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의 수난기
심은섭
파꽃에 벌들이 모여 꿀파티를 하고 있다 만개한 사과나무도 수정을 서두르고 있다 재래시장으로 나갈 채비를 마친 쑥갓의 입술엔 나비가 한창이다
모두가 텃밭에 모여 생의 천을 짜는 오후
007가방을 든 먹구름이 텃밭으로 떼지어 몰려와 푸른 지폐를 난사한다 그로부터 담장을 기어오르던 강낭콩이 회색빛 얼굴로 황급히 교회당으로 몸을 숨기고,
하늘을 찌를 듯한 굴뚝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연신 검은 교만을 뿜어낸다 그 교만을 마신 풍뎅이들은 입술에 돋아난 물집 몇 채를 들고 변두리로 이주했다
그로부터 하늘에 더 이상 달이 뜨지 않았다
-출처 : 2022년 《심상》 8월호
심은섭 시인
〈악력〉-심은섭
- 2004년 『심상』으로 등단
-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 시집, 『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2009),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2021) 외
- 평론집, 『한국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2015). 『상상력과 로컬시학』(2021) 외
- 2008년 「제1회 5,18문학상」 수상
- 2022년 「제22회 박인환문학상」 수상
[시작노트]
성하의 계절이다. 연일 붉은 수은주가 상한가를 친다. 사람들은 용광로 같은 삼복더위를 선택의 여지가 없이 보내야 한다. 이 여름을 통과하지 못하면 가을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지난날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무더위의 고통은 필연적이다.
우리는 한 겨울의 추위 속에서 4월의 따뜻함을 깨달고, 8월의 뜨거움 속에서 10월의 서늘함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한 계절을 맞이한다는 것은 깨달음을 얻는 일이다. 8월의 뜨거움 속에서 몸을 익혀야 그 익은 몸으로 겨울을 날 수 있다.
시인에게는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것이 또 있다. 시는 고독이다. 시의 고독은 시인의 고독이다. 시는 깊은 상처의 고독이다. 그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가 시작(詩作)이다. 시를 쓰지 않는 것은 시의 고독을 방관하는 일이며, 시인 자신을 방치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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