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바지의 밤
/ 황병승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모두 서른 두 개
나는 나의 아름다운 두 귀를 어디에 두었나
유리병 속에 갇힌 말벌의 리듬으로 입맞추던 시간들을.
오른 손이 왼쪽 겨드랑이를 긁는다 애정도 없이
모두 계단 속에 갇힌 시체는 서른 두 구
나는 나의 뾰족한 두 눈을 어디에 두었나
호수를 들어올리던 뿔의 날들이여.
새엄마가 죽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밤의 늙은 여왕은 부드러움을 잃고
호위하던 별들의 목이 떨어진다
검은 바지의 밤이다
폭언이 광장의 나무들을 흔들고
퉤퉤퉤 분수가 검붉은 피를 뱉어내는데
나는 나의 질긴 자궁을 어디에 두었나
광장의 시체들을 깨우며
새엄마를 낳던 시끄러운 밤이여.
꼭 맞는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시집『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앙, 2005/6)
■ 해설 / 권두련
황병승 시를 보는 대개의 시각은 非정형적이라 모호하고, 퀴어(Queer)적이라 非정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정형적이라는 말에는 수긍하지만 그것은 정형화되고 통념화 된 사회를 비판하는 방법으로의 비정형(이 논제는 다른 기회에 살펴보기로)이고, 퀴어적이라곤 하지만 정작 동성애자들 보다 아웃사이더들이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릴 인물들이 등장한다.
자세히 보면 황병승 시에 동성애적인 부분은 극히 드물다. 제목에 트랜스젠더(「대야미의 소녀-황야의 트랜스젠더」)와 게이(「커밍아웃」)가 등장해서 동성애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기는 하지만, 그것은 인상일 뿐 정작 두 시에는 동성애가 나오지 않는다. 동성애가 등장하는 부분을 골라보면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의 겨울」에서 이소룡 청년이 미스터 정키를 불러 가끔 리밍(항문 주위를 핥는 것)한다는 부분과 「혼다의오세계(五世界)살인사건」에 등장하는 남자 히데키가 남자인 “렌에게 휘파람 부는 법을 배”운다고 하고 이어서 “그는 나를 곧장 자신의 침실로 데려갔네”라고 동성애를 확인하는 부분과 「불쌍한 처남들의 세계」에서 “친구여 자네를 누나라 불러도 좋을까”라고 동성애를 암시하는 부분뿐이다. 황병승의 시가 퀴어적이라 비정상적이라고 정의할 만큼 많지 않은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시에 나타난 특징 하나를 살펴보겠다. 황병승 시의 특징 중 커다란 특징은 한 편의 시에 남성과 여성의 상징이 뒤섞여 나타나는 ‘一詩二性’이다. 좀더 클로즈업 해보면, 단일 시에 등장하는 여러 개의 시어 하나하나에도 두 개의 성별(gender)이 나뉘어 나타나는 ‘一言二性’이다. 시집 제목에 “여장남자”만 보아도 남성과 여성이 같이 나타나고, 잡히는 대로 읽어도 이 특징은 거의 비슷하게 나타난다.
등단작 「주치의 h」에 나오는 ‘목구멍’은 구멍이란 여성형과 목울대라는 남성형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강력한 남성형인 ‘도끼’마저 “떠나기 전, 집 담장을 도끼로 두번 찍”을 만큼 파괴적이지만 한 편으론 “입이 하나 뿐”이라고 하여 여성형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남성을 말하는 m(man)이나 여성을 말하는 w(woman)가 아니라 사람을 말하는 h(human)이다.
「커밍아웃」에 나오는 ‘항문’도 긴 대장의 남성형과 문(門)이란 여성형이 동시에 나타나고, ‘서랍’도 피스톤 운동이라는 남성성과 무엇인가 담고 보관한다는 여성성이 고루 나타난다.
「시코쿠」도 외로운 숙녀와 외로운 신사로 표면에 드러나는가 하면, 숫자도 ‘6과 9’를 써서 양성을 나타내고, ‘풍차’도 기둥이라는 남성과 원(또는 구멍)이라는 여성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남과 여를 묶어주는 ‘호치키스’요 ‘악수’인 것이다.
대표적으로 「핑크트라이앵글배(盃) 소년부 체스 경기 입문(入門)」에 등장하는 핑크트라이앵글, 고양이, 문어, 체스, 담배 파이프, 중절모도 특정한 성별만을 상징하지 않고 남녀 양성(兩性)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간단히 보면, ‘핑크트라이앵글’은 ‘동성애 운동과 게이프라이드 상징마크’라고 주석한 데서 알 수 있듯 양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먹물을 발사”한다고 남성성을 강조한 ‘문어’도 그 부드럽게 흐느적거림으로 인하여 여성성을 내포하고 있다. ‘체스’는 전쟁을 본 따 만든 경기라는 면에서 남성적이지만 그 안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여왕이라는 점에서 여성적이다. ‘담배 파이프와 중절모’도 기본적으로 남성의 기호품이지만 무언가를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면에서 여성적이다. 남성의 상징으로 알려진 고양이도 “꼬리가 없는” 고양이로 그려내 남성의 상실을 그리는 동시에 여성성을 대두시키고, 여성명사인 ‘핑키’라고 부른다.
「부드럽고 딱딱한 토슈즈」에도 토슈즈와 장어 멍게 해삼이 등장한다. 얼핏 보면 토슈즈는 여성이고 장어 멍게 해삼은 남성이다. 그러나 토슈즈는 여성용이긴 하지만 신발 중 유난히 뾰족하고 끝이 단단하여 남성적으로 인식해도 억지가 아니다. 남성 성기를 닮아 남성적으로 보이는 멍게나 해삼의 배를 갈라놓고 보면 흡사 여성의 성기를 닮은 걸 알 수 있다. 남성 안에 여성이 혼재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세상 어느 사물이 양성을 상징하지 않는 게 있을까만, 유독 황병승의 시에는 한 작품, 아니 한 단어에도 두 개의 성별이 뒤섞여, 나뉘어, 동시에. 혼재하여, 골고루(위의 밑줄 참조) 나타나고 있다.
시집에서 가장 짧아 선정된 이 시도에도 한 사물이 두 개의 성을 가지고 있다. 바지가 그것이다. ‘바지’는 남성의 의복이라 남성성을 강하게 나타내는 사물이다. 그러나 그에 딸린 호주머니의 모양이 여성의 자궁을 닮았다는 점, 무언가를 깊이 받아들인다는 점, 꼭 조여 감싼다는 점, 속에 공간이 있다는 점, 소중한 것을 넣는 곳이라는 점 등등에서 여성성이다. 바지라는 한 소재에서 여지없이 두 개의 성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화자는 슬프다 검은 밤이다. 이유는 꼭 맞는 호주머니인 새엄마를 잃어서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새엄마’다. 흔히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친엄마가 아니라 새엄마다. 친엄마와 헤어지고(아니면 죽고) 새로 들어온 엄마가 예뻤다. 자주 “유리병 속에 갇힌 말벌의 리듬”처럼 잔소리를 해대서 “나의 아름다운 두 귀를” 떼어내고 싶을 정도지만, 하여간 새엄마는 예뻤다. 그래서 아버지의 여자임에도 발기된 뿔(성기)은 호수(여성)를 들어올리게 했다. 훔쳐보는 “나의 뾰족한 두 눈을” 감추고 살아가려 하지만 그 죄책감에 나는 매 년 죽는다. 죄책감 뿐 아니라 어머니에 대한 강한 이끌림은 그것을 아버지에게 들켜 거세될까봐 떠는 오이디푸스처럼 두려워서도 매 년 죽는다. 서른 두 살이므로 나의 “시체는 모두 서른 두 구”다. 그러나 그렇게 흠모하던 여왕은 늙고 부드러움을 읽었다. 폭언이 오가는 나날이 이어지고 또 다른 새엄마가 들어왔다. “퉤퉤퉤 검붉은 피를 뱉아내며 가는” 첫째 새엄마, 오랫동안 질기게 이어오던 애증에 익숙해져 이미 꼭 맞는 호주머니가 되었는데, 그녀가 가니 오늘 밤은 슬프다.
이 시를 읽으며 새엄마를 친엄마라 여기고 읽으면 더 재미있다. 32년이란 세월을 같이 살았다는 점과 작가의 나이가 그 근방이라는 점에서 이 새엄마는 친엄마일 가능성이 높은데, 친족을 객관화하고 냉소적으로 말하기 위하여 ‘새엄마’라고 지칭한거라면 하나의 재미가 추가된다. 그리움의 대상도 친엄마라는 말이 되어 “오른손이 왼쪽 겨드랑이를 긁”었다는 말과 “애정도 없이” 지냈다는 말에 아귀가 맞는다. 또한 엄마와 아버지와 나의 삼각관계를 오이디푸스 운운한 심리학자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황병승의 시는 위에서처럼 하나의 시어에 남성기제와 여성기제가 뒤섞여, 나뉘어, 동시에 나타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차라리 생리적인 자웅동체(hermaphroditism)나 심리적 양성성(psychological androgyny)이라 말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심리적 양성성은 무엇인가? 인간주의 심리학 발달의 기수인 매슬로우(Abraham Maslow)가 오랫동안 내려온 남성은 남성답고, 여성은 여성다워야 한다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남녀 모두에게 차별 또는 역차별의 근거가 될 뿐 아니라 삶을 제약하여 자아실현을 가로막는다고 보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제시했던 바람직한 인간상이며 미래형 인간상이다.
속으로는 이런 양성성을 지향하면서도 겉으로는 여장남자니 커밍아웃이니 오럴 섹스니 애로틱파괴어린빌리지니 핑크트라이앵글이니 판타스틱 로맨틱구름 등을 동원하여 재미를 더하는 시, 눈요기 꺼리로 시선을 유인해 초점을 흩뜨려 놓음으로 본심을 숨기는 시, 황병승의 시를 이렇게 읽어야 “오른 손이 왼쪽 겨드랑이를 긁”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인데도, 방향이 달라 긁을 수 없을 것이 아닌가? 착각하게 만드는 수법을 읽어낼 것 같다. 이것이 어린이의 시인 황병승이 그리는 리드미컬하고도 비린내 뭉클 풍기는 시코쿠 맵(map)이요 소녀미란다좌절공작기(記)가 아닐까? 좌절을 의도적으로 공작하여 기록해 내는...
- 『즐거운 시 읽기』(책나무출판사, 근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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