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도·힌두설화/마야 샤크티의 신비와 물]
[이야기1]
몇몇의 성자들이 숲속에 사는 덕망 높은 으낮 비야사에게 인생의 꿈과 요지경을 연출하는 마야의 비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그는 대답했다. '마야의 비법은 우주 만물을 낳으신 비쉬누 신 말고 누가 알겠습니까. 그것은 모를 일이지요. 다만 나는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마야의 요지경에 대한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지요' 이렇게 해서 마야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것은 부모가 결혼을 시키려고 하는 카마다마나라고 하는 젊은 왕자의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는 인생을 수천번 경험했다고 말한다. 때로는 풀, 때로는 나무, 때로는 사자, 때로는 여자, 때로는 악마…, 그리고 마침내는 수타파스라는 고행자로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때 그는 비쉬누 신을 만난다. 비쉬누 신에게 마야의 신비를 묻는다. 비쉬누의 대답은 또다시 그와 똑같은 궁금증을 가졌던 나라다의 이야기이다. 나라다의 이야기는 이렇다.
나라다가 하도 마야의 비밀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기에 비쉬누신은 그 사람더러 '그럼 당장 저 물로 풍덩 빠지거라' 말했지. 그랬더니 그 친구 겁없이 물로 그냥 뛰어들었어. 그 친구는 이내 한 예쁜 소녀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베나레스 왕의 딸 수실라로 태어난거야. 그리고 장성하자 이내 이웃 나라 바달바 왕에게 시집을 갔지. 그녀는 왕비가 되어 아들 낳고 딸 낳고 아주 잘 살았었어. 그런데 마침내 자기 남편과 그 아버지 사이에 반목이 생긴거야. 이내 반목은 전쟁으로 번지고 단 한 번의 전투에 그녀는 자식이며 남편, 아버지까지 모두 잃게 되었지. 이 무서운 소식에 접한 그녀는 어찌 할 바를 몰랐어. 그녀는 커다란 장작더미 위에 그 온 시신들을 누이고 이내 불을 붙였지. 화염이 가라앉자 불구덩이는 연못으로 변했어. 그리고 거기 한 가운데 수실라 자신이 서 있는 거야. 수실라는 곧 나라다로 변했어. 그래서 나는 나라다를 연못에서 끌어냈지. 그리고 바로 지금까지 경험한 것이 마야의 신비라고 이야기했지. 자식과 남편을 모두 잃었을 때의 그 아픔과 저주, 그것이 마야의 맛이며 그전의 지극한 행복 또한 마야의 모습이라고, 또한 그 신비를 어찌 내가 너에게 다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4세기 경 「마사야 푸라나」설화집 중에서
[이야기2]
마야의 신비를 알고 싶어하는 나라다는 비쉬누 신과 함께 황량한 사막을 거닐고 있었다. 그 때 비쉬누 신은 목이 마르다고 물을 구해오라 한다. 나라다가 어느 작은 초가집에 물을 얻으러 갔을 때 그는 거기서 천상의 여인같은 소녀를 만난다. 소박하고 유순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그녀의 눈길에 수도승은 그만 정신을 팔리고 만다. 그는 곧 그의 가족들을 만나서 결혼 승낙을 받아낸다. 아들 낳고 딸 낳고 남부럽지 않게 살면서 12년이라는 세월이 흐른다. 그러던 어느날 갑작스런 대홍수가 마을을 엄습한다. 한밤중에 집이며 가축이며 온 가족이 물 속에 파묻힌다. 거센 물줄기 속에 등에 업은 자식들을 차례로 잃는다. 마침내 어느 해안가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나라다는 어느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는다.
"얘야, 거 떠 오겠다던 물은 어찌되었느냐? 벌써 반 시간이나 널 기다리고 있는데…"
-『라마크리쉬나 어록』에서
인도 학자 하인리히 짐머(Heinrich Zimmer)는 『인도의 신화와 예술』에서 힌두의 고대 설화 및 신화를 소개한다. 그 중에서 '존재의 물'에 관한 이야기로 마야를 이야기한다. 불교에서 알고 있는 마야는 현상세계의 허상, 변화와 비본질의 세계이다. 그러나 힌두신화에서 마야는 대단히 다양한 생성과 파멸의 세계다. 특히 마야의 역동적 생명력을 대변하는 여신 마야 사크티는 에로스와 닮은 데가 많다.
우리는 에로스와 에덴 동산의 삶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자연스러운 삶, 즉 살고 즐기고 번성하는 모습은 태초에 물이 있었듯이 물흐름의 모습 그 자체라고 보아도 좋을 듯 싶었다. 그런데 인도 신화는 그것을 다시 증명해 준다. 힌두이즘이 『구약성서』보다는 훨씬 오래된 것이어서 오히려 『구약』이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좋다. 예를 들면 '태초에 모든 것은 빛이 없는 바다와 같은 것이었다'(리그베다 X, 1929,3.)등은 『구약성서』의 첫부분과 동일하다. 그러나 그 물을 빛의 원리로, 악과 선으로 구분한 것이 크리스티안이즘의 다른 점이다.
동양인으로 보면 물흐름같은 삶, 때로는 아래로 흐르고 때로는 위로 솟구치고 때로는 홍수가 되어 삶을 집어 삼키는 생명의 원칙은 훨씬 공감이 간다. 힌두이즘에서 물의 화신의 뱀은 에덴 동산의 사악한 뱀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지혜와 은혜의 신이다. 그런 해석으로 보면 에덴 동산의 원죄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뱀이 사는 맛, 그 쓰고 단 맛을 보여주었으니까.
짐머는 이런 삶의 법칙, 환상, 예술, 생명, 나고 죽는 법칙의 신을 앞서 말한 마야 샤크티 여신으로 보고 그를 이브, 혹은 에로스와 같다고 본다. '사과를 먹고서 자기의 남편에게 사과를 먹도록 유혹하고', 그녀 자신이 사과이기도 한 이브는 '영원한 여성상' 즉 마야 샤크티와 같은 모습이라고 역설한다. 이런 뜻에서 나는 짜릿한 이야기를 기대하는 문학 작품 속의 에로스를 어루만지며 짜릿한 맛은 덜하지만 그 맛의 원천인 마야의 신비에 관한 설화를 가져와 보았다.
인도의 설화 속에 가장 오래되고 가장 많이 알려진 동화같은 나라다고행자의 이야기 두 편이다. 모두가 구전으로 전하던 것들이어서 그 연대를 알 수 없으리만큼 오래된 것들이다. 또한 두 번째의 예처럼 19세기 뱅갈의 성자 라마크리쉬나가 전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성자의 시간의 초월성, 직감으로 보는 어느 시대 어느 일을 오늘로 끌어온 것인지 확실히 이야기할 사람은 없다.
먼저 이야기의 전개 방식은 아방가르드 이후 격자 소설, 즉 이야기 속에 또 이야기가 겹치고 겹친 이야기 속에 또 이야기가 겹치는 2중 3중 4중 구조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이다. 그도 그럴것이 이 세상 저 세상을 떠도는 환생의 이야기를 한 주인공의 한 이름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는가. 인도의 에로스의 신 마야 샤크티의 신비는 물흐름과 같은 변화의 요지경이며, 그 조화다.
나라다의 마야 체험은 늘 물에 빠져드는, 물을 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성의 성 속으로 빠져들 듯, 여성의 입술을 빨 듯 여성상의 유혹에 몸을 맡김으로써 인생이라는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나 결말은 항상 그 물 속에, 불 속에, 전쟁 속에 휘말리면서 다시 물로 끝난다. 삶의 굴곡, 태어나는 즐거움, 죽는 아픔이 모두 마야의 조화다. 에로스 또한 즐거움과 풍요의 신이면서 굶주림과 욕망의 신이 아니던가. 뻬니아라는 배고픔의 신과 뽀로스라는 풍요의 신 사이에서 태어난 게 에로스다.
인도의 에로스는 마야 샤크티의 설화가 보여주듯 스스로의 매커니즘 속에 행과 불행의 질곡을 체험하는 순환궤도다. 그 기쁨이고 슬픔이다. 『구약』에서처럼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 죄악시 되는 악의 표본이 아니다. 동양의 철학과 문학에는 물이 흐른다. 그 물속에 잘 눈에 뜨이지않게 에로스가 헤엄치고 있다. 인도의 신성의 상징 뱀처럼, 동양의 지락의 상징인 용처럼.
나라다가 물을 뜨러 갔을 때 그 청순한 시골처녀의 눈길에 빠진 것은 마야의 유혹에 빠진 모습이다. 그 유혹은 너무나 강렬하여 그 많은 고행을 거슬러 최고의 신인 비쉬누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자신의 처지도 잊어버린다. 그토록 금욕을 배워온 그의 눈에 소녀의 모습은 천상의 음악같았다고 본문은 적고 있다. 꼭 '신령의 주인의 눈을 닮은 데가 있었다'고. 그리하여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물의 법계에 몸을 던지게 된 것이다.
후에 나타나는 석가나 불교의 원리로 보면 나라다는 허상의 골짜기에 떨어진 장면이다. 그러나 힌두의 설화에는 그런 도덕론이 없다. 그저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힌두의 설화는 쟈이나교나 라마교, 탄트리즘 등등에 의하여 수천 가지로 다시 해석되고 또 다르게 해석되어도 좋은 열린 이야기요 인생들이다. 서구의 에로스가 보다 인간 쪽에 기울어져 있어 「아가」에서 보았던 것처럼 살냄새에 젖어 있다면 인도의 에로티즘은 인생 자체가 물과 젖과 피 속에 꿈틀거리고 있다. 밖으로 별다르게 끌어낼 만한 자극적인 표현은 없어도 여기 모든 이야기는 물 속에 빠져 즐기고 허우적대는 모든 벌거숭이 삶들의 행진이다.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지은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움을 알았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이파리로 부끄러운 데를 가렸다고 한다. 이것이 옷의 출발이고 문화의 시작이다. 그러나 인도의 설화에는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도 옷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다만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에서 물이 그리웠다고 나와 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도 물 속에서도 옷은 필요없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옷이나 문화가 반드시 자연이나 에로스의 반명제로 나타나지 않는다. 인도의 신화는 달을 오히려 서늘함과 물과 행복을 선사하는 신으로 섬기지 않는가.
[이야기1]
몇몇의 성자들이 숲속에 사는 덕망 높은 으낮 비야사에게 인생의 꿈과 요지경을 연출하는 마야의 비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그는 대답했다. '마야의 비법은 우주 만물을 낳으신 비쉬누 신 말고 누가 알겠습니까. 그것은 모를 일이지요. 다만 나는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마야의 요지경에 대한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지요' 이렇게 해서 마야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것은 부모가 결혼을 시키려고 하는 카마다마나라고 하는 젊은 왕자의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는 인생을 수천번 경험했다고 말한다. 때로는 풀, 때로는 나무, 때로는 사자, 때로는 여자, 때로는 악마…, 그리고 마침내는 수타파스라는 고행자로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때 그는 비쉬누 신을 만난다. 비쉬누 신에게 마야의 신비를 묻는다. 비쉬누의 대답은 또다시 그와 똑같은 궁금증을 가졌던 나라다의 이야기이다. 나라다의 이야기는 이렇다.
나라다가 하도 마야의 비밀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기에 비쉬누신은 그 사람더러 '그럼 당장 저 물로 풍덩 빠지거라' 말했지. 그랬더니 그 친구 겁없이 물로 그냥 뛰어들었어. 그 친구는 이내 한 예쁜 소녀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베나레스 왕의 딸 수실라로 태어난거야. 그리고 장성하자 이내 이웃 나라 바달바 왕에게 시집을 갔지. 그녀는 왕비가 되어 아들 낳고 딸 낳고 아주 잘 살았었어. 그런데 마침내 자기 남편과 그 아버지 사이에 반목이 생긴거야. 이내 반목은 전쟁으로 번지고 단 한 번의 전투에 그녀는 자식이며 남편, 아버지까지 모두 잃게 되었지. 이 무서운 소식에 접한 그녀는 어찌 할 바를 몰랐어. 그녀는 커다란 장작더미 위에 그 온 시신들을 누이고 이내 불을 붙였지. 화염이 가라앉자 불구덩이는 연못으로 변했어. 그리고 거기 한 가운데 수실라 자신이 서 있는 거야. 수실라는 곧 나라다로 변했어. 그래서 나는 나라다를 연못에서 끌어냈지. 그리고 바로 지금까지 경험한 것이 마야의 신비라고 이야기했지. 자식과 남편을 모두 잃었을 때의 그 아픔과 저주, 그것이 마야의 맛이며 그전의 지극한 행복 또한 마야의 모습이라고, 또한 그 신비를 어찌 내가 너에게 다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4세기 경 「마사야 푸라나」설화집 중에서
[이야기2]
마야의 신비를 알고 싶어하는 나라다는 비쉬누 신과 함께 황량한 사막을 거닐고 있었다. 그 때 비쉬누 신은 목이 마르다고 물을 구해오라 한다. 나라다가 어느 작은 초가집에 물을 얻으러 갔을 때 그는 거기서 천상의 여인같은 소녀를 만난다. 소박하고 유순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그녀의 눈길에 수도승은 그만 정신을 팔리고 만다. 그는 곧 그의 가족들을 만나서 결혼 승낙을 받아낸다. 아들 낳고 딸 낳고 남부럽지 않게 살면서 12년이라는 세월이 흐른다. 그러던 어느날 갑작스런 대홍수가 마을을 엄습한다. 한밤중에 집이며 가축이며 온 가족이 물 속에 파묻힌다. 거센 물줄기 속에 등에 업은 자식들을 차례로 잃는다. 마침내 어느 해안가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나라다는 어느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는다.
"얘야, 거 떠 오겠다던 물은 어찌되었느냐? 벌써 반 시간이나 널 기다리고 있는데…"
-『라마크리쉬나 어록』에서
인도 학자 하인리히 짐머(Heinrich Zimmer)는 『인도의 신화와 예술』에서 힌두의 고대 설화 및 신화를 소개한다. 그 중에서 '존재의 물'에 관한 이야기로 마야를 이야기한다. 불교에서 알고 있는 마야는 현상세계의 허상, 변화와 비본질의 세계이다. 그러나 힌두신화에서 마야는 대단히 다양한 생성과 파멸의 세계다. 특히 마야의 역동적 생명력을 대변하는 여신 마야 사크티는 에로스와 닮은 데가 많다.
우리는 에로스와 에덴 동산의 삶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자연스러운 삶, 즉 살고 즐기고 번성하는 모습은 태초에 물이 있었듯이 물흐름의 모습 그 자체라고 보아도 좋을 듯 싶었다. 그런데 인도 신화는 그것을 다시 증명해 준다. 힌두이즘이 『구약성서』보다는 훨씬 오래된 것이어서 오히려 『구약』이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좋다. 예를 들면 '태초에 모든 것은 빛이 없는 바다와 같은 것이었다'(리그베다 X, 1929,3.)등은 『구약성서』의 첫부분과 동일하다. 그러나 그 물을 빛의 원리로, 악과 선으로 구분한 것이 크리스티안이즘의 다른 점이다.
동양인으로 보면 물흐름같은 삶, 때로는 아래로 흐르고 때로는 위로 솟구치고 때로는 홍수가 되어 삶을 집어 삼키는 생명의 원칙은 훨씬 공감이 간다. 힌두이즘에서 물의 화신의 뱀은 에덴 동산의 사악한 뱀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지혜와 은혜의 신이다. 그런 해석으로 보면 에덴 동산의 원죄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뱀이 사는 맛, 그 쓰고 단 맛을 보여주었으니까.
짐머는 이런 삶의 법칙, 환상, 예술, 생명, 나고 죽는 법칙의 신을 앞서 말한 마야 샤크티 여신으로 보고 그를 이브, 혹은 에로스와 같다고 본다. '사과를 먹고서 자기의 남편에게 사과를 먹도록 유혹하고', 그녀 자신이 사과이기도 한 이브는 '영원한 여성상' 즉 마야 샤크티와 같은 모습이라고 역설한다. 이런 뜻에서 나는 짜릿한 이야기를 기대하는 문학 작품 속의 에로스를 어루만지며 짜릿한 맛은 덜하지만 그 맛의 원천인 마야의 신비에 관한 설화를 가져와 보았다.
인도의 설화 속에 가장 오래되고 가장 많이 알려진 동화같은 나라다고행자의 이야기 두 편이다. 모두가 구전으로 전하던 것들이어서 그 연대를 알 수 없으리만큼 오래된 것들이다. 또한 두 번째의 예처럼 19세기 뱅갈의 성자 라마크리쉬나가 전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성자의 시간의 초월성, 직감으로 보는 어느 시대 어느 일을 오늘로 끌어온 것인지 확실히 이야기할 사람은 없다.
먼저 이야기의 전개 방식은 아방가르드 이후 격자 소설, 즉 이야기 속에 또 이야기가 겹치고 겹친 이야기 속에 또 이야기가 겹치는 2중 3중 4중 구조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이다. 그도 그럴것이 이 세상 저 세상을 떠도는 환생의 이야기를 한 주인공의 한 이름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는가. 인도의 에로스의 신 마야 샤크티의 신비는 물흐름과 같은 변화의 요지경이며, 그 조화다.
나라다의 마야 체험은 늘 물에 빠져드는, 물을 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성의 성 속으로 빠져들 듯, 여성의 입술을 빨 듯 여성상의 유혹에 몸을 맡김으로써 인생이라는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나 결말은 항상 그 물 속에, 불 속에, 전쟁 속에 휘말리면서 다시 물로 끝난다. 삶의 굴곡, 태어나는 즐거움, 죽는 아픔이 모두 마야의 조화다. 에로스 또한 즐거움과 풍요의 신이면서 굶주림과 욕망의 신이 아니던가. 뻬니아라는 배고픔의 신과 뽀로스라는 풍요의 신 사이에서 태어난 게 에로스다.
인도의 에로스는 마야 샤크티의 설화가 보여주듯 스스로의 매커니즘 속에 행과 불행의 질곡을 체험하는 순환궤도다. 그 기쁨이고 슬픔이다. 『구약』에서처럼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 죄악시 되는 악의 표본이 아니다. 동양의 철학과 문학에는 물이 흐른다. 그 물속에 잘 눈에 뜨이지않게 에로스가 헤엄치고 있다. 인도의 신성의 상징 뱀처럼, 동양의 지락의 상징인 용처럼.
나라다가 물을 뜨러 갔을 때 그 청순한 시골처녀의 눈길에 빠진 것은 마야의 유혹에 빠진 모습이다. 그 유혹은 너무나 강렬하여 그 많은 고행을 거슬러 최고의 신인 비쉬누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자신의 처지도 잊어버린다. 그토록 금욕을 배워온 그의 눈에 소녀의 모습은 천상의 음악같았다고 본문은 적고 있다. 꼭 '신령의 주인의 눈을 닮은 데가 있었다'고. 그리하여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물의 법계에 몸을 던지게 된 것이다.
후에 나타나는 석가나 불교의 원리로 보면 나라다는 허상의 골짜기에 떨어진 장면이다. 그러나 힌두의 설화에는 그런 도덕론이 없다. 그저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힌두의 설화는 쟈이나교나 라마교, 탄트리즘 등등에 의하여 수천 가지로 다시 해석되고 또 다르게 해석되어도 좋은 열린 이야기요 인생들이다. 서구의 에로스가 보다 인간 쪽에 기울어져 있어 「아가」에서 보았던 것처럼 살냄새에 젖어 있다면 인도의 에로티즘은 인생 자체가 물과 젖과 피 속에 꿈틀거리고 있다. 밖으로 별다르게 끌어낼 만한 자극적인 표현은 없어도 여기 모든 이야기는 물 속에 빠져 즐기고 허우적대는 모든 벌거숭이 삶들의 행진이다.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지은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움을 알았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이파리로 부끄러운 데를 가렸다고 한다. 이것이 옷의 출발이고 문화의 시작이다. 그러나 인도의 설화에는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도 옷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다만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에서 물이 그리웠다고 나와 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도 물 속에서도 옷은 필요없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옷이나 문화가 반드시 자연이나 에로스의 반명제로 나타나지 않는다. 인도의 신화는 달을 오히려 서늘함과 물과 행복을 선사하는 신으로 섬기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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