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속 詩

고진하 시인 <수탉>- 민음사

자크라캉 2006. 4. 26. 16:01
직박구리

 

 

         고진하

 

어떤 시인이

꽃과 나무를 가꾸며 노니는 농원엘 갔었지요.

 

때마침,

천지를 환하게 물들이는 살구나무 꽃가지에

덩치 큰 직박구리 한 마리가 앉아

꽃 속의 꿀을 쪽쭉 빨아먹고 있었지요.

 

꼍에 있던 누군가 그걸 바라보다가,

꽃가지를 짓누르며 꿀을 빨마먹는 새가 잔인해 보인다며

훠어이 훠어이 쫓아버렸어요.

 

아니, 그렇다면

꿀이 흐르는 꽃가지에 앉은 生이

꿀을 빨아먹지 않고 무얼 먹으란 말입니까.

 

 

 

 

     호수

 

 

당신을 사랑한 나는

당신의 둥근 원을 반지 삼아 내 손가락에 꼈다

 

어린 연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당신 둘레를 헛되이 맴돌고 있다

 

 

 

    나무

 

 

나무는 길을 잃은 적이 없다

 

허공으로 뻗어가는

 

잎사귀마다 빛나는 길눈을 보라

 

 

오늘 네 상처에서 불멸의 빛을 읽다니

나 아닌 나가 되는 신비를 읽다니

 

'옻나무' 중에서

 

 

     뒤로 걸어보렴

 

 

너무 앞으로만 걸었어.

앞으로

앞으로

걸어도 진보는 없고

생은

진부해지기만 하니

이젠 뒤로 걸어보렴.

(혹시 알아?)

뒤로

뒤로

걷다가

네 오랜 그리움

영혼의 단짝을 만나게 될지...... 

 

 

고진하시집, <수탉>, 민음사, 2005.

<고진하>시인

1953년 강원 영월 출생

1987년<세계문학>으로 데뷔

시집<지금 남은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얼음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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