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문학

죄없는 성자들의 바보 아사리아스 /미겔 델 리베스

자크라캉 2006. 7. 10. 11:56
[미겔 델 리베스/죄 없는 성자들의 바보 아사리아스]

우리 어릴 적 시골에 가면 꼭 마을에 팔푼에 가까운 바보가 한 사람씩 있었다.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알지 못할 웃음을 반쯤 씹고 다니는 그런 사람들이 사랑방 식객으로 들앉아 있었다. 따로 세경을 받을 만한 머슴은 못되고, 그저 머슴들이나 아이들의 놀림감이거나 집안 심부름 정도로 밥벌이를 하는 가족 아닌 가족 한 사람, 항상 오양간이나 허청에서 졸고 있다가 누가 부를라치면 한참 뒤에야 어슬렁 어슬렁 기어나오던 누더기의 얼굴, 서반아의 현대 소설가 미겔 델 리베스의 『죄 없는 성자들』에 나오는 아사리아스가 바로 그런 스페인 판 바보 삼용이다.
서반아의 귀족 나라들이 사냥철을 위해 사용하는 산골 별장의 식객들 중에 아사리아스가 있다. 일자무식에 하루 종일 오른쪽 손톱이나 들여다보며 헛새김질로 이나 갈고 돌아다니는 얼병신이 아사리아스다. 그래도 서울서 온 도련님의 차라면 노란 걸레로 윤기가 반짝반짝 나도록 닦아놓는다든지 도련님의 새 사냥을 돕는 일에는 이력이 난 일꾼중의 일꾼이기도 했다. 도련님이 잡아온 비둘기며 꿩의 털을 뽑는 일에서부터 호리새를 길들이는 일까지 모두가 그의 전공이었다. 일이 끝나면 그는 울타리가로 가서 손에 오줌을 누었다. 손에 오줌을 주는 것은 손을 트지 않게 하는 그의 독특한 처방이었다. 오줌을 눈 뒤에 그는 손이 다 마를 때까지 서서 손을 후후 불곤 했다.
아사리아스는 '밀라나'라고 이름지어준 부엉이 하나를 기르고 있었다. 공작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부엉이는 아사리아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도련님이 잡아온 새 중에서 한 마리씩 훔쳐 자기 부엉이에게 가져다 주곤 했다. 어쩌다 하루좀 걸러 새장 앞에 가면 부엉이는 좋아서 그 큰 날개를 퍼덕이며 그를 반겨주곤 했다. 어느날 그 부엉이가 죽자 아사리아스의 슬픔은 극에 달했다. 그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건너 마을 누님집으로 가버렸다.
델 리베스의 이 소설에서 소위 상류층이라고 하는 부류들은 언뜻 보기에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완전히 위선적이고 비인간화 된 족속들이다. 벤츠 차나 몰고 사냥용으로 지프를 사용하는 한량 생활에, 때에 따라 사냥놀이나 파티를 즐기는, 아사리아스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높고 이상한 사람들이다. 종들의 딸이 예쁘장하면 가까이 두고 일을 시키면서 몸을 범하고, 심지어 남편이 있는 도냐 뿌리따까지 납치해서 데리고 놀다 버리는 부도덕한 무리들이다. 도련님의 부도덕성은 도련님 스스로가 자기 하는 짓이 부도덕하다고 의식하지 않는 데 있다. 아래사람들은 쓰레기나 일회용 휴지 정도로 생각하고 쓰다가 버리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아사리아스는 자신의 나이도 모른다. 그저 도련님보다 한 살쯤 많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할 뿐이다. 그러나 도련님이 태어났을 때 그가 이미 총각이었던 것을 보면, 그의 나이는 아마 5, 60은 충분히 되었으리라. 그는 아프면 아무 말도 없이 동산에 한나절쯤 웅크리고 있다가 몸이 나으면 어슬렁 어슬렁 산을 내려오는 그런 짐승이다. 이런 짐승도 나이가 들면 자주 아프고 젊을 때 하던 일들을 제대로 못하기 마련, 그럴라치면 도련님은 다짜고짜 집 밖으로 내쫓는다. 쓸데 없는 족속들을 뭐하러 집에 두고 밥이나 죽이냐는 사고다. 아사리아스의 매형은 도련님에게 사정 사정해서 그래도 평생을 그 집에서 지낸 몸이지 다시 받아달라고 애걸한다.
아사리아스의 행동은 웃사람들의 눈에는 형편없는 바보이지만 나름대로의 순수한 인간미가 넘친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누나의 백치딸년을 업어주고 달래주는 것은 아사리아스 뿐이다. 산에서 잡아온 부엉이가 죽고 심심하던 차에 그는 다리 부러진 까마귀 하나를 발견한다. 다리를 실로 묶어 치료해 주고 정성껏 보살핀다. 그에게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의 이름은 옛부엉이 이름처럼 '밀라나'다. 이 까마귀도 '밀라나'라고 부른다. 도련님 집에 다시 식객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사는 아사리아스에게 유일한 낙은 밀라나를 돌보는 일이다.
세월이 가고 밀라나가 장성한 새가 되자 마당에 나와 날기 연습을 시킨다. 그러던 어느날 그 까마귀는 지붕 위로 날아간다. 새를 놓친 아사리아스의 마음은 서운하지만 새는 원래 날아 다니는 자유로운 존재임을 인정하고 내버려 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까마귀가 아사리아스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아사리아스가 "끼야"하며 까마귀 울음을 흉내내면 그 까마귀는 어느새 그 소리를 알아듣고 아사리아스의 어깨 위로 날아온다.
도련님은 새 사냥광이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새 사냥 밖에 없는 듯하다. 종들이 나무 위에 후리새를 묶어놓고 다른 새들을 부르는 동안 그는 은폐된 움집에 숨어 새가 날아들기를 기다린다. 이렇게 해서 하루에도 수십마리의 산비둘기며 꿩 등 닥치는 대로 잡아온다. 후리새를 잘 묶는 재주는 빠꼬가 제일 나았다. 그러나 빠꼬가 후리새를 묶으러 상수리 나무에 오르다 그만 다리가 삐꺽해서 나무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다리가 부러졌다. 사냥대회를 얼마 앞두고 빠꼬가 다리를 못쓰면 도련님의 사냥대회 꿈은 무산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가 도와주어야 새들을 많이 잡고 친구들 앞에 폼을 잴 텐데 큰일이다. 도련님의 비인간성은 빠꼬의 다리 아픈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자기 사냥을 위해 부러진 다리를 아주 불구로 만들어 놓을만큼 도련님의 이기주의는 무섭다.
어느날인가 종들이 모두 할 일이 있는지라 할 수 없이 늙은 아사리아스를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 그날은 재수가 없어서 새 한 마리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완전히 허탕을 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아사리아스가 "끼아" 하며 자기 까마귀를 불렀다. 까마귀가 어디선지 날아와 아사리아스의 어깨에 와 앉았다. 도련님은 "자네도 조련사가 다 됐어!" 하며 신기해 하더니 다시 날아가는 그 까마귀를 향하여 무심코 방아쇠를 당겼다. 날아가던 아사리아스의 까마귀가 힘없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밀라나, 밀라나, 밀라나…." 아사리아스의 울음 섞인 탄성에 도련님의 비웃음이 얼룩졌다. "고까짓 까마귀 하나 가지고 뭘 그러나… 내 또 한 마리 잡아줄게…"
다음 사냥에서 도련님은 아사리아스의 밧줄에 걸려 죽는다. 후리새를 묶으러 올라가던 아사리아스는 아래 있는 도련님의 목에 밧줄을 던져 서서히 끌어올린다.

그의 입술에서는 바보같은 웃음이 흘러 나왔다. 그러나 아직 이반 도련님은 발을 이상하게 벌벌 떨며 혼자 춤이라도 추듯이 버둥거렸다… 가슴에 턱이 내려오고 눈은 휘둥그레 뜬 모습 그대로였다. 온 몸에 늘어진 팔이 덜렁거렸다. 아사리아스는 위에서 헛입맛을 다시며 바보처럼 하늘을 보고 웃었다.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향해.
델 리베스는 『죄 없는 성자들』에서 문명 비판적 시안을 보여준다. 루소로부터 부각된 '자연인'의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한 것이다. 루소는 말한다. '신은 모든 것을 완전하게 창조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손에서 타락됐다.' 살생을 도락으로 삼은 도련님과, 삶과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보는 아사리아스의 사랑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아사리아스의 눈에는 날마다 수백 마리씩 새를 죽이는 도련님의 죽음은 한 마리 새의 죽음일 뿐이다. 서구 문명은 극도의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살아왔다. 엊그제도 텔레비에 소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물을 먹이는 잔인한 장면을 보았다. 인간의 이기심이 이 정도에 이른다는 것은 그런 잔혹한 행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손이 그렇게 인간을 죽일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더욱 소름이 끼친다.
인간 문명의 차별상은 인간성이 무엇인가를 잊게 한다. 무식한 자와 유식한 자, 가진 자와 없는 자,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 쓸데없는 사람과 쓸모있는 사람, 쉬운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다. 우리 모두는 관습의 노예들이기 때문이다. 델 리베스의 이런 작품은 대단히 신선한 감동을 심어준다. 오래동안 잊고 살던 우리 스스로의 원시인의 모습을 되생각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