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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의 수난기 - 심은섭

텃밭의 수난기 심은섭 파꽃에 벌들이 모여 꿀파티를 하고 있다 만개한 사과나무도 수정을 서두르고 있다 재래시장으로 나갈 채비를 마친 쑥갓의 입술엔 나비가 한창이다 모두가 텃밭에 모여 생의 천을 짜는 오후 007가방을 든 먹구름이 텃밭으로 떼지어 몰려와 푸른 지폐를 난사한다 그로부터 담장을 기어오르던 강낭콩이 회색빛 얼굴로 황급히 교회당으로 몸을 숨기고, 하늘을 찌를 듯한 굴뚝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연신 검은 교만을 뿜어낸다 그 교만을 마신 풍뎅이들은 입술에 돋아난 물집 몇 채를 들고 변두리로 이주했다 그로부터 하늘에 더 이상 달이 뜨지 않았다 -출처 : 2022년 《심상》 8월호 심은섭 시인 〈악력〉-심은섭 - 2004년 『심상』으로 등단 -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 시집, 『K과장이 노량..

나의 자작시 2022.08.04

밥꽃의 여자 - 심은섭

밥꽃의 여자 심은섭 코로나19로 아내가 밥을 짓지 못했다 내가 밥을 지었다 철이 덜든 밥알, 모래알 같은 밥알 영혼이 빠져나간 밥알 훅 불면 민들레홀씨처럼 날아갈 듯한 밥알이다 서툴게 생의 돌담을 쌓는 나의 모습에 그녀가 벌떡 일어나 밥을 짓는다 철이 든 밥알, 별사탕 같은 밥알이다 경전의 활자 같은 밥알 이팝꽃이다 흰 미소를 짓는 다이아몬드의 집합체, 철이 들어야 철이든 밥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 겨우 눈치 채는 저녁이다 -출처 : 2022년 《심상》 8월호 심은섭 시인 〈악력〉-심은섭 - 2004년 『심상』으로 등단 -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 시집, 『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2009),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2021) 외 - 평론집, 『한국현대시의 표정과 ..

나의 자작시 2022.08.04

감나무 100년사 - 심은섭

감나무 100년사 심은섭 그는 청호동으로 건너오는 갯배가 잘 보이는 망향탑 한 귀퉁이 공터에 자리잡고 산다 홀로 바다를 지키던 갈매기섬을 흔들어놓고 해풍도 가끔 다녀간다 그는 밤새도록 외등을 끄지 않는다 긴 목을 더 길게 내밀고 북쪽의 흰 그림자를 한 번만이라도 보려는 백 년의 기다림, 상봉의 그 날까지 버티려고 온몸에 이정표처럼 살이 찐 잎을 달고 산다 무사히 찾아오라고 혹은, 그 잎을 보고 찾아올 수 없을 거라는 스스로의 의심으로 홍시의 깃발을 흔들며 북쪽을 응시하고 있다 눈꽃이 나뭇가지에 피어나는 계절이 수십 번 반복되어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지막 갯배가 굳은 표정으로 부두에 닿았다 한 양동이의 그리움이며, 한 상자의 절망과 한 됫박의 슬픔만 타고 있을 뿐, 100년을 기다리던 그 사람은 보이지..

나의 자작시 2022.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