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문학동네] 2005년 봄호
복덕방 노인
조영석
유리창은 거대한 지도였다
그는 지도를 등지고 앉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녹슨 풍향계처럼 삐걱거리며
그의 목뼈만 조금씩 틀어졌다
찾아오는 구매자나 매매자는 없었다
그의 머리는 먼 우주의 한 지점을 가리킨 채
기다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가 사람들은 하나 둘 짐을 꾸려 떠났다
비둘기들이 날아와 그의 눈을 파먹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끔 입을 벌려 검은 연기를 뿜어올렸다
연기의 꼬리가 끊어지면 고장난 엔진 소리를 내며
단칸방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방이 나오는 족족 비둘기들이 물고 날아갔다
상가를 배회하던 개들은 비둘기들이 놓친 방을
차지하기 위해 으르렁거리며 다투었다
한번 벌어지자 그의 입은 계속해서 방을 낳았다
지도 위에서 붉은 집들이 뚝딱거리며 세워졌다
그의 팔과 다리가 흐물흐물 녹기
시작했다
건물주가 찾아왔을 때 유리창 앞에는
젖은 나무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인부들이 해머를 휘두르자 복덕방은 허물어졌다
벽돌더미 사이로 노인의 머리가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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