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발표작

나는 지금 너무 어지럽다 / 이은봉

자크라캉 2009. 1. 22. 12:36

 

 

사진<Risky Life>님의 블로그에서

 

 

는 지금 너무 어지럽다 / 이은봉
 
                                    
고속열차를 탄다 고속열차 속에서는 누구도 속도를 느끼지 못한다 시속 250km로 달려가면서도 나는 시를 쓰고 퇴고를 한다
 
속도는 시간을 느끼는 일! 시간은 어디에 있는가 속도 속에는 시간도 없고 속도도 없다
 
속도가 없는 속도의 시대다 속도 속이 가장 안전한 시대다 속도 속에 있지 못하면 누구도 불편하다 어떤 영혼도 속도 밖에서는 초조하다
 
비행기를 탄다 비행기 속에는 속도가 없다 시속 700km로 날아가면서도 나는 조용히 시집을 펴들고 읽는다 
 
지구는 객실이 딸린 핵폭탄이다 얼마나 빨리 도는지 창밖이 뿌옇다 머지않아 꽝하고 터질 것만 같은 핵폭탄!
 
핵폭탄에 타고 있지 못해 나는 안절부절 못한다 핵폭탄에 타고 있으면서도 타고 있지 못하다고 믿는 나는 지금 너무 어지럽다.     

 

 

<정신과 표현> 2009년 1-2월호
 
[감상]


한 마디로 속도 불감증에 대한 고발과 자기반성의 시다. 오늘날, 온갖 불감증이 문제다. 윤리 불감증을 비롯하여 수없이 많은 불감증에 우리는 둘러싸여 살고 있다. 심지어는 감동 불감증까지 걸린 세대가 오늘날 우리들이다. 그걸 시인은 걱정하여 각성을 촉구하는 마음으로 이런 시를 쓰고 있다. 시속 몇 키로로 지상을 달리고 하늘을 나는 고속열차와 비행기. 그 안에서 시를 쓰고 퇴고를 하고 편안히 시집을 펼쳐 읽는 시인의 초상은 오늘날 우리 모두들 자신이다. 

 그러나 그런 속도 속에 있지 않으면 불안감을 느끼는 우리들의 너무나도 뻔뻔스러운 익숙함에 문제가 있다. <속도 속에는 시간도 없고 속도도 없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의 근본주장이다. 속도와 시간이 한 가지라는 개념 말이다. 헌데 더욱 문제는 우리 자신이 지금 지구라고 하는 핵폭탄 안에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더욱 큰 문제는 <객실이 딸린 핵폭탄>인 지구라는 열차를 타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은 정작 핵폭탄에 타고 있지 못하다고 믿는 우리 자신들의 눈감은 인식이 문제다.

 어쩌겠는가? 그러니 <지금 너무 어지>러울 수밖에! 큰일은 큰일이다. 그런데 더욱 더 큰일은 거기에 대한 아무런 방책도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이나마 각성을 촉구해주는 혜안을 지닌 시인 한 사람 있어 조용한 목소리로 외쳐주니 그만이라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인가. 지혜로운 시인이여, 부탁하노니 우리 다같이 이 빛나고 아름다운 지구라는 생명의 별에서 더욱 오래 동안 평화롭게 머물러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주시라!

 

(2009.1.14  나태주 선)
 

'문예지발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침반 / 차주일  (0) 2009.01.30
이른 봄 / 고은  (0) 2009.01.22
웃음 부의(賻儀) / 조성국  (0) 2009.01.22
매화민박의 평상 / 백상웅  (0) 2009.01.22
얼음조각은 상처를 보이지 않는다./ 구재기  (0) 2009.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