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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금의 조건 - 심은섭

능금의 조건 심은섭 청동시계가 멈춰도 지상으로 내려와서는 안 된다 최상의 꿈을 출시하려면 민낯에 구릿빛 화살촉도 무수히 꽂아야 한다 그럴수록 너는 산모가 산통을 잊은 것처럼 홀로 꽃을 피워내던 통점을 잊은 채 또 낙화를 서둘러야 한다 어느 4월, 군중을 향해 낭독한 하얀 선언문대로 온몸의 모서리를 허물어야 한다 그때 돌칼이 아니라 풍상風霜으로 지워야 한다 그것은 제법 무게가 나가는 선조의 유전자가 허무의 원을 그리며 살기를 원하지 않는 까닭이다 늦가을, 흰서리를 맞고 겨우 둥근 영토를 얻어낸 늙은호박이나, 숯불에 영혼을 태워야 정품이 되는 삼겹살의 운명을 떠올리며, 전신에 붉은 화인을 찍어야 한다 그래야만 눈이 큰 짐승들의 검은 입속을 점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 2021년 《시와 편견》 가을호 ..

나의 자작시 2021.10.02

만삭의 여인 2 - 심은섭

만삭의 여인 2 심은섭 그는 태아의 역마살을 지우려고 정갈한 의식을 치르고 난 뒤, 궁궐 한 채를 짓기 시작했다 서른 살의 주춧돌 위에 잘 다듬은 행운목으로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사이의 벽은 늪에서 홀로 잘 익은 갈대로 엮고, 암반수로 반죽한 황토를 발랐다 사계절 부활하는 산맥과 싱싱한 새벽종소리가 떼 지어 몰려오도록 동창을 냈다 먼 길을 떠날 때 좌표로 삼을 북두칠성이 보이도록 지붕은 무명천으로 씌웠다 질긴 모성애로 담장을 치고 밤이 주도하는 집회를 막으려고 문설주에 외등도 달았다 사방을 살핀 뒤에 실눈의 산짐승들의 수상한 이동을 감시하려고 망루를 세웠다 상수리나무들의 그림자가 성문의 사타구니로 빠져나갈 때 그녀는 궁궐로 들어와 방에 가만히 누웠다 그때 만월의 자궁 속에서 어둠을 깨는 첫울음소리가..

나의 자작시 2021.10.02

아내 - 심은섭

아내 심은섭- 얼굴은 하얀 목련이지만 뒷모습은 사월 초파일이다 나와 함께 한 방향으로 기관총을 쏘는 총잡이다 내가 마른 강물로 흐를 때면 기우제를 지내주는 제사장이고 대기권을 이탈하는 유성을 바라보며 서로 슬픔을 수혈하기도 했다 때로는 통기타 1번 선의 C단조였다가 내가 어둠의 깃발로 펄럭일 때 푸른 새벽을 불러주었다 붉은 장미꽃이 지천으로 핀 5월이면 초병의 눈초리로 경계를 강화하지만 10월이 오면 어김없이 황금불상의 미소를 건네는 능금이다 오랜 생의 전투로 사기가 저하된 패잔병인줄로 알았으나 탄알이 장전된 38구경 6연발 권총 한 자루였다 단단한 몇 개의 고독이 실밥이 터진 나의 정신을 향해 조준사격을 가할 때마다 내 손을 잡고 함께 군가를 불러주는 전우였다 -출처 : 2021년 《한국미소문학》가을호..

나의 자작시 2021.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