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문학

<죽지 않는 인간> / 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자크라캉 2006. 7. 10. 11:47
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죽지 않는 인간』
사유, 그 불사자들의 도시

류수안


초록의 기와 지붕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온다. 잠시 베란다 난간을 잡고 서성이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서 사라진다. 한떼의 젊은 남녀가 그 지붕으로 몰려와 슬며시 그곳을 통과해 지나간다. 지나가는 젊은 남녀의 웃고 떠드는 소리, 캔 음료수 마시는 소리가 들려온다. 자세히 바라보려 의자를 당겨 앉는다. 유리창에 골똘히 무언가를 들여다 보고 있던 나의 눈과 마주친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강이요(최후의 태양, 최초의 태양 아래)
건물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와 지구의 역사보다 앞선 것임을 느꼈다
그것은 호랑이 또는 황소로 된 몸체라는 이질적 말의 요소이다
하나의 가늘고 선명한 미로를 따라 견딜 수 없이 꿈을 꾸고 있었다
그 어느 것도 전체 생을 결정짓지 못한다
원작을 모방하거나 원작의 뒷면과 같은 그 도시와

어머니는 대접의 물을 한가득 입에 품어 새하얗게 풀먹인 이불 호청위에 뿌리신다. 나는 그 한 끝을 잡고 있다. 이불 호청을 잡아당긴다.
팽팽한 이불 호청 한 귀퉁이 찢어진다. 찢어진 틈새로 언뜻 솜털에 쌓인 어린 복숭아 하나가 보인다. 놀란 과일, 어머니가 이불 호청을 휘말아 가신다. 한 세계가 사라진다. 나는 호청 아래 놓여 있던 나의 맨발을 바라본다.

1899년 8월 24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출생 ?년 사망
: 숫자로 기록된 그의 생 몰 연대이다
위대한 사상가, 시인, 아르헨티나국립 도서관 관장. 1938년도부터 시력 감퇴되기 시작, 실명. 작품, 그의 철학적 번민의 소산이다
: 기록으로 남은 그의 행적들이다

책을 펼치면 돌연 흰 여백의 한 켠에 무릎 위에 책을 펼쳐 놓고 앉아 있는 어린아이가 나타난다. 아이는 웃고 있다. 잘 생긴 사춘기의 소년이 건장한 청년기의 사내가 대낮의 거리를 걸어간다. 이윽고 지팡이를 든 채 한 지점에 멈춰선다. 어린아이 옆에 나는 한 얼굴을 놓아 본다. 대머리 벗겨지고 이미 아무것도 바라보지 못하는 한 노인의 얼굴. 그러나 시간에 의하여 마모되지 않은 더욱더 깊은 눈빛으로 내면을 들여다 보고 있는 한 인간, 같은 사람일까? 이들 모두가 보르헤스일까? 증명할 수 있을까?
어린 날 우리는 옛날에, 옛날에로 시작하는 옛날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다 그때의 옛날, 옛날은 백 년 혹은 천년 전 일정한 어느 때의 시간이 아닌 無시간이었다. 얘기를 듣고 있는 순간은 누구도 그 얘기 속의 상황이 실재하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고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하여 깜짝깜짝 놀라고 긴장하곤 한다.
몇년 전 보르헤스를 만났다. 그 때 처음 읽은 것이 『죽지 않는 인간』이었다.
책 속에서 만난 혈거인들, 갠지스 강 건너편에 있다는 그들의 도시도 내게는 엄연히 존재하는 한 세계였다. 한 사람이 일평생을 살면서 볼 수 있는 것은 과연 얼마만큼이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될 지, 눈으로 보지 못하였다고 하여 없는 것은 아니다. 회색 피부와 텁수룩한 턱수염을 한 혈거인들이 지구와 인간의 역사 이전에 그들의 문화와 문명을 단단한 돌 위에 세워 놓고, 지금은 그것을 세워 놓았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사유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다는 곳. 눈부신 원형 아아치들과 미로의 방들, 성벽들, 나는 그 곳에 가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 지점은 어느 쯤일까. 지구 위의 어느 지점, 아니면 빠르게 돌아가는 지구의에서 내 손이 떨어져 나간 공간의 어느 지점 아니면 별자리 속의 어느 지점일까.
결국 찾지 못하고 다시 한 번 『죽지 않는 인간』을 읽는다.
나는 지금 그 때 내가 가 보고자 했던 그 도시가 실제의 어느 곳일수도 있고 그것을 빌어 다른 곳을 말하는 상징의 도시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죽지 않는 인간』에서 ‘나’라고 하는 화자는 1929년 현재 포우프의 일리아드 여섯 권을 루신지 공주에게 헌증한 고고학자로서, 그는 전생에 제우스로 하여금 그가 에스 미르나에서 돌아오다 바다에서 죽어 이오스 섬에 매장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한 사람이다. 한때는 그리스 군단의 호민관 플라미니오 루포였으며 애급 전쟁 참전 후 허탈감으로 불사자들이 산다는 도시를 찾아 나선 사람이기도 하다. 황막한 사막에서 어느 날 가위 눌림에서 깨어나면서 그는 자신이 그렇게도 찾아다니던 불사자들의 도시에 두 손 묶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묶인 줄을 돌에 비벼 잘라낸 후 그는 더러운 웅덩이를 내려가 지하의 어두운 혼돈을 지나 그 성벽으로 들어간다. 그 곳의 방은 모두 미로로 되어 있고 문은 실처럼 녹아 흐르기도 하고 계단은 어느 탑의 중간에서 갑자기 사라지기도 한다.
그 곳에서 백 년을 산 후 지상 위로 올라오는데 이 때 그를 따라온 혈거인이 율리시스의 개 아르고스였다는 말을 한다. 그러면 그 도시가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시간: 나는 고고학자이며 호민관이었고 점성술사였다. 나는 모든 시간 안에 있었다.
: 내가 쓰고 있는 시간은 나의 경험과는 상관없는 항성의 운동에 의 한 시간이다.
: 같은 한 시간이 어느 때는 짧고 어느 때는 무한정 길어지기도 한 다. 이 때 그것의 길고 짧음은 무엇으로 측정할까.
오딧세이: 인류의 전 삶에 참여했다.
무한한 시간을 가정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한 번도 그것을 써 내지 않는 일이다.
나: 나의 전 삶 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율리시스처럼 (非人)이다 . 그러므로 나는 죽을 것이다.

아이의 사진 옆에 실명하여 초점이 맞지 않는 듯한 사진 한 장을 놓는다. 아무리 가까이 놓아도 사이에는 여백이 남아 있다. 여백 속엔 내가 찾아내지 못한 수많은 상징이 남아 있을 것이다. 지상의 사물은 하늘에 있는 사물의 상징이라고 말했던 보르헤스.
펠리칸이라는 새는 제 어미 몸 속에 주둥이를 처박고 어미 몸 안의 것을 꺼내 먹고 자란다 하여, 놈의 부리에는 어느 만큼은 제 어미의 피나 살점이 묻어 있기 마련이다. 유월이면 야트막한 산 아래 무덤 위엔 산딸기 덩굴이 이울어져 새빨간 열매를 맺는다. 크고 작은 가시가 무수히 돋아 있는 덩굴을 잡아당겨 보면 수많은 잔 뿌리들이 줄기에서 뻗어 나와 무덤 속으로 뿌리 내리고 있다. 뻗어 내린 뿌리 중 어느 뿌리는 무덤 주인의 두개골에 닿아 있을 것이고, 어느 뿌리는 깨끗한 가슴뼈 어느 곳을 휘감고 있기도 할 것이다.
어느 해는 보이지 않아 이제 사라졌나 싶으면 다시 때가 돌아왔는지 새 잎이 돋고 덩굴이 뻗고 더욱 붉은 열매를 맺는다. 펠리칸의 주둥이, 어디에고 무덤이 있는 한 산딸기는 그 무덤 위에서 자라 열매 맺으리라.
다시 한 번 나란히 놓인 사진을 보면서 ‘눈에 보이는 유형의 인간은 하나의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에 의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 인간을 연구하여야 한다’고 했던 떼에느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 92년 『세계의 문학』 등단. 시집 『붉은 수수』. 시의 나라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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