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문학

카인과 아벨 / 미겔 델 우나모노

자크라캉 2006. 7. 10. 14:45
[미겔 델 우나모노/현대판 카인과 아벨]

이론으로부터 미겔 데 우나무노(서반아, 1864-1936)에 이르기까지 구약에 나오는 아벨과 카인의 이야기가 현대적 해석을 거쳐 작품의 테마로 등장한다.
아담과 이브의 원조의 씨앗으로 태어난 카인과 아벨의 형제 살인! 우리 문학에도 이 테마는 『카인의 후예들』이라는 소설에서 보듯 6·25를 통한 동족 상쟁의 뿌리로 이해된 일이 있었다.
미겔 데 우나무노의 소설 『아벨 산체스』(1928)에는 성서의 이름을 딴 아벨과 카인을 연상시키는 이름 호아낀이 등장한다. 우나무노가 아벨과 카인의 이름을 이렇게 서반아 이름으로 대치시킨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그것은 성서의 전형에서 탈피하여 서반아의 현실과 역사속에 내재하는 질투와 증오의 문제를 다루어보고자 함에 있다. 우나무노의 카인의 이름은 호아낀 모네그로이다. 대단히 서반아적인 이름의 주인공은 평생을 아벨에 대한 질투심으로 멍든 인생을 살아간다.
이야기는 이렇다. 한 마을에 형제처럼 친한 아벨과 호아낀이 살았다. 아벨은 늘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호아낀은 공부는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이 둘 사이가 진짜 질투 관계로 피멍이 든 것은 미녀 헬레나를 아벨이 가로챈 뒤부터다. 가로챘다기보다는 헬레나(서반아말로는 엘레나, Helena)가 아벨을 좋아해서 그리 된 것이지만, 사실 호아낀도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잠못 이루는 밤이 많았던 처지였었다.
이 헬레나라는 이름은 희랍의 미의 여신을 염두에 둔 상징적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마침내 아벨과 헬레나는 결혼하게 되고, 호아낀은 아벨을 죽이고 싶도록 미운 나날을 산다. 고민과 고민 끝에 호아낀도 자신의 고뇌를 위안해 줄 배필을 찾아 결혼한다. 아벨은 인기있는 화가가 되고 호아낀은 의사가 된다. 아벨이 한번 앓아 눕자 호아낀의 병원을 찾는다. 그때 호아낀은 아무도 모르게 아벨을 죽이고 싶은 욕망 때문에 고민한다. 그러나 살인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벨도 자식을 갖게 되고 호아낀도 딸을 갖는다. 그 딸과 아들이 연애를 하자 호아낀은 자신의 고뇌와 아벨에 대한 증오의 도피처를 찾아 자식들의 결혼을 성사시킨다. 그러나 호아낀의 아벨에 대한 질투, 손주들의 사랑이 또한 둘 사이의 애증의 도화선이 된다.
이 소설은 우나무노 특유의 비사실적 심층 심리묘사로 일관한다. 마침내 호아낀이 죽으면서 자서전적 고백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사건이나 줄거리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증오나 질투가 의미하는 삶의 구조가 더욱 흥미있다.
우나무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마침내 내가 내의 호아낀 모네그로의 영혼을 통하여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은 하나의 비극적 질투심, 스스로 그 질투나 시기심에서 빠져 나올려고 몸부림치면서도 어찌하지 못하는 미움의 마음, 어떻게 보면 지극히 선량하기까지 한 시기심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우리 민족성 속에는 가장 위선적이고 남 잘못되기만을 기대하는 숨겨진 질투심이 있다. 남 잘되는 것을 못 보는 이런 집단적 질투는 어떤가? 보다 깊고 향기 높은 작품을 그냥 비웃기 위해서 비웃는 청중들의 이 시기심은 어떤가?…

이런 이야기에서 보면 호아낀의 질투는 대단히 인간적인 우나무노적 실존상황의 대표적 성격을 띠고 있다. 우나무노는 『삶의 비극적 감정』에서 이런 비극적 감정의 구도를 설명한다.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어한다. 영원히 살고 싶어한다. 이것이 살아있는 모든 실체의 근본 성향이다. 그런데 거기에 우리의 이성의 목소리가 겹친다. 우리의 이성은 '네가 아무리 버둥거려보아야 너도 죽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도 죽었고 말크라테스도 죽었고 우나무노도 죽었으니 너도 죽을 꺼야… 그래서 우나무노는 산다고 하는 것은, 이 영원히 살고 싶은 생의 욕구의 목소리와 죽음을 예고하는 이성의 목소리 사이의 투쟁을 엮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나무노의 질투 또한 이런 살아있음의 고뇌의 하나다. 그가 '비극적 질투심'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내재하는 보다 잘 살고, 보다 예쁘고 보다 좋은 것을 갖고 싶고, 보다 완전해지고 싶은 이 욕구와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 상황의 충돌, 신이 아니기에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상황이 빚어내는 비극적 생의 맛이 이런 시기, 질투심이다.
우나무노에 의하면 질투는 사람살이 판도의 가장 직접적 감정이다.

질투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일어나지 않는 감정이다…. 이방인을 질투하지는 않는다. 질투는 같은 민족사이, 같은 지방 사이에서 일어난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을 질투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세대를 질투하는 것도 아니고 동시대 사람, 같은 친구를 시기하고 질투한다. 그래서 가장 커다란 질투심은 형제 사이에 있는 것이다.

우나무노에게 있어서 이 질투심은 삶의 구도의 가장 가까운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자기 실현의 몸부림으로 본다. 사람은 가까운 사람고 접촉하며 삶의 맛을 느낀다. 그 맛이 많은 사랑과 미움의 맛이다. 형제처럼 친하기 때문에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위대성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 위대성은 내게 질투심을 불러 일으킨다. 짜식은 운수가 좋아! 한다든지, 승진 축하해! 할 때의 나의 마음은 부러움과 질투로 가득찬다. 한편으로 나의 가까운 사람이기에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도 크다. 스스로의 삶을 깊이 느끼고 산다는 것은 결국 끝없는 질투심과 사랑의 목소리 즉 투쟁을 이어간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나무노는 이 질투심이 인간의 불멸에 대한 욕망의 표현이라고 본다. 보다 완전해지고 싶은 마음, 보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보다 많이 알고 싶은 마음은 그 직접적인 대상을 나와 가까운 삶에 대한 질투에서 얻는다. 우리는 나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며 산다. 나는 죽도록 노력했는데 저 친구는 아무 노력도 안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내가 아니니까 그 친구의 노력은 내가 잘 모른다. 내 눈에 그 친구가 잘되는 것은 항상 잘못된 것 같다. 그래서 비아냥거리고 싶어진다. 세상은 불공정하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친구 편에서 볼 때 또한 나의 이 시시한 삶이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저 친구는 보직도 없고 승진도 안 하는데, 밤낮 뭐가 좋아서 저렇게 희희닥거리고 다니지? 짜식 형편없는 친구야! 하면서도 무언가 그 쓸개빠진 듯한 천연덕스러움이 부러워질 수 있다. 신경질이 나도록 시기가 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은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맛이다. 보다 완전성을 향하여, 보다 행복한 삶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 삶의 구도가 제시하는 조금은 씁쓸하고 조금은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생활의 맛, 이것이 질투심이고 시기심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는 쓸데없는 시기심이나 질투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특히 지극한 회의주의자나 영세주의자인 경우 심하다. 이런 질투심은 썩은 물체처럼 옆에 있는 모든 사람,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악취를 풍긴다. 나만 훌륭하고 나만 알고 나만 재수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런 경우다. 남이 못되기만을 기대하고 이유없이 남을 비아냥거리기나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 질투조차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의 지난 세월에 많았던 이런 벨벨 꼬인 꽈베기같은 삶은 스스로의 몸냄새 때문에 스스로가 죽어가는 인간형이다.
동양은 이런 기독교적 시기나 질투감정을 항상 부정적으로 보아왔다. 여자가 질투를 하면 7거지악에 들었고(그건 물론 편하게 축첩할 수 있던 시기의 남성 위주의 제도였다고 하지만) 모든 감정 표현은 그 자체가 덕이 없음의 표현이었다. 50세면 하늘의 뜻을 알아 분을 알고 자제하며 사는 것이 동양인의 삶에 대한 태도이었다. 그러나 오늘 생활 패턴이 서양화되면서 우리의 삶 또한 다양해지고 경쟁과 투쟁 속에 나날을 엮어가야 되는 나날을 살고 있다. 따라서 시기와 질투는 우리가 날마다 경험해야 되는 삶의 맛이 되었다.
우나무노의 카인에 대한 해석은 대단히 실존주의적이며 긍정적이다. 질투나 시기가 없는 인간은 우나무노의 편에서 보면 인생을 깊이 살고 있지 않은 사람의 삶이다. 우리 모두가 카인처럼 형제를 죽이고 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꿈 속에서는 많은 사람을 죽인다. 이것은 경쟁사회 속에 우리의 생이 지향되는 한 현상이다. 어떤 사람은 잘 살고 어떤 사람은 오래 살고… 그래서 우리는 질투와 시기심을 느낀다. 그것은 내가 특별히 마음씨가 뒤틀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실존의 한계성과 충돌의 냄새다. 삶의 깊은 맛의 냄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