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문학

아벨산체스 / 미겔 데 우나무도

자크라캉 2006. 7. 10. 11:54
미겔 데 우나무도/ 『아벨 산체스』

생의 비극적 의미

류수안


“나는 인간이요. 고로 사람들은 나를 기이하다고 여기지 않을 거요.” 어느 고대 로마의 희극 배우는 말하였다. 그러나 나라면 차라리 이렇게 말하리라. “나는 인간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나는 결코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생의 비극적 의미』의 첫 문장이다. 여기에서 ‘나’라고 말하는 인간은 추상적 인간이 아닌 살과 뼈의 구체적 인간이다. 모든 철학의 주어인 동시에 목적인 인간, 지옥보다 무서운 無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이다. 이 무서운 無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살과 뼈의 인간은 영혼의 불멸을 필요로 한다. 개인 의식의 무한한 지속을 갈망한다. 이것에 대한 믿음없이는 생존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내 영혼은 생명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혹은, 나를 어쩔 수 없는 고뇌에 빠지게 하며 의문을 갖게 한다.

카인 : 나의 불멸을 좋든 나쁘든 간에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
루시터 : 내가 오기 전에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카인 : 어떻게 해서?
루시터 : 괴로워하면서 말일세
―바이런의 「카인」 중에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죽고 싶지 않은, 우주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위하여 그 전부가 필요한 살과 뼈의 인간은 이 무에서 벗어나려고왜? 라고 질문한다. 그 대답을 듣고자 한다. 끊임없이 불멸로의 비약을 시도한다. 시도하고 있는 인간의 질문 ‘왜?’에 대한 대답을 우나무노는 고대 로마의 속담에서부터 근대 철학자·시인·소설가의 작품들을 인용해 가면서 『생의 비극적 의미』에 내놓고 있다. 결국 이 ‘왜?’라는 질문은 다름아닌 신에 대한 질문이었다는 전제 아래 신은 곧 萬有義識, 우주의식이라고 정의한다. 무한하면서 영원한 의식, 살과 뼈의 인간처럼 고뇌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자기 존재와 같은 신인 것이다.

사랑이 신을 만든다쭭사랑은 형성하고 있는 전체를 인격화시킨다쭭이때 사물은 영원 무궁하게 된다쭭이것을 신이 만든다.

이렇게 우나무노는 의문에 대한 답을 얻어가는 과정을 참으로 명쾌하게 제시한다. 예컨대 유물론에 대한 정의를 보자.

나의 살 찢겨져 나갈 것을 생각하면 나의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한다. 진리란 무엇이뇨? 빌라도 묻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뒤돌아 손을 씻었다.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에 대하여는 내가 나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무엇을 알거나 무엇을 사유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무엇을 감지할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인간이 아닌가.

11살의 나이에 헤겔, 데카르트를 읽기 시작하여 일찌기 천재로 불리웠던 우나무노가 첫시집을 낸 것은 그의 나이 47살 되던 해였고 그 뒤 『생의 비극적 의미』를 출간하였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전체적으로 아름답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책의 맨 뒷편 우나무노의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이 책의 해설집으로 씌어졌다는 「아벨 산체스」를 알았다

『생의 비극적 의미』를 읽은 사람이라면 ‘번뇌에 관한 어느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아벨 산체스」가 왜 『생의 비극적 의미』의 해설집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는지, 우나무노가 자신의 철학을 어떻게 소설의 형태를 빌어 펼쳐 보였는지를 알게 된다. 그만큼 이 책은 소설보다는 철학서에 가깝다. 철학서에서는 짧게 스쳐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증오와 질시에 대하여 그것이 어떻게 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어떤 고뇌를 짐 지워 주게 되는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는 방법 또한 철학서에서와 마찬가지로 독특하여 이 소설에는 사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시·공간도 없다. 단지 말하는 인간, 고뇌하고 행동하는 인간만이 등장한다. 이 등장 인물의 이름조차도 아벨 산체스(성서의아벨)와 호아킨 모네그로(성서의 카인)이어서, 어쩌면 이들이 한번도 죽지 않은 채 창세기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 이웃에 혹은 나와 혈연으로 이름만 바뀐 채 불멸의 생을 살아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이들 카인과 아벨 두 사람의 삶을 기둥으로 하고 있는 책의 제목은 분명 아벨을 지칭하는 「아벨 산체스」이다. 당연히 그가 주인공일 것이라고 생각하게하는 제목이다. 제목대로 아벨이 이 책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그 주인공을 우나무노는 이 소설의 화자이며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카인의 의식 속에 넣어 두었다. 카인의 의식을 통하여만이 말하고 행동하도록 하였다. 고뇌하는, 행동하는 격렬한 카인의 의식 속에 어찌 보면 성공한 화가에 불과한 아벨을, 카인에 비하여 미미한 존재로도 보일 수 있는 아벨을 생생히 살려놓고 있다. 인류 최초의 농업 창시자인 카인의 삶에 아벨이 어떤 독을 뿌렸으며, 이렇다할 행동도 하지 않고, 특별히 카인에게 나쁘게 하지 않으면서도 카인으로 하여금 “나를 죽인 건 아벨이다” 라고 절규하게 하는 지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제대로 살만 붙이면 한없이 길어질 수도 있는 3대에 걸친 이야기를 우나무노는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살은 내버린 채 뼈만을 드러내 보여준다. 하여 책을 읽어가다 보면 긴 장편의 중요 줄거리를 읽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이다. 그러나 압축된 줄거리는 또 그것대로 깊은 울림을 갖고있어, 읽는이로 하여금 어쩌면 생략되어 버렸을지도 모를 더 많은 것에 대한 무한한 상상의 공간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

나는 왜 증오들로 가득찬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내가 어렸을 때 신이 내게 주었던 모습을 다시 신에게 되돌려 드릴 수만 있다면.

나(호아낀 마네그로)는 자라면서 모든 것에서 최고인, 나보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박수 갈채를 독차지하는 아벨에 대하여 어쩔 수 없는 시기심을 갖는다. 이 시기심은 내가 자랄수록 점점 더 나의 내부로 뿌리내려 내가 사랑하는, 결혼을 꿈꾸었던 사촌 여동생이 나를 거부하고 아벨과 결혼하자 증오로 변한다. 이때부터 나는 증오를 영혼 깊숙한 곳에 집어넣고 전력을 다하여 키워나간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이것과 함께 태어났다는것을, 이것이 내 출생 이전에도 있었고 내 생명 이후에도 존재할 것이라고 믿게 된다. 마취제와 자극제를 만들고 싶어 의사가 된 이래 명성을 쌓아가던 나는 나의 수술대 위에서 죽어가는 환자를 아벨이 그림으로 부활시켜놓는 것을 보고 괴로움을 느낀다. 이 괴로움을 안고 아벨의 그림 전시회장을 찾아간 나는 악마와 싸우고 있는 인간의 격정적인 목소리로 아벨의 그림 속 카인, 이 세상에 첫 죽음을 가져온 자, 아벨을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카인의 온갖 비참을 말하면서 울먹인다. 이때 아벨과 나는, 처음으로 서로를 껴안는다. 그러나 그뿐, 아벨에 대한 나의 증오는 이런 내 영혼의 병을 알아차려 나를 구제하려는 여자와 결혼을 하고 딸 하나를 얻고도 치유되지 않는다. 어느 날 나는 아벨에게서 바이런의 「카인」을 얻어와 읽는다. 이 책은 내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왜 카인은 자살하여 자신을 결정짓지 못하였나, 그렇게만 하였다면 인간 역사에 가장 고상한 시초가 되었을 것인데……. 그러나 나는 나의 내부에서 진흙밖에 보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 아벨이 성년의 외아들을 내게 보내와 조수로 써 달라는 부탁을 한다. 나는 증오를 영구화하기 위하여 수녀가 되려는 나의 딸을 설득하여 아벨의 아들과 결혼시킨다. 이들 사이에 아벨과 나의 피를 섞은 사내 아이가 태어난다. 태어난 아이는 어쩐 일인지 아벨만을 따른다. 그렇게 오랜 동안 내 삶을 갉아먹고도 모자라 이제 노년의 유일한 희망인 아이마저 빼앗아가려 하고 있다고 생각한 나는 아벨에게 아이를 돌려달라고 말한다. 이때, 아이가 자기의 피속에 섞인 카인의 피를 두려워한다는 아벨의 말에, 나는 격분하여 손자가 보는 앞에서 아벨의 목을 눌렀으며 평소 협심증을 앓고 있던 아벨은 그것이 원인이 되어 죽는다. 그후 나는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일년 뒤 임종이 가까와진 것을 느끼자 가족들을 불러 모은다. 이 자리에서 나는, 나의 일생은 한낱 꿈이었다, 잠에서 깨어나기 조금 전의 새벽에 꿈과 생시 사이에 우리를 엄습하는 그 악몽들 중의 하나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산 것도 아니고 또한 잠든 것도 아니었다, 나는 벌써 나의 부모를 기억하고 있지 않다, 어쩌면 영원한 망각이야말로 최선의 것이 아닌가, 나를 잊어 달라고 말한다. 증오는 내 영혼의 폐결핵이었다. 아내를 사랑했다면 병은 고칠 수 있었을 것인데, 사랑만 할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나는 강한 희망을 말하면서 지친 숨을 거둔다.

‘나 이후의 나’는 어떻게 될까, 無가 되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러하다면 살과 뼈의 인간 대다수가 그러하듯이 나도 이것에 대한 공포로 발광하게 될 것이다. 이 무에 대한 공포가 신을 만들었다. 삶의 비극적 감정은 인간이 신을 갈구하는 데서 기인한다. 나 이전이 있었다면 분명 나 이후도 있을 것이다. 나 이전의 나가 죽어 있는 자였다면 나 이후의 나도 그러할 것이고, 살아 있는 자였다면 생명 이후의 나 또한 살아 있게 될 것이다.
『생의 비극적 의미』며 「아벨 산체스」의 한 부분들이 도막도막 끊어져 기억속에 떠오른다. 그렇게 저물녘의 길을 가다가 문득 멈추어선다. 그렇다, 이전, 이후의 나가 계속 존재해 있을 것이라면 그들도 지금의 나처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뇌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존재하지 않고서는 나는 나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문득 길옆 젖은 흙 한줌을 움켜쥔다. 어제 내린 비로 흙은 알맞게 젖어 있는 채 검푸른 이끼에 덮여 있다.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무수한 싹들이 그 이끼 틈 사이로 돋아나 있다. 누군가 지나는 말로 인류가 지구에 살게 된 이후로 죽은 이들의 숫자를 세어보았더니 산 사람 하나 누울만한 자리에 일곱 명의 죽은 사람이 있더라는 말을 떠올린다. 놀랍다. 이 한줌 흙에는?
새삼 이리저리 흙을 만져보다 그만 싫증나 나의 체온으로 미지근해진 흙을 무심코 앞으로 내던지고 흙이 가는 방향을 좇아가다 보니 묘하다. 그 흙이 떨어진 곳이 엊그제까지만 해도 장의사집이었는데 오늘은 ‘美’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다. 마침 개업날인지 길옆까지 화환을 늘어 놓았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죽은 이들의 이름과 연락처가 기록된 장부가 놓여 있던 자리에 오늘은 호화로운 유리병에 담긴 ‘미’들이 놓여 있다. 둘러앉아 죽은 이들이 입고 갈 옷이며 관의 가격을 흥정하던 때절은 탁자며 의자도 치워지고, 그 자리엔 장차 아이를 갖게 될 한창의 처녀들이, 혹은 뱃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는 여자들이, 이미 아이 두엇을 둔 여자들이 몰려서서 넋 나간 듯 병 속의 미를 들여다보고 있다. 엊그제만 해도 죽은 이들의 연락처가 놓여 있던 자리에 오늘은 젖과 꿀로 뽀얗게 부풀어 오른 여자들이 아름답게 앉아 있다.
지나쳐가면서 생각한다. 내일은 이곳을 지나치지 않고도 나는 이곳의 풍경들을 환히 기억해 내리라. 그때에도 역시 아름답구나 하고 말하게 되리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