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백수로옹cognition>님의 블로그에서
니체의 니힐리즘의
한계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리스 철학에서 존재는 첫째로, 존립하는 것의 비은폐된 것에로의 현전성을 의미했다.
그러나 동시에 존재는 플라톤에게서 선(아가톤)으로 해석됨으로서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함, 즉 가능조건을 의미한다.
존재를 가능조건,
그것도 존재자의 가능조건으로 이해함으로써 존재보다 존재자가 더욱 전면에 드러날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은 곧 현전성으로서의 존재를 망각하는
것이며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망각하는 것이다.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의 망각으로서의 존재망각은 근세의 주관성의 형이상학에서 백일하에
드러난다. 근세의 주관성의 형이상학은 존재자를 앞에 세워진 것으로, 그리고 인간을 앞에 세워진 것을 장악하는(percipere) 주관으로
파악함으로써 존재자에게만 주목할 뿐 존재자가 드러나는 場인 현전성, 비은폐성으로서의 존재를 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세의
주관성의 형이상학은 중세에 의해서 예비되고 그것의 시원은 존재를 선으로 해석한 플라톤에게까지 소급된다. 비록 플라톤이 주관성의 형이상학은
아니라할지도 그에게서 주관성의 형이상학으로서의 서양 형이상학의 근원적인 토대가 놓여 있는 것이다.
존재를 망각하는 이러한 서양
형이상학을 하이데거는 존재 그 자체에 있어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즉 "존재 그 자체에 있어서는 무인 역사"(die Geschichte,
in der es mit dem Sein selbst nichts ist)로 규정한다. 여기서 존재는 무(nihil)로 규정된다. 존재를 무로
규정하는 형이상학이 바로 Nihilismus이다.
서양 형이상학은 본래적으로 니힐리즘이다. 이러한 니힐리즘으로서의 서양 형이상학의
완성이 니체라면 니체의 철학 역시 존재를 무로 보는 니힐리즘일 수 밖에 없다. 니체가 존재를 무로 보는 니힐리즘이었다는 것은 그가 존재를 가치로
사유하였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존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가 존립하는 것으로 사유되고 있다는 것은 존재가 존재로서
보여지지 않고 존재자로 보여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존재가 무로 보여지고 있다면, 니체 역시 존재자에게만 주목하는 존재망각
속에 있는 것이다. 사실 니체는 니힐리즘을 최초로 경험했으며 무엇보다도 니힐리즘을 극복하려 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니체는 니힐리즘을 최고의
가치들의 탈가치화로 경험하고, 지금까지의 가치들의 전도를 수행한다.
그리고 새로운 가치정립의 원리로서 힘에의 의지를 제시함으로써
니체는 니힐리즘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니체의 극복은 그의 철학 역시 존재를 무로 보는 니힐리즘이라면 진정한 극복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니체는 니힐리즘에로의 "최종적인 휩쓸려 들어감"이다. 여기에서 니체의 니힐리즘의 한계가 드러난다.
서양 형이상학이
존재를 사유하지 않았고 니체 역시 서양 형이상학의 완성이자 종말로서 존재를 가치로 사유함음으로써 존재를 사유하지 않았다고 할 때, 이것은 서양
형이상학은 전적으로 존재와 같은 것을 사유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형이상학은 존재를 다루기는 했으나 그것을 존재자와 연관해서
다루었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존재자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존재자는 그것이 무엇-임(was-sein)과
어떻게-임(wie-sein)에서 규정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무엇-임을 이데아로, 어떤 이들은 본질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존재에
해당하는 본질은 존재자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형이상학은 존재를 언제나 존재자에서부터 묻는다. 여기에서 형이상학이 존재를 존재로 사유하지
않은 이유가 드러난다. 또 형이상학은 존재를 Apriori로 규정하는데 이것 역시 형이상학이 존재를 존재자에서 사유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존재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존재자 보다 "나중의 것"(das Aposteriori)이지만, 그것의 "본성에 있어서는" 존재자
보다 "앞선 것"(das Apriori)이다.
존재는 존재자에서부터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존재자는 "있으며"(ist) 존재는
"현성한다"(wesen)는 사실을 형이상학은 망각하는 것이다. 존재를 존재자에서부터 사유하는 형이상학은 결국 존재를 최고의 존재자인 신에서부터
규정하게 되는 운명에 처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형이상학을 존재-신-학(Onto-theo-logie)라고 명한다.
이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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