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발표작

창비 제1회 ~ 제5회까지 신인 시인상

자크라캉 2006. 3. 13. 15:21
창비 제 1회 신인 시인상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 최금진




차는 계곡에서 한달 뒤에 발견되었다
꽁무니에 썩은 알을 잔뜩 매달고 다니는
가재들이 타이어에 달라붙어 있었다
너무도 완벽했으므로 턱뼈가 으스러진 해골은
반쯤 웃고만 있었다
접근할 수 없는 내막으로 닫혀진 트렁크의
수상한 냄새 속으로 파리들이 날아다녔다
움푹 꺼진 여자의 눈알 속에 떨어진 담뱃재는
너무도 흔해빠진 국산이었다
함몰된 이마에서 붉게 솟구치다가 말라갔을
여자의 기억들은 망치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흐물거리는 지갑 안에 접혀진 메모 한장
"나는 당신의 무엇이었을까"
헤벌어진 해골의 웃음이
둘러싼 사람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 무엇이었을까...... 메아리가
축문처럼 주검 위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갔다



창작과 비평 제2회 신인 시인상

흉측한 길 /안주철


아침부터 그 흰 개는 길을
깨물고 놔주지 않았다
길 옆 화단의 잡초와 시간을
뽑고 있는 노인들은
잠깐씩 그 흰 개를 바라보고
아카시아 꽃잎은 바람이 불 때마다
아주 먼 곳으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떨어지기 전
향기를 잃은 꽃잎은
쉽게 남들의 일이 되는 법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트럭이 그 흰 개를 밟고 지나갈 때
그 흰 개는 털을 세우고
길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잠시 속도를 줄이며
백미러를 통해 흰 개를 확인하는 운전사
거울에 비친 죽음은
거울에 비친 상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한대의 승용차가 그 흰 개를
밟고, 잠시 갓길에 서서
그 흰 개를 바라보고 있다
그 흰 개의 입은 뭉그러져 있고
터진 옆구리가 길을
삼키기 직전



나는 그 길 건너편
가파른 벼랑을 보면서
장식으로 걸어논
흉측한 길이라고 잠깐 생각했다.



좋은 표현인 것 같아
기분이 참 좋았다.




창작과 비평 제3회 신인 시인상

조리사의 일기 /김광선

소 한 마리분의 내장을
부위별로 정리해놓고 가을도 끝난
나무 아래 섰다
아직도 그 선명한 빛이 가시지 않은
고기를 담근 통
한껏 흘려보낸 물빛처럼 노을이 피었다
물컹거리는 비린내보다도 허리의 통증
씻어내려 삼킨 막소주 한잔으로 모자라
담배연기 폐 깊숙이 밀어넣는다

풀풀 날린다 흩날릴 것도 없는
시푸르딩딩 겨울 초입 저녁나절
민망한 듯 잎새 몇 개 겨울나무 뜨악하다
몸짓만이 남았구나
바람 앞에서 초연할 수 없었던 의지
맨가지로 빈 하늘 받치고 섰구나

찬물에 퉁퉁 불은 손을 쓰다듬는다
이 손끝에서
많은 사람들 포만하여 행복했을까
내 아직 푸른 수액은
어떤 혈관으로든 타고 흐를 수 있을까
찬밥덩이처럼 굳은 가슴 언저리
떨림도 없이 또 몇잎
떨구는 까칠한 줄기 쓰다듬으며
다독이듯 내내 쓰다듬으며


창작과 비평 제 4회 신인 시인상


절골/송진권



고종내미 갸가 큰딸 여우살이 시킬 때 엇송아지 쇠전에 넘기구
정자옥서 술국에 탁배기까정 한잔 걸치고 나올 때는 벌써 하늘
이 잔뜩 으덩그려졌더랴 바람도 없는디 싸래기 눈이 풀풀 날리
기 시작혔는디 구장터 지나면서부터는 날비지 커튼 함박눈이 눈
도 못 뜨게 퍼붓드라는구만


금매 쇠물재 밑이까지 와서는 눈이 무픞꺼정 차고 술도 얼근히
오르고 날도 어두어져오는디 희한하게 몸이 뭉근히 달아오르는
디 기분이 참 묘하드라네 술도 얼근허겄다 노래 한자락 사래질
꺼정 해가며 갔다네 눈발은 점점 거치고 못뚝 얼음 갈라지는 소
리만 떠르르하니 똑 귀신 우는 거거치 들리드라는구만


그래 갔다네 시상이 왼통 허연디 가도 가도 거기여 아무리 용을
쓰고 가두 똑 그 자리란 밝고 뺑뺑이를 도는겨 이러단 죽겄다 싶
어 기를 쓰며 가는디두 똑 그 자리란 말여 설상가상으로 또 눈
이 오는디 자꾸만 졸리드랴 한걸음 띠다 꾸벅 이러면 안된다 안
된다 하믄서두 졸았는디


근디 말여 저수지 한가운디서 누가 자꾸 불러 보니께 웬 여자가
음석을 진수성찬으로 차려놓고 자꾸 불런단 말여 너비아니 육포
에 갖은 실과며 듣도 보지 못한 술냄새꺼정 그래 한걸음씩 들어
갔다네 눈은 퍼붓는다 거기만 눈이 안 오구 훤하드랴 시상에 그
런 여자가 옶겄다 싶이 이쁘게 생긴 여자가 사래질하며 불런께
허발대신 갔다네


똑 꿈속거치 둥둥 뜬 거거치 싸목싸목 가는디 그 여자 있는 디
다 왔다 싶은디 뒤에서 벼락커튼 소리가 들리거든 종내마 이놈
아 거가 워디라고가냐 돌아본께 죽은 할아버지가 호랭이 커튼 눈
을 부릅뜨고 지팽이를 휘두르며 부르는겨 무춤하고 있응께 지팽
이루다가 등짝을 후려치며 냉큼 못나겄냐 뒤징 줄 모르구 워딜
가는 겨


얼마나 잤으까 등짝을 뭐가 후려쳐 일어서 본께 당산나무에 쌓
인 눈을 못 이겨 가지가 부르지며 등짝을 친겨 등에 눈이 얼마
나 쌓였는지 시상이 훤한디 눈은 그치고 달이 떴는디 집이 가는
길이 화안하게 열렸거든 울컥 무서운 생각이 들어 똑 주먹 강생
이 거치 집으로 내달렸다는디 종내미 갸가 요새두 당산나무 저
티 가믄서는 절해가며 아이구 할아버지 헌다누만




제5회 계간 [창작과 비평] 신인상 당선작 / 2005년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 김성대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날마다 나비의 무늬를 읽으면서
서부음악을 듣습니다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채식을 주로 하는 편이지요
우연히 상추에 붙은 나비 알을 먹고 나선
나도 모르게 뒤꿈치가 들려요
그럴 땐 빠리나 서귀포가 생각납니다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어떤 날은 터널이 계속 이어지기도 하지요
터널 저쪽엔 비가 오기를 바라지만
터널 그리고 터널, 뿐이지요
물잠자리의 날개와 독버섯의 얼룩이
눈앞에서 맴돌아요 그럴 땐
아주 먼 옛날이야기를 듣고 실어집니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책방에 갑니다
거기서 사랑의 묘약을 찾은 적이 있어요
부끄럽게도 마음이 설레었던 거지요
그렇지만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는 걸 믿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박쥐들과 부릅뜬 부엉이들이
나의 행운을 뜯어먹으러 달려들 거예요

가끔 꿈속에서 운 날이 아침은 눈이 맑습니다
그럴 땐 눈 위에다 예쁜 나비를 새기고 싶어요
눈꺼풀을 깜빡일 때마다 날개가 접혔다 펼쳐지겠지요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언제 한번 놀러 안 오시겠어요?

*고야의 판화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