주한다는 것이 흠이었다. 새로운 시선과 거기에 걸맞은 감수성, 비유와 상상력을 아우르는 시적 진술방식이 아직은 조금 못 미친다고 생각되었다.
안사라의 작품들은 오랜 시력 탓인지 저마다 단단한 틀을 지니고 있었다. 일상적인 일을 시적진술로 환기하는 저력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만큼 시의 수준이 고른 편이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솜씨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어떤 결정적인 진술에 다다르면 그만 이야기를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슬그머니 주저앉고 만다. 이것은 주제의식에 대한 뚜렷한 설정의 미약함과 직설적인 시적 진술방법에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이 점이 가장 아쉬웠다.
그래서 선자들은 자연스럽게 황연진의 손을 들어주었다. 「장미꽃다발」에서 보여주는 진술의 새로움, 통상적인 인식에서 새롭게 읽어낸 관념을 시적 장치로 읽어내는 저력도 만만치 않다. 「달콤한 지구」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움도 오랜 시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창」에서 읽어내는 현실이 녹녹치 않음을 확인한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당선작품 외에 몇몇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설익은 진술방법이다. 이 점은 직설적인 진술방법보다는 비유와 상징으로 어떤 그림을 만들어내는데 주력한다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이에 우리는 한 시인으로서 능히 제자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 하에 황연진을 월간『우리詩』의 세 번째 당선자로 추천하는 것이다. 시인의 길은 멀고 험한 가시밭길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새벽길을 홀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결코 안이하고 안일한 길을 택하지 말고 끊임없는 자기 수련과 혁신으로 늘 새롭게 태어나길 바란다. 그리하여 온실에서 피우는 장미꽃이 아니라 산야에 피어나는 야생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좀 더 따뜻하고 환하게 해 주는 시인이 되리라 믿는다.
비록 당선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최종심에서 아깝게 탈락한 두 응모자는 머지않은 날 그 이름 석자를 문단에 올릴 것이라 생각된다. 아울러 경향각지에서 응모해 주신 모든 분들께 고마움과 함께 가일층 분발과 정진하기를 기대한다.
[ 심사위원 : 임 보 · 홍해리 · 임동윤(글)]
[당선소감]
빛과 빚을 위하여
어둡고 긴 生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을 때 빛이 보였습니다. 그 빛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기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고 몸부림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락에 떨어져 다시 깨어나 보아도 그것은 확실한 빛이었습니다.
시와 살았습니다. 시를 통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시와의 동거는 늘 외롭고 위태로운 것이었습니다. 환희와 절망이 교차하는 처절한 투쟁이었습니다. 저와 제 시가 정착할 현실의 집이 오래 그리웠습니다.
저를 반갑게 맞아주시고 보금자리를 내어 주신 월간『우리詩』의 선생님들과 선배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와의 사랑을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빛'으로 시는 저에게 왔고 이제 제 생을 다해 갚아야 할 ‘빚’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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