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리아노 이수엘라/이수엘라/마시아스, 천민들의 혁명]
멕시코 작가 마리아노 이수엘라의 소설 『천민들』은 '멕시코
혁명소설'이라는 부제가 붙을 정도로 없는 자들에 의하여 일어난 혁명의 진솔성과 비진솔성을 낱낱이 묘사하고 있다. 혁명 소설의 걸작이라고 불리우는
『천민들』은 혁명의 열기에 휩싸여 이곳 저곳으로 피난다니던 아수엘라가 1916년에 출간한 책이다. 1873년 1월 1일, 멕시코 할리스꼬
지방의 라고스 데 모레노에서 태어난 아수엘라는 구아달라하라에서 1893년부터 1898년까지 의학공부를 한다. 마침내 고향인 라고스에서 의사로
일하게 되는데, 그는 정치에도 관심이 많아 191년에는 시청 정치부장 자리를 얻는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그 자리에서 사임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추종하는 마데로당을 꺾으려는 음모가 있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1914년 말부터 1915년까지 그는 할리스꼬 교육극장을 지낸다.
까란사파들이 구아달라하라를 점령하자 아수엘라는 비야파들과 함께 이곳 저곳으로 피난 다니는 신세가 된다. 혁명 당원 중에서 그는 유일한 의사로
싸움터의 부상자들을 치료하였는데, 그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천민들』의 초고가 완성된다. 아수엘라는 1910년부터 1917년에 이르는
기나긴 멕시코 혁명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을 산 사람이다. 그 스스로도 마데로당을 위해 한편에 가담하여 싸웠고 이데올로기 투쟁의 실상과
허상, 그 위대성과 비극성을 뼈 속 깊이 체험한 소설가였다. 가난한 천민들 사이에서 더 잘 살고 옳은 사회를 건설하고자 일어선 수많은 전사들,
모두가 하나같이 무지몽매하고 영웅심에 찬 그들은 사실 자신들이 무엇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불길이었다. 아수엘라의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멕시코 혁명사의 단편이며 이데올로기 소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반이데올로기적인 데가 있다. 주인공인 데메뜨리오 마시아스는
사까떼까스에 있는 조그만 산골 마을의 무식한 농부였다. 파종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모야우야마을의 족장이 그를 연방군에 고발한다. 이야기인 즉
데메뜨리오가 마데로혁명당원이라는 고자질이었다. 그는 혁명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고자질을 당해 우선 죽게 되었으니 도망가는 게
상책이었다. 그는 동료 몇 명과 더불어 산속에 숨어 혁명당원이 된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족장이 자기들을 못 죽여서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과 연방군에 잡히면 죽는다는 것 뿐이었다. 마시아스의 무식성과 용맹성은 싸움에서 많은 전과를 이루는 데 성공하게 했다. 그는 혁명
대장으로 백여명의 부하 위에 군림하게 되고 기분나는 대로 대령에서 장군까지 자신을 승진시킨다. 마시아스의 가장 유식한 척하는 부하로 세르반떼스가
있다. 그는 의과대학생이면서 신문기자였다. 그도 혁명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쫓기는 몸이었다. 그러다 잡혀 감옥에 갔다 온 그는 마침내
마시아스의 부대에 가담한다. 유식하며 기회주의자인 당시의 지식인 층을 상징하는 세르반떼스의 모습은 마시아스 앞에 나약하고 비굴하기만
하다. 세르반떼스는 마시아스에게 그가 위대한 혁명 영웅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이미 알려진 위대한 혁명가들 비야, 까란사, 나떼라 장군들과
합류하여 보다 큰 대의명분을 걸고 싸우자고 한다. 억눌리고 굶주린 자들을 풀어주고 올바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일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세르반떼스의 말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여하튼 그 유명한 사람들과 합한다는 데는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데메뜨리오는 그렇게 하면 자신이 위대한
장군이 되고 출세할 수가 있으리라 막연히 믿었을뿐이다. 마시아스는 나떼라 장군 진영의 대령이 되었고, 비야 장군 진영에서는 사까떼까스
전투의 전공을 인정받아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그들의 하는 일이란 한마디로 싸우고 노략질하고 마시고 노래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아는 것은 '연방군
개새끼들'이라는 말과 싸우고 죽이는 것과 전리품 사냥, 그리고 마음에 드는 술과 계집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의 한결같은 꿈은 하루빨리 좋은
시절이 와 처자식이 있는 고향 마을에 편안히 돌아가 사는 것이었다. 그중에 유일한 지성이라는 세르반떼스는 이데올로기 투쟁으로서의 혁명 운동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설파한다. 그는 마시아스가 나떼라 장군과 합류해서 출세해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이런 말을
한다.
혁명은 틀림없이 승리합니다. 여기 이 몇 명의 부하들만 가지고는 결국 아무것도 아닌 군소당의 두목밖에 더 됩니까. 혁명이
성공하고 싸움이 끝이 나면 자신의 혁명을 도아준 자들에게 마데로 장군이 한 것처럼, "여러 동지들, 대단히 고맙습니다. 이젠 각자 집에 돌아가도
좋소…" 한마디로 끝장나는 거지요. 연설이야 멋지지요. "여러분, 여러분이 바로 나를 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까지 추대하여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자식과 아내를 고아나 과부로 만들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분의 목을 바쳐 나를 도와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다시 집에 돌아가 곡괭이와 삽을 들고 옛날처럼 못먹고 못입던 생활로 되돌아갈 것이며, 여러분이 그러는 동안 우리 높은 사람들은 수억을
챙기기에 또다시 피땀을 쏟을 것입니다." 보세요. 데메뜨리오. 이것이 혁명입니다.
루이스 세르반떼스의 반이데올로기적 기회주의는
이렇게 정당성을 회복한다.
내가 말한 것처럼 혁명이 끝나면 모든 게 끝장입니다. 그 많은 피, 그 많은 고아, 그 많은 과부,
그렇게 많이 죽어 간 목숨들만 불쌍하지요. 다 무슨 소용입니까. 이 모두가 몇놈의 도둑놈들 떼돈 벌게 하고, 우리 모두는 종전과 똑같거나 더
못한 삶을 위한 희생양이란 말입니까? 당신은 사심이 없습니다. 당신 말은 "나의 야심이란 내 집, 내 고향에 돌아가는 것 뿐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당신 자식들과 당신 아내에게 하느님이 준 행운을 안겨 주지 않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과
조국입니다.
세르반떼스의 말은 멕시코 혁명의 비극성을 대변한다. 가난과 불의를 까부수기 위해 일어선 혁명군이 혁명의 성공 뒤에는
또다시 노예의 생활로 되돌아가야 한다면 그 많은 피, 그 많은 희생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또다시 새로운 높은 놈들이 생겨나고 또다시
억압하고 수탈하는 신종 도둑을 만들기 위하여? 이것이 혁명의 역설이며 비극성이었다. 그래서 혁명군이나 도둑떼들은 혁명이라는 명목으로 수탈하고
노략질하고 금은 보석을 주머니에 넣는 걸 게을리하지 않는다. 혁명 과정 자체가 정말로 누가 누구를 위하여 왜 싸우는지 알 수 없는
아수라장이다. 먹고 마시고 죽이기가 축제의 나날 같았던 마시아스 장군의 시절도 까란사와 비야의 반목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비야는 셀리야에서
패배한다. 그때부터 데메뜨리오 마시아스와 그의 부하들은 패주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들이 마지막 거점으로 삼은 곳은 데메뜨리오가 2년 전
연방군을 몰살시킨 계곡이다. 마시아스는 잠깐 고향집에 들르지만 그의 아내와 자식의 말처럼 이미 고향에 머물 수 없는 운명이었다. "혁명은
아름다운 거야"라고 그는 말한다. 사나이의 용기와 무지한 생명력이 용솟음치는 곳이 전쟁터이니까. 그러나 그에게도 그 아름다움의 운명적 끝남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이 계곡의 마지막 전투에서 부하를 다 잃는다. 매미 소리가 계곡이 떠나갈 듯 울어댄다. 온산이 잔칫날처럼 호화찬란하다.
그 어느 바위 틈바귀에서, 오래 된 성당 입구같이 커다랗고 으리으리한 바위 틈바귀 밑에서 데메뜨리오 마시아스는 영원히 응고된 눈빛을 한 채 계속
총을 겨누고 있다…. 이 소설은 혁명의 무용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거나 그 위대성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니다. 멕시코인들의 혁명시
애환, 그들의 푸성귀에 가까운 애국심, 정의감, 살아야겠기에 선한 짐승들처럼 전쟁터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인간실존의 어떤 면면들이 가장
절절하게 묘사되고 있다. 혁명이라는 미명하에 모인 허상의 무리들, 그러나 그 비극 속에 몸을 던져야 했던 멕시코의 저항 운동은 오늘날처럼 혼돈과
기회주의가 팽배한 풍토에 또 하나의 생각의 지표를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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