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르민으로부터 히페리온에게
류수안
전 망
인간이 깃들인 삶 먼 곳으로 향하고
포도 넝쿨의 시간이 먼 곳으로 빛날 때
여름의 텅 빈 들녘 또한 거기에 함께 있고
숲은 그 컴컴한 모습을 나에게 보인다
자연은 시간의 영상을 메꾸어 채우며
자연은 머물고, 시간은 스쳐 간다
완성으로부터 천국의 드높음은 인간에게 빛나니
마치 나무들 꽃으로 치장함과 같구나
1748년 충성심을 다하여, 소생
5월24일 스카르다넬리
쪻 1843년 6월초에 쓴 횔덜린 마지막 작품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나는 그대들 곁에서 배워 이성적이 되어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과를 구별하는 법을 철저히 배웠다. 그 결과는 내가 지금 이 아름다운 세계 속에서 고립되어 내가 건전히 자란 자연 속에서 지금처럼 밖으로 내던져져 한낮의 태양 아래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아아, 인간은 꿈을 꿀 때는 신이며 생각할 때는 구걸하는 걸인이다. 감격이 없어지면 인간은 부친에게서 쫓겨난 탕아와 다름이 없어 부친이 던져주는 몇 푼의 동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벨라르민으로부터 히페리온에게
내가 아직 목화꽃 냄새 은은한 강보에 싸여 있을 때 나와 외계의 어떤 생명과를 이어주던 유일한 끈 배꼽이 이제 씨앗처럼 단단해져 몸 깊숙이 내 생명의 중심으로 가라앉아 갈 때 한 여자가 내게로 머리를 기울여 자랑과 근심에 찬 눈으로 들여다보며 말하였다. “내가 누군가 불러보아라.” 여자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 내 입술로 스며들었다. 이른 새벽 들판으로 나선 이만이 조금 맛볼 수 있는 하늘의 과일. 나는 그 신성을 삼켰다. “어머니”, 입술을 달싹여 나는 자연의 그 부름에 응답했다. 생명이 내 속에서 용솟음쳤다.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어느 때 어린아이가 달빛을 잡으려고 손을 뻗치는 것을 보았는데 달은 유유히 자기의 궤도를 달리기만 하였다. 우리들도 그와 같아 한 장소에 있으면서 유전해 가는 운명을 잡아보려고 허덕이는 것이다.
누가 운명의 변화를 성신의 걸음처럼 조용히 바라볼 수 있겠는가.
벨라르민으로부터 히페리온에게
막 봉오리 맺기 시작하는 제비꽃 위에 흐트러져 있는 갈색 깃털들로서 나는 그 새가 어린 종달새였던 것을 알았다. 그 새의 가슴뼈 일부가 봉오리 아래 조용히 놓여 있었다. 새는 저쪽 세상의 무엇이 그리도 알고 싶어 몸달아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들여다보아야 할 제 내면의 것이 그리도 많았던 것일까. 올망졸망한 제비꽃들을 보며 이곳은 새의 심장이 놓여 있던 자리, 저곳은 반짝이는 검은 눈이 놓여 있던 자리…… 가늠해 본다. 언뜻 아직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초가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다른 생명에게로 뛰어들 듯 성급히 촛농으로 뛰어들어 꺼져가던 심지를 생각하였다. 메아리처럼 되받아 울리던 친구 아라미스가 떠났다는 편지 받았다.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그것은 예감이 들 때는 달 그림자같이 몰래 나의 부드러워진 이마 위를 스쳐갔다. 그리고 나는 얼마나 행복한 기분으로 그것에 매달렸던가. 나는 그때부터 이미 당신을 알고 있었다. 이미 그때부터 당신은 수호신과 같이 구름 사이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답고 평화스런 모습으로,
이 세상의 탁한 물결 속에서 나의 앞뒤로 나타나는 당신이……
벨라르민으로부터 히페리온에게
우리가 함께 읽던 향연의 한 부분, 디오티마가 사랑에 관하여 소크라테스에게 말한 부분들을 다시 한 번 읽어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무심코 올려다본 내 미망 위의 하늘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새로운 별 하나가 돋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나와 같은 푸른빛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어코 만나는 것이다.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그 사랑의 한순간에 비한다면 수천 년에 걸쳐 인간들이 생각한 모든 것은 다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또한 자연에 있어서 가장 성공한 것이며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인생의 한 계단 한 계단은 이 한 순간에 통하고 있다.
우리들은 거기서 와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벨라르민으로부터 히페리온에게
때때로 나는 저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연의 말들을 문자로 기록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나와 자연과 나눈 대화를, 내가 알아들은 자연 고유의 음성을 기호화하여 우리가 학교 들어가 맨 처음 인간의 언어를 배우듯 교과서로 펴내어 배우게 한다면 적어도 자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어떤 통로는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자연의 말은 인간의 말과는 또 달라 언어로 기록할 수 있을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언어로 기록하였을 경우 나는 분명 자연과는 상관없이 내가 바라보았던 시각으로 내가 알아들었던 말로 기록할 것이고 그때 언어가 주는 관념이 자연의 실체를 가려버리는 구실도 할 것이기에, 가령 내가 생명이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말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것에 대한 관념만 줄 수 있을 뿐 결코 생명 그것은 아니듯이.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경건한 영혼이여! 당신이 나의 묘지를 찾아오거든 제발 나를 생각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아마도 나를 넓은 바다 속에다 던져 넣겠지. 나의 시체는 가라앉아 내가 사랑하던 작은 흐름도 큰 흐름도 모두 모여 오리라. 거기서 뇌운이 위로 올라가 내가 사랑하던 산의 골짜기를 축축하게 적시리라.
그러나 우리들은?
벨라르민으로부터 히페리온에게
터어키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희랍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히페리온은 전쟁터에 나갔다. 그 고지쪽을 향해 디오티마는 앉아 있었다. 조용한 눈으로 발치께에서 날아가고 있는 민들레 꽃씨의 행방을 좇고 있었다. 민들레 꽃씨가 다시 또 저 광활한 창공을 날아가 미지의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새 생명을 꽃 피우려는 것을 조금 남은 숨으로 지켜보고 있는 듯하였다. 받아볼 때쯤이면 이미 지상에서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디오티마의 편지를 함께 보낸다.
저는 존재할 것입니다. 제가 무엇이 될런지에 대해서 저는 묻지 않습니다. 존재한다, 산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은 신들의 명예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을 갖는 것은 무엇이든 신들의 세계에서는 서로 대등합니다. 그 세계에서는 주인도 노예도 없습니다. 자연 속에서는 모든 것이 공통입니다.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일체는 기쁨에서 태어나서 평화 속에 끝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자끼리의 언쟁과 같은 것이어서 그 다툼의 한복판에는 이미 화해가 존재한다. 뿔뿔이 헤어진 자들은 또다시 돌다가 만나는 것이다. 혈관은 심장에서 헤어졌다가 또다시 심장으로 돌아가며 일체는 하나이며 영원히 작렬하는 생명이다.
벨라르민으로부터 히페리온에게
이른 새벽 연장통을 걸머지고 산으로 들어가고 있는 젊은 나무꾼 한 사람을 보았다. 산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으로 보아 그가 올라가고 있는 산에 대하여 완전히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함에도 걸어 들어가고 있는 그의 발걸음은 확고하였다.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부드러운 바람이 내 가슴에 불어올 때 나의 전 존재는 소리를 죽이고 귀를 기울인다. 아득한 푸른 하늘에 마음을 빼앗겨 나는 하늘을 우러러보거나 혹은 성스러운 바다에 눈을 돌린다. 그러면 내게는 가까운 신령이 두 팔을 벌려 나를 포옹해 주는 것 같다. 고독의 슬픔이 신성에 넘친 생 속에 녹아들어 가듯 전체로서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신성에 충실한 생이며 인간 최고의 경지이다. 살아 있는 것은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것.
벨라르민으로부터 히페리온에게
그러나 친구여! 우리는 너무 늦게 왔다. 신들은 살아 있지만
우리의 머리 위 딴 세상에서 그들은 살고 있다.
거기서 그들 무한히 역사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지 거의
거들떠보지 않는 것같고 그렇게 천국적인 것들 우리를 아낀다.
왜냐하면 연약한 그릇 항시 그들을 담을 수 없고
인간도 다만 때때로만 신경의 충만을 견디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생은 그들에 대한 꿈이다. 그러나 방황도 졸음처럼
도움을 주며 궁핍과 밤도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빵과 포도주에서
쪻 히페리온이 벨라르민에게 보낸 부분들은 소설에서 옮겨온 것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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