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백님의
판화<모자 / 1988 / 22.5x20>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비극의 탄생'에서 최근에
'미래철학 서곡'까지의 내 저작 전체에는 공통되고도 특별한 점이 있다고 아주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나는 수도 없이 들어왔다. 또 사람들은
말하기를 내 저작은 모두가 경박한 날짐승을 잡으려는 덫과 그물을, 그리고 통상적인 가치 평가나 존중되는 습관을 전환시키려는 듯한 지속적이면서도
은밀한 권유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뭐라고? <모든 것>이 하나같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 뿐이라니? 이런 탄식과 함께 내
저작을 손에서 떼어놓는다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 도덕에 대한 혐오감이나 불신감을 갖고서, 뿐만 아니라 언젠가 최악의 것에 대한
중재자가 되도록 자신을 부추기고 고무하면서 마치 그 최악의 것이란 아마도 가장 심하게 중상(中傷)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닌가 하고 묻기라도
하듯 말이다. 나의 저작은 의혹의 학교, 나아가서는 멸시의 학교, 또는 다행스럽게도 용기의 학교, 뿐만 아니라 불손함을 가르치는 학교라고들
말한다. 누구든 이런 정도로 깊은 의혹을 품고 세상을 바라보았으리라고는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그것도 간혹 악마의 변호자로서뿐만 아니고 그에
못지 않게,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신의 적이면서 소환자로서 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깊은 의혹에 내재한 결말과,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것에 <통찰의 차이>라는 판결을 내리는 고독의 냉혹과 불안 등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자는- 내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다시
말해서 잠시 자기 망각을 얻기 위해 숭배나 적개심 혹은 학문이나 경박함 또는 우둔함 같은 곳에 숨어 있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알리라. 또한
그때 내가 <필 요로 했던> 것을 찾지 못하게 되자 왜 내가 그것을 인위적으로 강탈하고 적당히 위조하고 지어내야 했는가를 알리라(-
또한 시인이라 해서 그와 유다른 일을 했던 걸까? 그리고 세상의 모든 예술이 무엇 때문에 존재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내가 나의
치료와 자기 회복을 위해 언제나 되풀이하여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그처럼 유일한 존재, 유일한 <시각>을 갖지 <않으려는>
믿음- 눈(眼)과 욕망에 있어 동질성, 유사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매력있는 잘못된 추측, 우정의 신뢰 속에서의 휴식, 의혹도 의문부호 따위도
없는 두 사람 사이의 맹목, 전경(前景), 외관(外觀), 근접, 가장 친근한 것의 향락, 색채나 피부나 표면적인 것들의 향락이었다. 아마도 나의
이런 여러 <술책>, 더욱 정교한 수많은 위조화폐를 비난할 수도 있으리라.
이를테면 내가 도덕에 대해 이미 충분히
꿰뚫어보고 있던 바로 그 시간에 나는 의식적이며 고의적으로 쇼펜하우어의 맹목적 도덕 의지에 눈을 감았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리하르트
바그너의 치유할 길 없는 낭만주의에 대해서도 마치 그것이 시작이기는 하지만 끝이 아니기라도 하듯 나 자신을 기만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인에 대해서도, 독일인과 그들의 장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아마도 그런 유의 긴 목록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실인 동시에 충분한 근거로써 나를 비난한 것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자기 보존의 술수가, 얼마나 많은 이성과 드높은
비호가 그러한 자기기만 속에 들어있는가- 또한 얼마나 많은 허위가 <내> 성실이라는 사치를 늘상 되풀이해서 자신에게 허용케 하려면
<필요한가>- 이 모든 것에 대해 <그대들이> 뭘 알고 있는가, 뭘 <알 수> 있으랴? .... 아무튼 나는
여전히 살고 있다. 그리고 어쨌든 간에 삶은 도덕에 의해 고안되지도 않았다. 삶은 기만을 <바란다>. 삶은 기만으로써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벌써 늘상 하던 일을 되풀이하여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늙은 부도덕자이며 새잡이꾼인 나는
[선악을 넘어서]에서 반도덕적, 탈도덕적으로 말하고 있지 아니하냐?
-2-
그래서 일짜가 필요에 의해
<자유정신>을 <고안해>내기도 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우울하고도 용기있는 이
책을 헌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같은 <자유정신>은 존재하고 있지도, 전에 존재해본 적도 없다. 이미 말한 바, 나는 곤란한 지경에
처하여,(즉 질병이라든가 고독, 타향, 무관심, 빈둥거림 따위) 더 나은 기분을 가지려고 지껄이거나 웃고 싶을 때엔 함께 지껄이거나 웃는,
그러다 싫증이 나면 쫓아버릴 수 있는- 그런 기특한 녀석이나 허수아비로서, 없는 친구를 메꾸려고 그 당시 그들 자유정신을 반려로 필요로 했었다.
언젠가는 그들 자유정신이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것, 우리 유럽의 내일과 모레의 그 아들 가운데 그런 명랑하고
용감무쌍한 녀석이 나타나리라는 것, 그는 육신을 갖추고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침대 속에서처럼 허깨비나 환영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 적어도 <나>만은 이것을 의심하고 싶지 않다. 벌써 그들이 <오는> 모습이, 천천히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그리하여 그들이 어느 운명으로 생성하며 어느 길로 오는지를 내가 <바라보고> 미리 그것을 서술한다면 아마도 그들의 도래를 어느 정도는
촉진할 수 있지 않겠는가?
-3-
<자유정신>의 원형을 품어 내부에서 그것이 완전함에 이르도록 성숙시키고
즐거운 것이 되게 할 어떤 정신이 어떤 <엄청난 해방> 가운데 결정적인 사건을 맞이한다는 것,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만큼
속박된 정신이었으며 자신을 귀퉁이와 기둥에 영원히 가장 단단히 묶는걸까? 어떤 밧줄로 묶어야 거의 끊어내지도 못할까? 고상하고도 선택된 층의
인간에게 있어서 그것은 여러 가지의 의무이리라. 젊은이에게 타고난 듯한 외경심, 오랫동안 숭배하고 중하게 여긴 모든 것에서 나오는 두려움과
상냥함, 자신들이 성장해 온 고장, 자신들을 이끌어주었던 손길, 숭배를 배운 성전 등에 대한 감사 따위- 그 최고의 순간들이 그들을 가장 단단히
결박하고 가장 지속적으로 의무를 지워주는 것이다.
그 엄청난 해방은 이처럼 속박된 것에 갑작스럽게 지진처럼 엄습한다. 그러면 젊은
영혼은 단번에 동요되고 찢어져 떨어져버리고 만다- 저 자신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쇄도하는 충동이 지배하여 명령처럼 그를
장악해버린다. 한 뭉치의 의지와 소원이 여하튼 간에 어느 곳인가로 나아가려고 눈을 뜬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세계로 향하는 격하고 모험적인
호기심이 그의 모든 감각 속에서 불붙어 흔들거린다.「<이 곳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 이렇게 단호한 유혹의 음성이
들린다. 이 <여기>, 이 <집에>라는 것은 자기가 여태껏 사랑해 온 모든 것인데도 말이다!
자기가 사랑해
온 것, 그것에 대한 갑작스런 공포와 앙심, <의무>라 했던 그것에 대한 멸시에 찬 번갯불,
편력(遍歷)·타향·소원(疎遠)·싸늘함·동결에 대한 반동적이며 의식적이며 화산과도 같은 욕망의 분출, 사랑에의 증오심, 아마도 자신이 지금까지
숭배하고 사랑해 온 그곳까지 <역행하는> 신전 모독과도 같은 손짓과 눈초리, 아마도 자신이 방금 한 일에 대한 격렬한 수치심, 그리고
동시에 승리를 알리는, 승리에 취해 기뻐 날뛰는 내면의 전율, <그 일>을 해냈다는 데 대한 광희(狂喜)- 승리라고? 무엇에 대한
승리란 말인가? 누구에게 승리했단 말인가? 신비스럽고 의문투성이의 애매모호한 승리, 하지만 아무튼 간에 <최초의> 승리인 것이다.
그 엄청난 해방의 사건 속에는 이같은 악의와 고통이 따른다. 그 해방이란 것은 동시에 인간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병이다.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가치를 정립시키려는 힘과 의지의 이 최초의 폭발, <자유로운> 의지를 향하는 이 의지. 그리고 갈증을 푼 자, 해방된
자가 이제부터 사물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입증하려 할 때 그의 거친 시도와 기행(奇行)에는 얼마나 많은 병이 나타날 것인가! 만족할 줄 모르는
위임과 더불어 그는 사납게 배회한다. 그가 약탈하는 것이 그의 자만심이 지닌 위태위태한 긴장 상태를 말끔히 씻어주어야만 한다. 그는 자신을
자극하는 것을 갈기갈기 잡아찢는다.
악의에 찬 미소로써 그는 자신이 은폐하는 것, 뭔가 소중하고 순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비틀어버린다. 이러한 사물들이 뒤집힌<다면> 그것들이 어떻게 보일지를 그는 시험한다. 지금껏 좋지 못한 평판을 받아온 것을 그가
이제는 호의로 되돌리려 할 때에는 아마도 거기에 자유의지가 그리고 그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쾌감이 있게 되리라. 그가 호기심으로 유혹하려는 듯이
가장 금지된 것의 주위를 살금살금 걸어다닐 바로 그 때. 그의 활약과 유랑의 그 배후에는-왜냐하면 그는 마치 황야에서처럼 불안하면서도 정처없는
행로의 중간에 있는 것이므로- 더욱 모험에 찬 호기심의 의문부호가 자리한다.
「<모든> 가치를 뒤바꿔버릴 수는 없을까?
아마도 선이란 악이 아닐까? 그리고 신이란 단지 악마의 발명품이거나 악마를 더욱 정교하게 해 놓은 건 아닐까? 모든 건 궁극에는 허위가 아닐까?
또 우리가 기만되었다면 바로 그것에 의해 우린 동시에 기만하고 있는 자가 아닐까? 우리는 기만자<이어야> 하지 않을까?」-이러한
생각이 더욱 멀리, 더욱 빗나가도록 그를 인도하거나 현혹하는 것이다. 고독이 그를 에워싸고 휘감는다. 더욱 으르대고 더욱 목을 조르고 더 심장을
짓누른다. 저 무시무시한 여신(女神), 정념의 잔인무도한 어머니(mater saeva cupidinum. 호라티우스의 작품에 나오는 표현,
비너스 여신)가- 하지만 <고독>이 무엇인지를 지금 누가 알겠는가? .......
-4-
이 병적인
고립에서, 그와 같은 시험기의 황야에서, 저 무섭고도 넘쳐흐를 듯한 안정과 건강까지 가려면 아직도 멀다. 그 <성숙한> 정신의 자유에
이르기까지에는 병조차도 인식의 수단이며 인식을 낚는 낚시바늘로서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바로 마음의 자기 지배인 동시에 수양인 그 정신의
자유는 수많은 대립된 사유 방법에 길을 내준다- 또한 넘칠 듯한 풍요의 그 내면적인 광대함과 호강에 이르기까지, 정신이 제 스스로의 길에 서
있으면서도 자기를 잃고 방탕하며 어느 구석에 웅크린 채 주저앉아 버리고 마는 위험을 내몰아 주는 것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건강의
표지판인, 유연하며 완치해주는 그리고 복사하며 치유하는 힘의 저 과잉에 이르기까지. <시험삼아> 목숨을 걸고 모험에 몸을 내맡겨도
좋다는 위험스런 그 특권, 자유정신의 거장다운 특권을 부여하는 그 과잉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 사이에는 오랜 회복기가 놓여 있는
것이다. 고통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이며 수많은 빛을 띤 변형으로 충만하여, 벌써 대담하게도 건강의 의상을 입고 가장을 한 강인한 <건강에의
의지>에 지배되고 고삐를 붙들린 시간이. 거기에는 후에 이러한 운명에 놓인 한 인간을 아무런 감동 없이는 회상할 수 없는 하나의 중간
상황이 있는 것이다. 거기엔 핼쑥하며 섬세한 빛과 햇살의 행복이 속해 있다.
일종의 새의 자유, 새의 조망, 새의 오만에서 나온
감정이, 호기심과 다감한 멸시의 감정에 얽힌 어떤 제 3의 감정이 있다. <자유정신>- 이 싸늘한 낱말은 그러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그럴 듯하며 따스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더 이상 사랑과 증오의 속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긍정도 부정도 없이 자유의지대로 가깝고 멀어지며,
기꺼이 탈주하며 회피하며 펄펄 날아다니고 다시 돌아서거나 또다시 위로 날아오르는 것이. 언젠가 자신의 <아래에서> 놀라우리만큼 수많은
것을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응석을 부리게 된다. - 그리고는 자신과 무관한 사물에 걱정하는 바로 그러한 사람과는 정반대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때부터 자유정신과 관계가 있는 것은 오직 더 이상 <마음을 괴롭히지> 않는 그러한 사물뿐이다- 그런데 그런 사물은 얼마나
많은가! .....
-5-
한걸음 더 회복이 진행되면, 자유정신은 또다시 삶에 접근한다. 물론 천천히, 거의
반항적으로 거의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주위는 다시 따스해지고 흡사 노란빛을 띠게 된다. 감정과 동감은 깊어지고 이슬을 실은 온갖 류의 사람이
그의 위로 지나간다. 이제야 비로소 <주위 환경>에 대해 처음으로 눈이 떠지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겨우 들기 시작한다. 그는
놀라서 조용히 앉아 있다.
대체 그는 어디에 <있었다는> 말인가? 이 친근하고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사물들. 그
사물들이 그에겐 얼마나 달라보이는가! 그 사이에 사물들은 얼마나 부드러운 솜털과 불가사의한 매력을 지니게 되었는가! 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본다- 자기가 했던 방랑과 자신의 고집과 자기 소외, 자신이 싸늘한 고공에서 새처럼 날며 먼 곳을 응시했던 일에 감사하며.
자신이 섬약하고 답답해빠진 게으름둥이처럼 언제나 <집에>, 언제나 <맨정신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것은 얼마나 잘한
일이냐! 자신은 자신의 <외부에> 있었으며 그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야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그때 그는
거기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발견하는가! 미증유의 전율! 피로와 오랜 병석, 회복하던 병의 재발 가운데에서의 이 행복! 고통에 싸여 조용히 앉아
있는다는 것, 인내심을 키우고 햇볕 속에 누워 있는다는 것이 그에겐 얼마나 마음에 드는 일인가! 누가 그만큼의 겨울의 행복, 벽에 드리워진
햇볕의 반점을 잘 알고 있단 말인가! 삶을 향하여 다시 절반쯤 몸을 돌린 이 회복자 혹은 도마뱀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겸손한 생물이다- 그들 중에는 질질 끌리는 옷자락에다 하루도 작은 찬미가를 달고 다니지 않으면 배기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해서 이 자유정신의 방식으로 병에 걸려 오랜 세월을 앓다가, 이번에는 더욱 오랜동안 더 오래 걸려 <전보다 더 건강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모든 염세주의(아는 바처럼 이것은 낡은 이상주의자와 거짓말장이의 암인데)를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것이다. 건강 자신도
작은 원통 속에 들어 있는 오랜 시간을 자신을 위해 처방한다는 이 사실 속에 지혜가, 삶의 지혜가 있다.
-6-
그때에 이르게 되면 마침내, 여전히 악화될 것도 같고 돌변할지도 모르는 건강의 갑작스런 빛으로, 그때까지도
애매하고 불가사의하며 거의 손댈 수도 없을 정도로 그의 기억 속에서 기다려왔던 자유정신에 대한 수수께끼가, 그 엄청난 해방의 수수께끼가 자태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는 오랜 동안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왜 그처럼 떨어져 있는가? 그처럼 홀로 있는가?
내가 숭배한 모든 것을 왜 포기했는가? 숭배 그 자체마저도 포기하고서? 자신의 미덕에 대한 이 혹독함, 이 악의, 이 증오는
무엇때문인가?」라고- 그런데 이제, 이미 그에 대한 어떤 대답을 듣고 있으면서도 높은 소리로 그것을 감히 질문하는 것이다.「너는 너의 주인이며
동시에 네 자신의 미덕의 주인이어야만 했다. 전에는 미덕이 너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그 미덕은 너의 도구, 다른 도구와 다를 것 없는 너의
도구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너는 너의 찬반에 대한 권한을 얻어 너의 더욱 고결한 목적을 향하여 필요할 때마다 그 미덕을 달거나
떼어내는 것을 배워야만 했던 것이다. 너는 각각의 가치 평가에 있어 원근법을 터득해야 했다- 지평선의 이동과 왜곡 그리고 표면의 목적론을, 또한
원근법에 속한 모든 일에 대해, 대립된 가치들의 관계 속에 있는 약간의 둔감성, 그리고 찬성과 반대에 더불어 항상 지불되곤 하는 지적 희생 등에
대하여. 어떠한 찬반에도 들어있는 <필수적인> 불공평을 터득해야 했고, 또 삶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불공평을, 그 삶 자체도
원근법과 그 불공평에 의해 <제한되는> 것으로서 각각 터득해야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너는 불공평이 가장 큰 곳, 다시 말해서 가장
보잘 것 없이 가장 소심하게 가장 옹색하게 가장 원시적으로 삶이 펼쳐지면서도, <자기 자신>을 사물의 목적과 기준으로 받아들이거나,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더 높고 더 크고 더 풍부한 것을 은밀히 조금씩 부수며 의혹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곳을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너는 <계급>이라는 문제를 보아야 했고, 어떻게 권력과 권리 그리고 원근법의 넓이가 서로 상승하는지를 보아야 했다.
이런 것을 그대는 해야 했던 것이다.」-자유정신은 자신이 어떠어떠한 <너는 해야 한다>에 복종해 왔는지를, 그리고 이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해도 좋은>지를 <알고 있는> 것이니, 그만 말하기로
하자.......
-7-
이처럼 자유정신은 해방의 수수께끼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답하고, 자신의 경우를 일반화시켜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판정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하기를,「나에게 일어난 것과 같은 일은, 인격화하여 <세상에 나타나려는>
그러한 <사명>을 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다.」이러한 사명의 은밀한 힘과 필연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임신과
같이 개인의 운명들 사이 혹은 그 속에서 지배하고 있다.- 그가 스스로 이 사명에 주목하고 그 이름을 알기 훨씬 전부터 말이다.
우리의 숙명은 우리가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할 때에도 우리를 좌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미래이다.
자유정신인 우리가, <우리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계급의 문제>라 가정한다면, 이제 우리 생애의 정오(正午)에서
우리는 우리 앞에서 그 문제가 생기기 전에, 그 일이 <허락>되기 전에 어떠어떠한 각오, 우회로, 시련, 유혹, 변장을 필요로 했던
것인지를 이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또한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어떻게 하여 가장 다양하고도 가장 모순되는 곤경과 행복의 상태들을 영혼과
육신에 경험해야 했었던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 불리우는 저 내면 세계의 모험가이며 세계
회항자(回航者)로서, 또 역시 마찬가지로 <인간>이라 불리우는 모든 <초인간적인 자>와 <서로 맞물려 있는
자>의 측량사로서- 도처로 돌진하고, 거의 두려워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조롱하거나 잃어버리지도 않고, 모든 것을 맛보고, 우연으로부터 모든
것을 순화하면서, 즉 가려내면서-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자유정신이 이렇게 말하도록 허락받을 때까지.「여기에- <새로운> 문제가
있도다! 여기에 긴 사다리가, 그 계단 위에 우리 자신이 앉기도 하고 그 계단을 딛고 오르기도 한 사다리가 있다- 언젠가는 우리 자신이 그
사다리인 때도 <있었다>! 여기 이 곳에 더 높은 것, 더 깊은 것, 우리의 발 아래 있는 것, 놀라우리만큼 긴 서열, 계급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를!」
-8-
방금 서술된 발전의 어떠한
단계에 이 책이 속해 있는지 (아니면 <놓여> 있는지)는 어느 심리학자나 점장이라 하더라도 곧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체 심리학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프랑스에는 확실히 있고, 아마도 러시아에도 있을 것이지만, 분명 독일에는 없다. 무슨 일인지 는 몰라도
오늘날의 독일인들은 여전히 이런 일을 명예로까지 생각할 것인데, 그것이 전혀 근거없는 것도 아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비독일적인
기질을 가졌거나 그런 상태로 되어버린 사람에게는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광범위한 여러 국가와 민족 사이에서 그 독자를 찾아낸- 대략
10년간 나돌고 있는데- 이 <독일의> 책은, 외국인의 냉담한 청각까지도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어떤 음악과 피리의 기술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다름아닌 그 독일 내에서 이 책은 가장 냉담하게 읽혀지고 가장 언짢게 <들렸던>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누군가 나에게「이 책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이 책은 무거운 의무의 압박을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 알맞은 것이다. 이
책은 세련되고 섬세한 감각을 원하며, 과잉을 요구한다. 시간의 과잉, 하늘과 마음의 과잉된 청명함, 가장 대담한 의미에서의 과잉된 한가함을
요구한다- 현대의 독일인인 우리가 갖고 있지도 않고 따라서 줄 수도 없는 좋은 것뿐이다.」- 이러한 점잖은 대답에 나의 철학은 침묵할 것을,
그리고 더 이상 질문하지 말도록 내게 충고한다. 특히 어떤 경우엔 격언이 시사하는 바대로, 오직 침묵함으로써 철학은 <존속하는>
것이니 말이다.
1886년 봄, 니이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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