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속 詩

두 사직(社稷)에 대한 비탄 / 이진명

자크라캉 2006. 7. 8. 18:22


                            사진<산접동새>님의 블로그에서

사직(社稷)에 대한 비탄 / 이진명





결혼 10년 내 왕조의 社稷之臣에는 이런 重臣들이 있습니다

쌀바가지 국자 걸레 행주 고무장갑 빗자루 음식가위...


出世 8년 딸아이 왕조의 社稷之臣에는 이런 重臣들이 있습니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인어공주 엄지공주 헬로키티 뮤츠...


면면을 보니 내 중신들이 사정이 좀 딱해 보입니다

도리없지요. 저들 인연이 그러하니 인연따라 든 것일 밖에요

 

딸아이 중신들은 공주과답게

시도때도 없이 내 왕조에 들이닥쳐 시비가 많습니다

일 많은 조정을 막무가내로 어지럽힙니다

일 잘 하는 굽은 내 중신들을 유리구두로 막 칩니다


건국이념이 요행이 理想的이거나 異常的이었대도

왕조의 운명이 천년만년 가는 거 본 적 없고 들은 적 없습니다

星辰이 다른 두 사직이 서로 뒤바뀌었다는 얘기도 모릅니다


모릅니다. 모릅니,

우왓, 얏호! 딸아이가 엄마가 될 땐 완전히 뒤바뀐다! 뒤집어진다!


두 사직의 화해를 권유하는 찬송이 다 들려옵니다그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천년만년 누리과저


좋아요 좋고말고요 허나 社稷爲墟

생이란 왕조에 불이 꺼질 때면 社稷爲墟


빈 들판에 흥망성쇠의 바람이 휘돕니다


토지와 곡물이 말라가는

내 왕조의 사직단 앞을 대면한 어느 날은

딸아이의 남은 사직이 많음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만

일어났던 사직이란 모두 슬픈 인어공주

제 사직의 비밀을 홀로 품고 벙어리, 벙어리로

깜깜한 바닷속 물거품되어 꺼지는 것을


깜깜한 하늘에는 또

슬픈 국자 북두칠성이 박히겠습니다


- 시집 『단 한 사람』(열림원, 2004/2)

 


 

마의 왕조와 딸의 왕조가 있습니다. 엄마가 거느리는 重臣은 "쌀바가지 국자 걸레 행주 고무장갑 빗자루 음식가위" 등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신하들이고, 딸이 거느리는 重臣은 "신데렐라 백설공주 인어공주 엄지공주 헬로키티 뮤츠"입니다. 거의 공주들이네요. 공주를 신하로 거느리니 이건 지체가 높아도 이만저만이 아닌 왕공주님이지요. 지체 높으신 분이 당연히 평범하기 그지없는 왕조를 탄압하는 거야 흔히 볼 수 있는 일, 유리구두로 엄마의 중신들을 막 칩니다. 지배권을 나한테 넘기라는 압력이요 생떼지요. 문제는 그 구두가 유리구두라는 것이고, 발로 '막 찹니다'가 아니라 '막 칩니다,로 그 스윙 폭이 다소 작다는데 있습니다. 유리구두는 금방 깨질 것이고 작은 스윙은 폭력이 아니라 어리광이니까요...

유리구두가 깨질 날은 멀지 않습니다. 딸이 10달 동안 임신하여 조심하다 산고를 겪고 엄마가 되는 날, "우왓, 얏호!" 드디어 뒤바뀝니다. 완죤히 딸의 압박에서 해방되고, 산고를 겪은 자들의 화해가 옵니다. 딸한테 기울었던 사직은 다시 대왕대비 차지가 됩니다. 딸은 다시 제 엄마의 왕조를 이어받고 공주가 득실대는 그 딸아이와 또 전쟁을 한 판 벌이겠지요. 이렇게 끊임없이 순환하는 이 왕조의 상징은 북두칠성입니다. 국자처럼 별을 담과 눈물을 담고 먹을 것을 담는 북두칠성...


 


 

          이진명 시인

1955년 서울 출생

1990년 계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민음사 199?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문학과지성사 1994

『단 한 사람』열림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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