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 대한 저작권은 박종헌님에게 있습니다-
문학적 삶의 향기
가시적 현상에만 관심을 두었던 사람들에게 문학은 천하에 '쓸데없는 것'에 지날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가시적 가치에 빠진 사람에게 유용한 것과 무용한 것을 구분 짓게 마음을 가르친 것이 다름 아닌 문학임을 깨달아야 한다.
생떽쥐베리는 '어린왕자'의 입을 빌어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문학은 바로 이 '마음으로 보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은 선과 악을, 유(有)와 무(無)를 느끼게 한다. 진실과 거짓을 알게 하는 그릇이며 자신의 삶을 인간답게 고양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인류가 만든 창조물 중에서 가장 고차원적인 문화는 예술이다. 이 예술 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갈래가 바로 문학이며, 그 중에서도 시를 문학이란 범주 속에서도 첫머리에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시가 가지는 체험적 요소 때문이다.
오늘날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산문보다 운문인 시를 더 어렵다고 인식하는 것은 삶의 체험 부족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Ⅰ. 문학은 체험의 세계
1. 체험이 없는 언어 교육에 대한 반성
어린이의 사고력은 언어의 습득과 문자의 해독력(해석과 반응)에 의해 형성되며, 언어의 습득과 해독력은 체험된 정서와의 결합에 의해서만 자기 것으로 확정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육 환경은 정서적 체험을 너무 등한히 하고 있다.
책상에 앉아서 봄을 느껴야 하며, 도시의 한 켠에 살면서 실제 삶과 거리가 먼 농촌과 공장 지대를 익혀야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봄의 정서를 체험하기도 전에 봄이 오면 나비가 날아야 한다고 강요한다. 농약의 피해 때문에 메뚜기가 없어도 들판에는 메뚜기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 정서적 체험과는 거리가 먼 교육 현실 속에서 문학은 설 자리를 마련하기 어렵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로 시작되는 국어 교과서를 책상 위에서 읽으면서 어떻게 '펄럭인다'는 단어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들판에 나가 뺨에 스치는 온기를 경험한 후에 '따뜻하다'의 의미를 알고,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보고 '펄럭인다'와 '나부낀다'의 어감 차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이렇듯 체험적 정서와 결합될 때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봄에는
꽃들이 아름다워요.
여름에는
푸른 그늘이 시원하지요.
가을에는 단풍이 물들어요.
겨울에는
눈을 맞아요.
이 글은 행과 연을 갈라 놓았다. 그래서 동시처럼 보이지만 시가 가져야할 상상이나 정서적 체험이 전혀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즉,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만 벌여 놓았을 뿐 자기의 느낌이나 생각이 없다. 내용이 있는 시를 쓰려면 소재가 무슨 생각을 하는가를 곰곰 생각하고 들여다 보아야만 한다.
나무곁에 섰노라면
도드랑 도드랑
어머님의 다듬이질 소리가
들린다.
손광세 <나이테> 중에서
이렇듯 사물을 향한 관찰력과 관심, 그리고 사물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시의 씨앗을 제대로 키워낼 수 있는 것이다.
나무꾼이
나무를 베러 온다.
'아이 무서워'
나무꾼이
차츰 가까이 온다.
'제발 제발…….'
벌벌 떨고 있는 나무.
'휴우-.'
나무꾼이 지나가자
나무는 한숨을 쉰다.
또한 감정의 전이(轉移)를 통해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되어야 자연에 대한 애정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인화의 수법은 동시에서 많이 사용되는데, 이 동시에서는 유치함이 지나쳐 웃음을 짓게 한다. 의인화의 방법을 시에서 사용할 때는 생각이 단순해질 염려가 있으므로 유의해야 한다.
2. 체험된 정서와 구체어
체험된 정서와 결합된 언어는 대개가 구체어이다. 그러나 개념어(관념어)도 구체적 체험의 추상화 과정에서 얻어진다. 체험되지 않은 것은 상상되지 않듯이 구체어의 내면화 없이는 어떤 추상어도 자기의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체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말이 있다. 이때의 사랑은 정서적 느낌을 뜻하며, 이 또한 체험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적 정서는 소재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관심 속에서 관찰과 상상에 의해 비로소 구체화 된다.
가. 체험의 구체화
1) 소재의 특성 살피기
시의 소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책, 연필, 선생님, 나무, 하늘 등등 눈에 띄는 모든 사물과 인식할 수 있는 추상적 개념인 슬픔, 사랑 등등이 모두 시의 소재가 된다. 그러나 소재는 배추밭에 있는 배추일 뿐 김치가 되지는 못한다. 즉 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소재가 없다', '무얼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이 수많은 소재를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가 보다 중요한 행위다. 이를 우리는 시상(詩想)이라고 한다.
이러한 시상을 잡기 위해서는 소재의 특징이 무엇인지 잘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소재의 특성에 대한 관찰과 인식은 시의 표현과 직접적 관계를 갖는다. 즉, 시인의 눈은 과학자의 눈을 닮아야 하고, 마음은 엄마의 마음처럼 모든 것에 사랑을 기울일줄 아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연아, 보이니?
이라크에 가 계신
아버지의 모습이.
어디에 계시는지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이.
연아,
넙죽넙죽
내 대신
부모님께
새해 인사 드려다오.
안태민 <연> 중에서
이 동시는 연을 날리며 연의 움직임과 특성을 잘 살펴보고 자신의 마음을 의탁하고 있다. 연은 하늘 높이 난다. 그것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연만의 특징이다. 그리고 연줄을 당기고 놓을 때마다 연이 고갯짓을 하는 것을 새해에 드리는 세배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짧은 시 속에서도 어머니가 집을 나가시고, 아버지는 열사의 사막 이라크로 돈을 벌러 가신 것까지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2) 소재는 내게 무엇인가?
소재는 단순한 시의 재료가 아니라, 그 소재를 선택했다는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고많은 소재들 중에 '왜 내가 그 소재를 선택했느냐?'는 것은 이미 소재와 나와의 어떤 관계가 있었기 때문임을 직시해야 한다. 길을 가다 돌부리에 발이 채였을 때 그냥 '아이구, 발이야. 재수 더럽네' 라고 뱉어버리면 돌멩이와 나와의 관계는 부정적이고도 의미없는 관계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어? 이 돌멩이가 왜 여기에 있지?'라고 의문을 가지고 관심을 가진다면 이미 그 돌멩이는 예사 돌멩이가 아닌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소재를 보면서 자신과 관계 속에서 다양한 사고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는 곧 은유다' 라고 20세기 신비평 그룹의 클리언스 브룩스는 그의 저서 <잘 빚은 항아리>에서 말한다. 이러한 비유는 바로 사물과 나의 관계 맺음 바로 그것이다. 다음의 노래에서 쓰인 '과꽃'은 단순히 꽃밭에 핀 꽃이 아니다. 과꽃은 누나가 좋아한 꽃이기에 의미가 있다. 원관념은 과꽃이지만 보조관념은 누나가 좋아한 꽃으로 환유(換喩)의 방법이다. 과꽃을 소재로 선택한 시인에게 그 꽃은 그리운 누나를 상기시키는 꽃이다. 누나를 떠올리게 하는 꽃이기에 선택된 것이다. 이런 의미의 전이과정은 시창작의 기본이 된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어효선 <과꽃> 중에서
여기에서 '나-과꽃-누나가 좋아함-누나에 대한 그리움'의 등식으로 성립되는 관계성이 없는 소재를 택했다면 이 시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게 된다. 관계성이 없는 소재의 나열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봄에는
꽃들이 아름다워요.
여름에는
푸른 그늘이 시원하지요.
처럼 형식만 시가 된 작품이 되고 만다. 당연한 사실만 가지고 시를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 체험의 표현
독서는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책에는 작가의 세계관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이때의 독서는 단순히 글을 소리내어 읽는 능력과는 구별된다. 예를 들면,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를 /이근 벼가 고개를 수긴다./로 읽기에 그치는 것을 판독이라 하고, '여문 벼는 낟알이 무거워져 이삭이 수그러든다.'로 읽으면 이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생각이 깊은 사람이나 된사람일수록 겸손해진다.'로 읽으면 해석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석된 것에 대하여 판단, 평가, 감상, 행동 등을 보이는 것을 반응이라 한다.
독서는 이와 같이 '이해', '해석', '반응'을 아우르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체험된 정서와의 결합에 의한 언어의 습득이 전제되지 않고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고등 교육 과정을 마친 사람들이 책읽기를 두려워하는 것도 모두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도의 사고력이 발달하지 못 했다는 것이다. 사고력은 또한 언어에 의해서만 길러지게 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 이라 말한다.
사고력을 향상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은 표현력의 신장이다. 글로써 또는 말로써 자신의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어휘만큼만 사고할 수 있고, 또 그만큼만 표현할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구체적 체험을 가지고 있지만 그 체험을 추상화할 수 있는 능력은 모두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체험의 추상화(개개의 경험을 개념화하는) 과정은 많은 느낌의 정서들을 일정한 언어로 적확하게 규정짓는 행위다. 표현이라는 것도 결국은 떠오르는 생각의 편린들을 자신의 언어로 규정짓는 행위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언어의 내면화가 이루어졌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체험에 의해 구체어를 습득하고, 표현(글쓰기)을 통해 개념어(관념어)를 자기화한다.
㉮ 오늘 아침 등교길에 여학생을 만났어.
㉯ 오늘 아침 등교길에 아주아주 기막히게 예쁜 여학생을 만났어.
㉰ 오늘 아침 등교길에 굉장히 아름다워서 말로 표현 못할 미인형의 여학생을 만났어.
㉱ 오늘 아침 이슬 맺힌 목련꽃 가지사이로 백합꽃 같은 여학생이 나에게 눈웃음을 보냈어.
위의 문장 중에 구체적 경험과 자기의 내면화가 이루어진 문장은 당연히 ㉱문장임은 쉽게 알 수 있다. 다양한 체험적 어휘의 사용과 상황에 따른 필자의 내면화가 아주 구체적이어서 우리는 더 이상의 의문 없이 여학생의 청순함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표현이 생득적인 것은 아니다. 자신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고하게 알고 있는 상태에서 보다 잘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 같은 표현이 연습에 의해 길러질 수는 있으나 한 편의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으려면 지은이의 진솔한 감정 표현이 앞서야 한다는 사실이다.
詩語
말은 단순한 부호가 아니다.
'하늘'하면 저 하늘이 지닌
모든 신비를 그 말이 담고 있고
'땅'하면 이 땅이 거느리고 있는
모든 사물을 그 말이 담고 있는니
그래서 낱말 하나하나가 소우주(小宇宙)다.
말은 지시 기능만을 지닌 게 아니라
미묘한 정서 기능을 지니고 있다.
'어'해 다르고 '아'해 다르다지 않는가.
어순(語順)과 어조(語調)의 강약과 고저 장단에 따라
그 말의 감응과 감동은 전혀 달라지느니
그래서 시의 말은 걸음이 아니라 춤이요,
춤맵시처럼 아름다운 말씨만이 되풀이된다.
말과 생각과 느낌은 둘이 아니다.
우리는 말로써 사물을 포착한다.
그래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요,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의 깊이와 넓이가
그 말의 깊이와 넓이를 결정한다.
시는 말의 치장술이 아니다.
아무리 말이 번드레하고 교묘하더라도
그 말에 담겨진 진실이 없으면
그 말이 가슴에 와서 닿지 않으니
시의 표상(表象)도 실재가 수반되지 않으면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시인이여, 그대들은 기어(綺語)의 죄를 범하여
저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던져질까 두려워하라!
구상 <詩語> 전문
괜한 말로 어렵게 만들고, 시(詩)인양 으스대다 '저 무간지옥으로 던져질까 두려워하라!' 는 구상 시인의 말씀이 우리에게 용기를 주지 않는가?
Ⅱ. 시를 어떻게 읽은 것인가
1. 올바른 시 감상을 위해
올바른 시를 쓰기 위해서는 우선 다른 사람의 시를 많이 읽어야 한다. 그것이 한 시인의 시집이든, 문학 전문지에 실린 시이든 먼저 많이 읽고 시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시를 읽고 즐길 수 없다면 시창작은 의미가 없다.
시는 누구나 쓸 수 있다. 특히 고등학교 학생과 같은 청소년 층은 그 자신이 바로 시인이다. 자연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고, 사회적 현상을 보면서 분노하거나 함께 즐거워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는 시를 쓸 충분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시를 어떻게 읽느냐는 것이다.
<진달래꽃>은 고등학생의 수준에서도 이해하기가 비교적 수월한 작품이다. 그러나 교과서나 참고서의 내용풀이를 보면 그게 아니다. 고등학교 시험을 위해 <진달래꽃>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항을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
1) 이 시는 전통적 시 형식인 시조, 전통적 가악인 창 등의 정형성 속에서 식민지 상황이라는 현실을 직시할 한국인만의 새로운 시 형식을 탐구한 것이다.
2) 이 작품에 나타나는 한의 정서는 일제시대라는 상실의 시대 고민을 표현하는 현실인식, 즉 조국을 상실한 고통의 환기로 이해되기도 한다.
3) 민중의 삶의 진실과 맥락을 같이하여 혼과 한이라는 뿌리를 민족적 삶에서 이해할 수 있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4) 이 시는 불교적 산화공덕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유교적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5) 이 시는 원망을 초극한 자기희생적 사랑을 주제로 한다.
6) '즈려 밟고'는 근육감각적 이미지로서 근육감각적 희생의 심상을 보여준다.
7) 인고의 의지를 통한 자기극복과 슬픔의 의지적 승화로서의 애이불비(哀而不悲)한 화자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8)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7.5조의 3음보에 담아내어 읽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9) 화자가 이별을 기정 사실로 인정하고 떠나가는 님을 위해 진달래꽃을 뿌리며 죽어도 울지 않겠다고 입술을 꼬옥 깨무는 여인의 마음에 공감을 가진다.
등등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이 시를 제대로 올바르게 감상했다고 판단(평가)해야 한다는 게 우리의 시감상 현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쓸만한 감상은 8,9번 정도가 아닐까? 위의 감상들 처럼 시가 어렵다면 차라리 시감상을 포기하는 게 낫다 싶다.
얼마 전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감상하고 감상문을 400명의 학생에게 쓰도록 시킨 적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의 모든 학생이 위에 나열된 시평을 자신의 감상처럼 가져다 쓰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나도 한 번 그런 여자와 연애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고 쓴 학생이 없었다. 이렇게 볼 때 <진달래꽃>은 문학의 효용성이란 측면에서 보면 빵점자리 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문학의 힘이 전무한 상태의 생명 없는 박제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 대중가요의 노랫말에 대한 반성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스타는 당연히 대중가수와 스포츠맨이다. 청소년들은 스타를 선망하는 이유에 대해 '화려한 생활과 경제적 부'를 서슴없이 든다. 자본주의의 병폐가 그대로 청소년들에게 옮겨지고 있다. 물론 스타에 대한 선망을 뭐랄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그리는 모델이 있을 수 있다. 다만 스타의 범주가 지나치게 한정적이란 점이다. 흑인 차별에 대한 반대 운동을 하다 암살당한 마틴 루터킹을 선망하던가, 민중의 해방을 위해 쿠바의 밀림에서 죽어간 체 게바라를 동경하던가 하는 등의 폭넓은 스타의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시창작 시간에 스타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대중가수들이 부르는 대중가요의 대부분이 문학에서 말하는 시와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청소년들은 시를 쓰는데 시가 아닌 대중가요의 가사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시창작에 미숙한 그들에게는 시와 가사의 구분이 어렵고, 쉽게 접할 수 있는 가사를 시로 오인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현상은 시감상의 깊은 맛마저 말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거나, 아얘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을 요구하게 하거나, 아니면 시는 난해하고 고답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말게 한다.
어떤 가수 이름만 들면, 그가 언제 데뷔했고 어떤 음반을 냈으며, 어떤 종류의 노래인지 줄줄이 꿰뚫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청소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대중가요의 가사가 시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해 준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일까? 그러나 불행히도 가요의 가사가 시의 위치까지 다다른 작품은 별로 눈에 띄지 않고 있다.
몇 년 전 송창식이란 가수가 미당 서정주의 <푸르른 날>이란 시에 곡을 붙여 부른 것은 대중 가요의 품격을 높여 보려한 바람직한 시도였으며, 7,80년대의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민중가요로 부른 많은 노래들이 김지하, 문병란 시인들의 작품을 가요와 접맥시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이러한 노력도 사라지고 있어 안타까움이 크다.
알아 내 모습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오랜만인데 날 대하는 니 표정엔
알 수 없는 어색함에 내가 먼저 웃어도 점점 더 어려워져
바쁜 나의 생활에 나도 지쳐 있어 부탁이야 날 믿어줘 제발
그런 식의 니 표현을 난 알아 지금 니 모습이 더 초라하다고 느껴선걸
내 친구야 외로워마 니곁엔 내가 있잖아 이젠 나를 향해 닫았던 니 마음 열어줘
고마워 니 충고 거만해진 날 느꼈고 작은 내 실수가 날 멍들게 한다 했지
변하는 내 모습이 너의 눈에 비춰져 그럴 땐 정말 힘들어
바쁜 나의 생활에 나도 지쳐있어 부탁이야 날 믿어줘 제발
그런식의 니 표현을 난 알아 지금 니 모습이 더 초라하다고 느껴선걸
내 친구야 외로워마 니곁엔 내가 있잖아 이젠 나를 향해 닫았던 니 마음 열어줘
임창정의 노래 <날 믿어줘>
여기서 우리는 언어 사용의 가장 초보적 단계를 접하게 된다. 언어의 지시적 기능만으로도 만족스럽고, 언제 비유니 상징이니 따질 게재가 없는 직설적 표현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의 연애방식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부처님이 제자 가섭에게 말없이 내민 연꽃 한 송이나, 풀꽃 한 송이를 책갈피에 끼워 말려서 내어미는 은근함이 없다, 바꾸어 말해 시적(詩的)인 삶이 없다는 것이다.
시적인 삶을 잃어버린 채, 건조한 삶을 살면서 학교에서 학생들이 쓰는 대부분의 시들은 행가르기와 연나누기로 형식만 갖추고 있을 뿐 직설적 감정의 토로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런 현상은 그들이 익숙하게 듣고 따르는 대중가요의 모습 바로 그대로이다. 대중가요의 흐름과 언어사용의 방법을 학생들이 그대로 모방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가요의 노랫말을 '가사(歌詞)'라 하지 시(詩)라고 하지 않음을 깨달아야만 한다.
3. 대중가요의 가사와 시
현대시는 메타포(metaphor)에 의해서 생명력을 발휘한다. 시는 살아있는 새로운 의미를 형성시킬 때 그 존재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시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언어를 가지고 새로운 형상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남이 쓴 시를 흉내내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메타포는 은유이다. 은유(隱喩)는 비유의 한 방법이다.
a. 알아 내 모습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오랜만인데 날 대하는 니 표정엔
알 수 없는 어색함에 내가 먼저 웃어도 점점 더 어려워져
바쁜 나의 생활에 나도 지쳐 있어 부탁이야 날 믿어줘 제발 (직서적 표현)
b. 장미와 같은 소녀 (직유)
c. 장미 소녀( 은유)
여기서 a는 직접 서술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모습이며 어떤 표정인지는 당사자 두 사람 이외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b, c는 짧은 구절이면서도 소녀가 어떻게 아름다운가를 알 수 있다. 즉, 효과적이면서도 경제적 언어 사용을 통해 소녀의 아름다움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는 노래로도 널리 불리워진 <시>이다. 시가 먼저 발표되고 여기에 곡을 붙인 것이다. 임창정의 <날 믿어 줘>와 무엇이 다른가? <엄마야 누나야>의 2,3행이 바로 <날 믿어 줘>와 다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왜 시인은 어린 남자아이라고 생각되는 시적 화자를 내세워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라고 쓴 것일까?
'엄마, 누나 우리 강변에서 살자 /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고 / 뜰에는 금빛 모래가 있고, 뒷문 밖에는 갈대가 흔들리는 곳/ 엄마야 누나야 강변에서 우리 행복하게 살자' 고 쓰지 않은 것일까? 아무래도 하고싶은 이야기를 모두 다 해버리면 맛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시는 가장 경제적인 문학 장르다. 시의 특징은 여기에 있다. 시어(詩語)는 비유와 상징이란 언어의 고차원적 기능을 주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의 언어 즉, 시어는 머리로 쓴 일상적 언어(지시적 의미)가 아니라 시인의 가슴속에서 용해된 언어로 일상적 언어가 가지는 지시적 의미 이외에 플러스 알파(α)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는 시인이 자신의 주관적 체험을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문학적 진실이란 의미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 계절의 변화에 대한 느낌을 적어 보자>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네→ 초등학생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네→ 중학생
잎이 지고
가을도 지네 → 고등학생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 시인(서정주 '푸르른 날') *이낭희 지음 <0교시 문학시간>에서 인용
로 언어 사용의 방법이 다르게 나타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언어의 비유적(상징적) 특징을 살려 쓰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달린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와 상징이란 문학적 장식을 독자가 바르게 이해하려면 '동질의 체험'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아무리 훌륭한 비유와 상징이라도 시를 읽는 독자가 공감(체험을 동질화)할 수 없다면 그 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뭔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는 글'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시를 읽는 독자 자신이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고, 인생을 다양하게 살아 보았을 경우에는 시의 이해도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17살의 고등학생이 40,50세의 시인들이 쓴 시를 바르게 이해하기는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다. 만약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는 조숙한 '문학 청소년'이다. 따라서 학교의 수업시간에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참고서에 쓰여진 <시감상>을 읽고서 자신의 감상인양 착각에 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자신의 감상이 아니다. 자신의 경험 세계 속에서, 자신의 삶의 폭 만큼 시를 이해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닐까? 시험문제에 주눅들어 시 읽기를 기피하거나 문학에 진절머리를 칠 필요가 없다. 아는 것만큼 보면 되고, 보이는 것만큼 알면 된다. 나이가 들며 세상살이를 하다보면 자연히 경험의 세계도 넓어질 것이며, 시를 이해하는 안목도 깊어지게 된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빚어 놓은 시의 세계에 빠져서 공감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공감해 보려는 행위는 곧 상상을 통한 시인과의 동질화이다.
접어 보고
펼쳐 보아도
팍팍한 산길,
내 유랑의 大東輿地圖.
민 영<손금歌> 전문
이 시를 읽으면서 저절로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아하, 정말이구나' 하는 감탄사를 내뱉게 하지 않는가? 바로 이것이 시의 상징이고 비유이며 시의 특징이다. 태어나 살면서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보지만 결국은 후회와 연민에 젖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또한 그 인생은 고통과 절망의 날들이다. 우리의 삶을 이야기로 한다면 소설 한권을 능히 될거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아무리 소설 한 권으로 적어도 다 말할 수 없는 나의 인생, 그러나 여기 단 넉 줄의 시로 함축해 내고 있지 않은가?
4. 시 감상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문학은 문학만을 위한 문학도 아니며, 인간만을 위한 문학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는 무지(無知)와의 싸움을, 의미론적인 차원에서는 인간의 꿈이 갖고 있는 불가능성과의 싸움을 뜻한다. (생략)… 문학은 동시에 불가능성에 대한 싸움이다. 삶 자체에 쫓기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유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꿈꿀 수 있다. 인간만이 몽상 속에 잠겨들 수가 있다. 인간의 몽상은 인간이 실제로 살고 있는 삶이 얼마나 억압된 삶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불가능한 꿈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삶은 비천하고 추하다.
―김현, <전체에 대한 통찰>에서
임께서 부르시면
신 석 정(辛夕汀)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0 주제 : 목가적인 전원생활에 대한 그리움
0 형식 : 4연의 자유시
0 경향 : 서정적, 목가적
0 표현상의 특징 : 자유시이기는 하나 각 연의 끝을 "그렇게 가오리다 / 임께서 부르시면 ……"의 2행으로 맺음으로써 정형시와 같은 구성으로 되어있다. 또한 경어체나 설의법(說疑法)으로 시의(詩意)를 강조하여, 자연을 찬미하는 한국 최초의 전원시인 신석정의 시풍(詩風)을 짐작할 수 있다.
0 감상 : 이상적 전원 세계의 동경이 자연스러운 발상에 의거, 환상적으로 엮어진 초기작품의 걸작이다. <동광> 제24호(1931. 8)에 발표되고 시집 <촛불>(1939)의 허두를 장식한 이 작품은 각 연마다 아주 신선한 이미지가 제시되고, 쉽고 평이한 시어의 선택이 한결 무리없는 시적 가락을 느끼게 한다. '은행잎', '초승달', '물', '햇볕'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은혜 속에서 보람있는 삶을 얻고자 하는 소망이 새로운 감각과 인상적 수법으로 참신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홍윤기<시창작법> 1993, 한림출판사 pp. 468-470.
홍윤기 교수가 쓴 <시창작법>에 쓰인 시 감상법이다. 먼저 주제를 알고 형식과 경향을 알고 표현상의 특징을 알고 나서 감상을 적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느낀 것이 아니라 필자가 느낀 것을 이처럼 느끼라고 강요한다고나 할까? 지식은 있어도 느낌이 없다. 감상은 지식이 아님을 알면서 모든 시 감상을 이렇듯 재단(裁斷)하고 있다. 마치 고등학교 참고서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임께서 부르시면 가겠다'고 분명히 몇 번씩 외치고 있는대도 주제는 '전원생활에 대한 그리움'으로 적고 있다. 목가시인이기에 그의 시를 전원생활과 연결 짓다보니 나타난 잘못이다. 조용히 자연의 삶대로 순리대로 살다가 님이 부르시면 나도 님이 계신 곳으로 은행나무 잎이 떨어져 가듯, 초승달이 서산으로 사라지듯 삶의 순리를 쫓아가겠다는 삶에의 순응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도식적이고 기계적 시 감상은 올바른 감상이 아니다.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먼저 작품의 외적인 상황들, 예컨대 작품이 쓰여진 문 학적 배경을 모두 제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품에 대한 이해로 들어가는 정형화되고 일 반적인 접근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 작품의 배경 지식을 동원한 접근 방법이 작품에 대한 보다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감상에 오히려 역효과를 줄 수도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전자의 방법보다는 개별적인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감상을 통해 작품의 배경과 상황을 유추하는 귀납적 접근이 문학을 보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감상할 수 있으며, 문학을 즐기는방법이 된다.
시를 감상할 때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이상화(1901∼1943)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나타나는 '들'은 터전, 또는 좀더 의미를 확장시켜서 현실일 텐데, '빼앗긴'이란 수식어가 들어있다. 그렇다면 의지와 다르게 잃어버린 터전. 어두운 상황이다. 봄은 우선 계절로서의 봄인데 여기서 의미를 확장시켜 보면 봄은 어떤 속성을 갖는가? 겨울을 지내고 오는 봄. 절망 속의 희망. 아마도 '어두운 현실 속의 생명 같은, 희망 같은 봄'을 꿈꾸는 시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장승진)
문학작품의 접근 방법은 크게 내재적 접근 방식과 외재적 접근 방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2분법은 편의적 구분일 뿐이며, 별개의 것이 아니다. 앞서 이해한 방법은 내재적 접근을 통해 제목을 이해한 것이지만, 외재적 접근을 병행해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보다 더 분명해지는 것이다. 즉, 이상화의 살던 시기는 일제 치하이며,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빼앗은 자는 일제요, 봄은 광복이란 등식이 성립된다. 그러나 이상화가 초기에는 낭만적 기질과 감상적인 풍조를 가진 <백조파>의 대표적 시인이라는 점, 후기에 와서 신경향파의 영향으로 퇴폐적, 탐미적 세계에서 벗어나 경향성이 드러나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와 같은 시를 썼다는 사실을 동시에 이해해야만 한다. 1920년대의 대표적 저항시로 꼽히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바로 이러한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나고 있음을 느껴야하기 때문이다. '식민지 현실을 낭만적인 가락에 실어 정감 넘치게 노래함'이라는 다소 알쏭달쏭한 감상이 그것이다.
둘째, 작품 속 시적 화자의 정서를 읽을 수 있는 중심 시어를 만나 보자.
도시 문명에 대한 현대인의 절망과 비애를 노래한 김광균의 시 <와사등(瓦斯燈)>의 시어들은 '차단-한 등불, 비인 하늘,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 사념(思念) 벙어리, 공허한 군중, 슬픈 신호' 등으로 한결같이 부정적인 수식어들의 꾸밈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 '슬픈 신호'와 '비인 하늘'이 각각 두 번씩 첫 연과 마지막 연에 쓰이고 있다. 이른바 수미상관의 기법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부정성은 시인이 속한 시대와 개인적 심리의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시어의 연결만으로도 시적화자의 정서는 절망과 비애 속에 있으며, 부정적 상황 속에서 어쩌지 못하는 암담함을 공감할 수 있다.
와사등(瓦斯燈)
김광균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高層),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셋째, 중심 시어에서 전체로 정서적 흐름을 확장시키자.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글은 기승전결의 구성법을 따르는데, 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연 나누기를 자유로이 하고 있을 뿐, '감정의 도입, 감정의 발전, 정점, 맺음'으로서의 변화 과정은 일반적 글쓰기와 다를 게 없다. 따라서 시를 감상할 때도 이와 같은 발전 단계에 맞는 감상이 필요하다. 시적화자의 감정을 따라 자신의 감정을 동화시켜 발전시키다 보면 , 작품 속의 주된 정서와 시적 화자의 현실 인식의 변화 등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시적 화자의 현실 인식의 을 간파하여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한 바의 현실 인식의 단면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이 말하고자 한 바의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공감대의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독자의 체험 세계와 시인의 체험 세계가 공유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의 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 원작에는 연 구분이 없으나 편의상 필자가 4연으로 연 나눔을 함)
넷째, 시인의 문학적 입장과 그 변화 과정을 이해한다.
한 편의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하려는 노력과 관심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흔히 내·외적인 접근을 통한 종합적 접근 방식을 사용한다.
<작품에 대한 종합적 접근 방법>
내적인 접근(개별 작품에 대한 내용적 이해와 감상) → 외적인 접근(외적 상황과의 연결 짓기)
① 작가(시인)의 삶과 사상, 문학적 입장과 연결짓는 과정
② 시대적 상황과 연결짓는 과정을 통해 작품의 배경 이해
③ 독자의 삶과 연결짓는 과정으로 자신의 삶 속으로 보다 주체적인 입장에서 '문 학적 체험 끌어 들이기'
신동엽(1930∼1969)은 4.19 혁명에 대하여 남다른 집념을 보인 시인이다. 그를 흔히 [60년대의 대표시인]으로 꼽고 있는 이면에는 4.19 정신의 문학적 성과라는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바로 4.19 정신의 정수로부터 획득한 이념적 힘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여기 <껍데기는 가라>는 4.19혁명의 정신을 왜곡하는 모든 세력을 거침없이 질타한다. 이 꾸짖음은 결국 분단극복의 의지로 확장되고 있다.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시집 {52인 시집}, 신구문화사, 1967)
이 시는 우리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여러 의미 있는 사건들을 바라보던 화자가 허위적인 것이나 겉치레는 사라지고, 순수한 마음과 순결함만이 그것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동일한 시어를 반복 구사함으로써 주제를 강조하고 있는 한편, 행간(行間) 걸림의 수법이나 쉼표의 적절한 사용을 통해 시상이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화자가 없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은 '껍데기'이다. 그런데 화자는 마지막 연에서 '쇠붙이' 하나만을 화두(話頭)처럼 던져 놓고 있을 뿐,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쇠붙이'와, 그와 상반되는 어휘들의 의미를 통해 그것을 추출해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4월 혁명의 '알맹이', 동학 혁명의 '아우성', 혼례청에서 맞절하는 아사달 아사녀의 '부끄러움', '향그러운 흙가슴' 등과 상반되는 개념일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인이 작품에서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4월 혁명의 민주화 열망이 퇴색해 가고, 동학 혁명의 민중적 열망도 소진되어 가고 있는 현실적 여건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아울러 부끄러움도 아름다울 수 있었던 원시인 같은 순수한 마음의 회복과 그 같은 삶을 추구하는 순수성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현실에 대한 거부이다. 그런 화자에게 '껍데기'는 사라지기를 소망하는 대상일 뿐이지만, 17행 중 6행에서 '껍데기는 가라'고 소리칠 정도로 껍데기는 현실 속에 크게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4월이나 동학의 본래 이념과는 다르게 변모해 있는 현실 상황에 대해 화자는 강력한 거부의 몸짓을 '껍데기는 가라'라는 직설적인 표현으로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마지막 연은 이런 상징적 의미를 가장 투명하게 보여 주는 부분이다. 즉, 우리의 국토를 '한라에서 백두까지'라고 말함으로써 분단의 비극적 현실 상황을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이것은 동서 냉전의 부산물로 시작된 분단의 비극이 결국은 동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거쳐 고착화되었음을 상기시켜 주는 한편, 반드시 극복해야 할 민족적 과제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아울러 '모오든 쇠붙이'라는 표현을 통해 현실 상황을 힘의 논리를 앞세운 무력으로 규정함으로써 4월 혁명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군사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한편,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은 참다운 의미의 '인간 세상'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다섯 째, 문학적 체험을 자신의 삶과 밀착시키기
자신의 삶에서 얻은 체험의 시적 승화는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좌우한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대체로 엇비슷한 삶을 살고 있기에 타인의 삶을 마치 나의 삶처럼 공감하게 되고, 독서를 통해 작가나 시인이 설정한 삶에 공감하며 감동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특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랑에 대한 정서는 우리의 보편적 정서로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민족적 정서로 연결된다.
다음의 박재삼 시인의 시 <울음이 타는 가을강>에서 보이듯 친구의 사랑이야기가 곧 시적화자 자신의 사랑이야기로 대치되고, 이는 다시 독자들의 보편적 사랑의 정서를 일깨우게 된다. 누구나 경험함직한 사랑이 이야기가 인생의 이야기로 전이되면서 어느덧 황혼기에 다다른 시적화자는 해저물녘의 가을 강을 보면서 삶의 회한에 젖게 되는 것이다.
울음이 타는 가을강
박 재 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
({사상계}, 1959.)
김혜순 시인의 <서울의 밤>은 서울이란 대도시가 가지는 물신주의의 삭막함을 살아가는 도시인의 외롭고 버거운 삶을 불개미에 비유하고, 끝없는 욕망으로 인해 자신의 모두를 소진(消盡)시키는 인간을 한 마리의 나방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서울이란 도시에서의 시인이 체험은 플라스틱 장미, 몇십 계단, 혼자 불켠 엘리베이터, 가로등에 달라 붙은 나방으로 묘사되고 있다.
서울의 밤
김 혜 순
몇 개의 산맥을 타 넘어야
네게 이를 수 있니
불개미 한 마리가
플라스틱 장미 꽃잎을
한 잎 한 잎 타넘어 가고 있다 몇십 개의 계단을 올라야
잠든 너를 깨울 수 있니
저 혼자 불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온 몸으로 두근거리는 네가
잠든 너의 몸 속을
한밤중 소리도 없이 오르고 있다
어떻게 등불을 빨아 먹을 수 있니
나방이 한 마리
혓바닥을 비늘처럼 곤두세우고
한밤 내 가로등을 찔러보고 있다.
<강철 새 잎>은 노동자 시인인 박노해의 시이다. 고목나무에 새로이 돋는 연약한 잎새를 보면서, 그 잎새가 굳은 나무껍질을 뚫고 돋아나는 장면을 마치 엄혹한 현실을 딛고 일어서 하나되어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며 힘 있는자 앞에서 결코 굴하지 않는 노동자의 삶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육사의 <절정>에서 보이는 '강철 무지개'와 또 다른 세계이다.
강철 새잎
박 노 해
저거 봐라 새잎 돋는다
아가 손마냥 고물고물 잼잼
봄볕에 가느란 눈 부비며
새록새록 고목에 새순 돋는다
하 연둣빛 새 이파리
네가 바로 강철이다
엄혹한 겨울도 두터운 껍질도
제 힘으로 뚫었으니 보드라움으로 이겼으니
썩어가는 것들 크게 썩은 위에서
분노처럼 불끈불끈 새싹 돋는구나
부드러운 만큼 강하고 여린 만큼 우람하게
오 눈부신 강철 새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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