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시선]2006년 봄호
신라주유소
김혜경
쓸쓸히 늙어 가는 주유소가 있다
논이 있던 자리에 아스팔트 길이 나고
명아주풀 씨앗들 무심히 가을볕을 쬐고 있다
그는, 응달진 곳에 묻힌 경애왕의 悲哀도
풀숲에 떨어져 뿌리내리지 못하는
어린 소나무의 슬픔도 모른다
아니 세상일에 깊이 관여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안다, 귀를 막고 입을 닫는 것이
현실에서 살아 남는 법임을
알면 알수록 올가미에 빠지는 것이 세상살이임을
캄캄한 밤 허기진 자동차에게 주유한 액수만큼
속도를 충전시켜주는 일만 할뿐이다
그가 유일하게 관심이 가는 것은 길섶에 아슬아슬하게
터를 잡은 민들레 씨앗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 하얀 것들이 冠을 쓰고
어디든 마음 붙이는 곳으로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다
속도에 중독된 사람들 천 년 사지의 안부 묻지 않아도
그는 결코 서운해하지 않는다
다만 한 때는 번창했던 주유소
불빛이 희미하게 꺼져 가는 것보다
질주에 감염된 휘발유를 팔 수 밖에 없는
生이 안타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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