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창작법

시란 무엇인가 -생명의 시학을 위하여 / 김은자 시인, 한림대 교수

자크라캉 2008. 9. 5. 12:13

 

란 무엇인가 /생명의 시학을 위하여  



김은자              
시인, 한림대 교수          

1. 시의 뜻
시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난해하다. 이 문제에
서 몸을 좀 떼고 거리를 유지하고 보면 이 문제는 세상의 흔하디 흔한
질문과 너무나 닮았다. 아니 꼭 같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책이름조차 그렇다. 역사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문학의 이해. 시의 이해. 그러나 수많은 이해를
거치고 무엇이 남는가? 정작 알맹이는 빠진 시가 있을 뿐.(발레리)
시론의 권위자들인 대학의 교수들, 시를 논하는 일로 업을 삼는 논
객들은 물론, 이 질문의 대상인 시를 창조하느 주체인 시인들에세조
차 시느 아득한 그리움이다. 새로운 시를 쓸 �마다 시인은 막막하고
또 막막하다. 다음과 같은 시인의 넋두리를 들어보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김종삼)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되는, 그것
은 다가가면 갈수록 잡히지 않는 신비한 것이다. 마치 인생에 대한
철학서적이 수없이 많은데도, 살아가면 갈수록 막막한 인생살이와 비
슷하다고 할까.
시에 대하여서는 이미 수많은 책들이 국내외애서 쓰여졌다. 그 책
들을 다 읽기에도 이 생이 부족할 지경이다. 제목에 '시'가 나타난 것
만 해도, Poetics, Understanding Poetry, Appreciation of Poetry, How
to Analyze Poetry, La Poetique be Lespace, La Poetique de la Reuerie,
Poetry in the MaKing 등을 들 수 있다. 국내에서도 고전의 여러 시화류
및 수많은 시론, 시학 및 시원론류가 모두 이 문제와 씨름하고 있으며,
그 밖에 문학과 예술 전반 또는 상상력, 언어, 상징, 신화. 비평 등고 관
련된 책까지 들면 엄청난 숫자가 된다. 그러네도 그 씨름판은 또한 지
금도 계속되고 끝나지 않는다.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양의 『시경(詩經)』과 『문심조룡(文心雕
龍)』을 위시하여 수많은 석학들이 골머리를 앓았는데도 계속 이러한
질문이 주어지는 것은. 새로운 시가 쓰여지는 한 이 질문에 대한 답
은 한시적일 뿐 끊임없이 새로이 탐구되어야 하고 쓰여지고 수정되
어야 하는, 미래지향적으로 영원히 열려 있는 문제인 까닭이다.
  시는 언제나 당대를 앞서 가고 시에 대한 모든 논의와 검증은 허겁
지겁 그 뒤를 좇아간다. 시인이 쓴 시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날아간
화살을 찾아 온갖 논리와 분석과 방업론으로 무장하고 달려가서 간
신히 찾은 화살은, 고목둥치에 박혀 있거나 바위에 꺽여 부러졌거나
때로는 어느 곳으로 날아갔는지 종적도 알 수 없는 것이 되어 수십
년 뒤에나 발견될지 모른다.
  논자에 따라 시는 '인생비평'(아놀드)이고, '언어의 건축'(하이데거)
이며, '아름다움의 음악적 창조'(포오), '아름다움과 연민'(나브코프)이
거나, '사우사(思無邪)', 지인정성(持人精性)'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시에 대한 모든 정의는 '오류의 역사'(엘리어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시도는 오류의 세계를 한층 복잡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된
다. 그만큼 이 질문에 답하기는 위험하고 무모하다.
  이 무모함을 덜기 위해 실질적인 문제에의 접근이 필요하다. 왜 우
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 문제를 제기하고 또 논의
할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 과연 시란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인가. 그리
고 바로 이 시점에서 시를 쓰고 읽고 사랑하는 우리에게 시는 무엇
인가. 이것은 시의 위의(威儀)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2. 시의 위의(威儀)ㅡ존재의 길 찾기

    시인은 亭亭한 巨松이어도 좋다.
    그 위에 한마리 猛?이어도 좋다
    굽어보고 高漫하라(정지용)

  정지용은 1939년 「시의 옹호」(문장 5호), 「시의 위의」(문장 10호)라
는 제목의 짤막한 글을 썼다. 그로부터 60년이 가깝게 지난 지금 이
문제를 쳐드는 시인의 마음은 착잡하다. 위의란 아마 지금 유행하는
말로는 위상 비슷한 것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시에, 위상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C.D.루이스는 청소년들을 위해 쓴 글의 첫머리에서 시에 대한 몇
가지 변호를 늘어놓고 있다. ② 그러나 아무래도 궁색하게 들린다. 시인
에 대한 옹호 또한, 그가 쓰는 시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시는 정밀한
과학이 아니면서 신비로운 것이어서, 공식에 맞추어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어떤 새로운 것도, 반도체 기술도, 신소
재 물질도 아니어서 오늘 같은 물질문명 시대에 환영받지도 못하고
특허권을 따서 큰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못 된다.
  수천 년 묵은 이 낡은 것이, 언제나 새롭다. 새롭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살아 있는 존재의 생명, 그 자체의 모습과 닮았다. 전기쇼크가
멈춘 심장에 충격을 주어 다시 쿵쿵 뛰게 하듯이 살아 생생하지 않으
면 안 된다. 이 50억 년 묵은 낡은 지구에서 무엇이 새로운가. 시간이
새롭고, 모든 사물이 모든 느낌이 새롭듯이 아무것도 진부한 것은 없다.

    말하라, 지금 어느 나라에 있는냐
    로마의 일색, 아름다운 플로라,
    .....
    작년의 눈은 어디에?(프랑소와 비용)

  오늘의 꽃은 어제의 것과 같지 않고, '작년의 눈은 어디'에 있을까.
언어는 소진되었다. 이것을 새 언어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시의 숙명이다. 시는 살아 있다.
  몇 년 전 개봉된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시를 묻는 배달부 마리
오에게 시인은 말한다. '시는 설명하면 진부해진다'라고, 설명되고 해
석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으로 느끼는 것 그것이 시의 존재다. 시는
의미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다. 시는 존재의 차원에 있다. 「Ars
Poetica」(메클리쉬)에서 시적으로 형상화된 존재론적 시론은 이제 고
전에 속한다. 시는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진동하는, '살아 움직이는
실체 ③다. 시적 언어의 사물성과 더불어, 시는 사물의 본질을 향해 간
다는 시의 정의는 우선 이러한 시의 기본적 위의에 근거한다.

  시는 존재/사물과 언어/의미의 경계선을 형성한다. 시적 언어는 존
재를 희생한 의미의 탄생이며 의미의 죽음을 거름으로 해서 생겨난
존재/사물로 볼 수 있다. ④

  이것은 발레리 식으로 말하면 보행(Marche)에 대한 춤(Danse)의
세계다. 시는 무엇에 봉사하지도 않을 뿐더러 수단도 도구도 아니며,
그 자체가 매혹이고 순수한 기쁨이다. 고통의 시적 표현조차 그것에
가장 가까이 근접했을 때 '지복(至福)'(바슐라르)이다. 그러나 생명의
존재 양상은 단순하지 않다. 존재는 영원하지도 불변하지도 않고 끝
없이 변전하면서 영원과 신성을 동경한다.

    서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오갈피 향나무와
    개가죽 방구와
    나의 여자의 열두발 상무상무

    ......
    서서 우는 눈먼 사람
    자는 관세음.

    서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한 바다의 정신병과
    징역시간과.(서정주)

  이 시인이 쓴 천 편이 넘는 시 가운데 불교도 신라도 샤머니즘도
아니어서 별 대단한 사상을 담은 것 같지 않은 이 시에서, 보편적 또
는 현재적 의미로 풀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한 바다의 정신병과
/징역시간'이란 과연 바다에서 (해저감옥쯤 되는 곳에서) 정신병을 앓
으며 갇혀 있다는 끗인가. 심한 정신병을 앓으며 바다처럼 오랜 형기
를 살고 있다는 뜻인가. 정신병이 또한 징역시간이란 뜻인가. 또 '한'
바다란 많다는 것인가, 하나라는 의미인가, '한(恨) 바다'란 것인가. 그
리고 '징역시간'의 끝에 붙은 '과'는 과연 어떤 울림을 주는 것인가.
  '바다'란 이 시인에게 있어 죽음의 깊이이기도 하고 지상으로부터의
떠남이나 구원이기도 하고 생으로 오르는 동아줄이나 무지개가 놓인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난타하는 종소리'가 울리는 '서있는 바다'(행
진곡)이기도 하다. 시인에 따르면, 여기에는 이름자 그가 �년시절에
경도되었을 법한 큐비즘 혹은 슈르레알리즘이 있다(1998년 6월 4일
오후 4시~5시). 그것은 의식하의 자동기술이다. 무의식은 의식과 함
께 인간 내면을 형성하는 거대한 잠재의식이다.
  이러한 시세계는 일상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독특한 것이다. 우리님
의 한들거리는 관능과 징역의 고통과 서녘에 대한 아련한 동경이 한
자리에 있다. 이 자리는 지상과 영원의 중간지대다. '하나 그리고 무
한/소멸'(파울 첼란)사이에서, 그리고 상징의 그네를 탄 춘향이 (추천
사)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영우너히 흔들리듯이, 시인은 이 갈등 속에
놓여 있다.
  서서 우는 눈물이 있으나 언젠가 눈뜰 '관세음'이 있다는 것을 안
다. 이것이 적나라한 존재조건이고, 여기에 시가 서 있다. 이 자기에
시의 존재의의가 놓인다.
  시는 같은 사물에 대해 과학이 만족시킬 수 없는 측면을 보여주고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채워준다. 문학적 상상력은 사물의 덧없는 변
전화 구주적 상징이 마련하고 있는 의미의 영우너성 사이에 놓여 있는
것으로 그 심연을 메워주는 인간정신 내면의 힘이다. ⑤
  이러한 내면에 대한 인식이 많은 시인들로 하여금 존재에 대한 탐
구의 도정으로 나아가게 한다. 따라서 다음의 '잃어버림'은 의미가 있
다. 그것은 현실의 삶에서 찾기 어려운 신성한 것에 대한 아련한 그
리움 같은 것으로 떠오른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윤동주)

  윤동주가 더듬듯이 자기 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단지 시대적인
고민 때문 만이었을까. 북간도로 이주해서 자식을 기른 부모는 문과
가 아닌 의과로 진학해서 안정된 생활을 하기를 바라고,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일본유학을 마치면 마음먹기에 따라 식민지 서울의 고급관
료가 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런 여러가지 현실적 갈등과 함께 그에게 보다 중됴한 것은 전체
적인 자기와의 만남, 자기충족감이고 뚜렷한 자기확립이다. 이것이
'내게 내미는 악수'의 진정한 의미이다.

3. 젊음, 재생 ㅡ 존재의 전환

  시는 젊음의 문학이다. 모든 노년들은 한때 시를 썼던 청년들이다.
시인이란 이 청년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나이 먹은 청년이 ㄹ뿐이다.
왜 시는 젊음인가. 젊음은 끝없이 추구하고 갈망하고 존재한다. 슬픔
과 고난 속에서도, 무엇에라도 몰두하고 존재를 불태워야 하는 것이
젊음이고 생명이다. 그것이 젊음의 생이고 존재의 본질적 모습이기
때문이다.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문제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나 어쨌든 취하라. (보들레르)

  3월에 대학의 신입생들과 함께 읽는 미당의 「수대동시(水帶洞詩)」
는 아름답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다른 계절이고 해서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봄이 갈망될 때, 마음이 봄을 부를 때 이 시는 언제나
'새봄'을 만든다. 수대동에는 언제나 새로 생명이 샘솟기 때문이다.

    흰 무명옷 갈아입고 난 마음
    싸늘한 돌담에 기대어 서면
    사뭇 숫스러워지는 생각, 고구려에 사는 듯,
    ....

    머잖아 봄은 다시오리니
    금녀 동생을 나는 얻으리.
    눈썹이 검은 금녀 동생
    얻어선 새로 수대동 살리. (서정주)

  시인은 새 삶을 새로 시작하기를 꿈꾼다. 이것이 '새옷'을 갈아입는
다는 시적 의미다. 시적 언어의 특징은 이런 것이다. '나는 당신을 영
원히 사랑합니다'라는 상투적 산문 귀절이 시로 표현되어 뜨거운 울
림이 되는 것, 그것이 만해의 시세계이고, 죤 던의 '컴퍼스의 두 사
리'(고별사)가 이루어내는 시적 성취다.
  '숫스러워지는'은 이 시인의 고유한 언어다. 어떤 판본에는 '쑥스러
워지는'으로 오기(誤記)될 정도로 이것은 지상의 언어가 아니다. 숫처
녀, 숫총각처럼, '숫' 존재, 새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정신이, 그 마음을
'숫' 언어에 담은 것이다. '금녀동생'또한 이러한 새 언어에 대한 필요
때문에 생긴다. 여기에는 아내의 동생을 취한다는 윤리적, 법률적 문
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옛시간으로 돌아감(금녀)이 문제가 아니라 새 삶이 문제된다. '검은
눈썹'이 중요한 조건이다. 누구나 검은 눈썹을 가졌는데 왜 새삼스럽
게 '검은'눈썹인가. 반달같이 예쁜 눈썹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원
초적 생명감에 충일한 그런 여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존재의 속성들
이 3월의 봄과 수대동의 물과 결합되어 이루어져 새 생명에의 부름
으로 가득찬 것, 그것이 '수대동'의 세계다.
  시에는 끊임없는 젊음이 있다. 이것은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 아니
라 쉬없이 되사는 젊음이다. 되산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따라
서 '새 무명옷'은 죽음의 수의(壽衣)가 되고, 새 배내옷이 되는 이중
적 의미를 띈다.

    그래서 이 몸 다시금 둥근
    물방울의 시온성으로
    밀알갱이의 예배당으로 들어가기 전(딜런 토마스)

  생명 속에 죽음이 깃들 듯이 죽음 안에 생명이 있다. 수대동의 물
또한 죽음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새 생명을 주는 복합적인 존재다. 봄
이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겨울을 거쳐야 봄이 온다. 시에서 원형, 상
징적 인식이 중요시되는 것은 우리 삶의 근원적 모습이 이러한 우주
적 질서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있음(상)과 없음(무상)은 현실논리를 지배하는 가장 거대한 논리
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고, 죽음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더 이상의 추
억을 ㅇ용인하지 않으려 든다. 우리 눈앞의 I.M.F는 정리해고를 주고
결식아둥을 만들며 생활고로 자살하는 가장을 만든다. 이 고통 앞에
어찌, 인생은 무상하며 죽음과 생성이 한 몸이며 부활을 믿으라는 위
로가 무슨 소용이 될 것인가. 모든 수도자들의 경귀는 현실 앞에서
무력하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아워ㄴ자세계를 탐구하는 현대물리학자에 의하
면, 원자의 구성요소들인 아원자적 입자들이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하
는 것이 아니라 여러 상호작용에 의한 망의 불가분한 부분들로 존재
한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입자들의 교환을 통해
에너지의 끊일 줄 모르는 유동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에너지모형의 연속적인 변화를 통해 입자들이 끊임없이 생
겨나고 소멸되는 열동적인 상호작용이다. 이 상호작용은 물질세계를
형성하는 안정돤 구조를 낳게 하지만 그 물질계는 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율동적인 운동을 하며 진동하고 있다. 그리하여 전
우즈는 끊임없는 운동과 율동을, 즉 에너지의 지속적인 우주적 무도
를 하고 있다.
  유럽의 종합연구소(CERN)에서 실험 중 우주선 샤워가 기포상자에
부딛칠 때 우연히 찍힌 우주적 무도의 모습은 '탄생과 소멸의 무도',
'에너지 무도'(게테드 포드)등의 용어로 불리낟. 이 용어 속에 함축
되어 있는 상호작용은 탄생(유)과 죽음(무)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양
자장이론에 따르면 물질의 구성요소들 간의 모든 상호작용은 가상적
입자들의 방출과 흡수를 통하여 발생한다. 한층 더 나아가 창조와 붕
괴의 무도는 물질을 존재케 하는 기본이 된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적 입자들은 가상적 입잗들의 방출과 재흡수를
통하여 자체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대물리학은 모든
아원자적 입자가 에니춤을 춘다는 것뿐이 아니라, 창조와 붕괴의
고동치는 에너지춤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우주에서의 창조와 소멸의 연속적인 울동에 증거를 제공하
    는, 상호작용하는 입자들의 기포상자 사진들은, 아름답고 심
    오한 의미에서의인도 예술가들의 그것에 필적하는, 시바의
    무도에 대한 가시적인 상이다. 우주적 무도라는 은유는 이렇
    게 신화, 종교적 예술, 현대물리학을합일케 한다. 그것은 실
    로 구마라스와미의 말대로 '틀림없는 과학이면서 또한 시'이
    다. ⑥

  현대과학이 찾아낸 '에너지무도'의 모습이 우리가 사는 삶의 지극히
과학적인 모습이라면 창조와 죽음의 연쇄에 고통받는 시의 아픔은
또한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 언제부터인가
    나는 죄인
    수억년간
    주검의 연쇄에서
    악령들과 곤충들에게 시달려왔다
    다시 계속된다는 것이다 (김종삼)

  이 고통은 또한 미래가 없는 '검은' 영혼의 몫이기도 하다. '두려움
이 나의 속성이며/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나의 영혼은/검은 페
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펼쳐볼 것인가.'(기형도) 출생
직전의 인간이 어머니의 산도를 거쳐 나오면서 최초로 겪는 체험이
두려움이라고 한다. 영원에서 시간의 세계로 흘러나오면서 우리는 대
극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 속으로 떨어진다.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는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⑦

  우리가 판도라의 상자에 남아 있는 무언가에 실낱같은 희망을 건
다면 그것이 나쁜 것일 수도, 좋은 것일 수도 있다는 반반의 확율 때
문일 것이다. 확정되지 않은 가변성, 불확정성이 우리의 또 하나 존재
조건이다. 변화는 우리의 운명적 조건 중의 하나다.

  몇 년 전 젊은이들 사이에 가수 윤종신이 부른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다. 그 노래의 제목이 「환생」이었다.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우리
엄마가 제일 놀래요./ ……내 모든 게 다 달라졌어요.'이런 가사를 가
진 이 노래는, 아마도 사라으이 의미, 그 기적과 같은 힘을 절실하게 전
달하고 있어서 젊은이들의 사랑의 체험과 어울려 상당한 공감을 준
것 같다. 다시 태어났다니, 어머니가 놀랠 것은 당연하다. 그 전의 존
재를 낳은 사람이 어머니인데, 그 자식이 자신이 낳은 것이 아닌 전
혀 '다른'존재가 되었으니 말이다.
  변화라는 측면과 관련하여 물질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육체를 살펴
보면 우리의 머리카락은 매일 수십 개씩 빠지고 비슷한 숫자가 다시
돋아난다. 우리 몸의 세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매일 같은 얼굴을 보
고 같은 사람을 만난다고 하지만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우
리는 매일 조금식 달라지는 사람을 만나고 어느 일정한 기간이 지나
면 물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듯하지만 나날이 모든 존재는 달라지고
있다. 해 아래 새롭지 않은 것은 없다. 물질의 차원이 이러한데 의식
과 정신의 영역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변화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
연적이다. 일상적 삶의 과정이란 기존의 관습과 사고에 서서히 동화
되어, 마비되어 가는 것과 비슷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가면서 서서히 습관화되는 삶의 비송석과 경직되는 의식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본질은 강하고 단단한 것이 아니라 유연하고 부드러운 것
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일은 기존의 관습과 체재의 구속에서 괴로
워하는 육체를 보상하고 해방하는 길이다.

    人之生

  어린아이가 태어나�ㄹ 때넌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굳고 강해진
다. 언제나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열린 마음과 자유로운 의식
으로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시의 마음이다. 이때 세계는 열리고, 삶
은 갑자기 '봄기쁜'나무로 생명을 느낀다.

    얼음칼 같던 不忘의 마음
    물기도 없이 조용히 녹이고
    들어찬 너의 햇빛

    이제야 너를 향해
    가느다란 팔을 뻗고
    이제야 너를 마주보는
    나는 새순 피우는
    봄기쁜 나무(최윤선, 학생/나의 사랑)

  사랑에 의해 변화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것은 지상적 기
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사랑은 훼손되고 언젠가 변
질된다. 인간의 괴로움은 영원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고
하지 않는가.⑧ 시의 사랑은 지속적이고 불변이다. 이것이 시가 주는
무상의 기쁨의 내용이다.
  또한 이것이 '죽음 같고 탄생'(전동균, 「비밀의 방」)같은 시의 불꽃
속으로 뛰어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절대와 영원의 세계가 결여된 삶,
완전히 충족되지 못한 삶의 조건 아래서, 영원한 세계를 들여다보기,
영원과의 말트기, 영원한 세계를 만들기, 이것이 시인이 꾸는 영원한
사랑의 꿈이고, 시에 대한 애타는 사랑의 전부다.
  환생은 글자 그대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마치 사랑이 한순간
이긴 하지만 기적과 같은 힘으로 존재를 바꾸어 놓듯이, 시는 결여되
고 충족되지 못한 현실을 변형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⑨ 이러한
세계의 창조는 사물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의해 가능하며, 이
러한 의식의 전환이 곧 존재의 전환이 된다. 전환된 존재란 바로 새
로 태어난 존재가 아닌가.

4.  시의 비의(秘義) ㅡ 생명의 시학

  시는 특정한 사람이 쓰는 특별한, 무언가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라
고 생각하는 것을 종종 본다. 이 생각은, 시는 추하고 혐오스럽고 고
통스러운 것을 담으면 안 된다는 편견을 암암리에 내포하고 있다. 그
러나 이것을 빼면, 시는 또한 진실의 일면에 대해 눈을 감는 것이 된
다. 우리 세계는 아름다움과 거룩한 것과 더불어 이런 것들과 함께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蓮이 卑??泥에서 자라되, 그것에 물들지 않고 꽃피우는 것'(한
용운)처럼, 시는 이 진흙세상, 지상의 낮고 낮은 곳에 있다. 신이 진
흙에 숨을 불어넣어 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듯이, 풀코스의 디너
정식이 아니라, 메밀묵(박목월)이나 국수(백석)와 같은 음식의 맛, 그
것이 시의 세계이다. 이것이 수많은 시인이 있고, 수많은 시가 있으
며, 또 사람 수만큼의 시가 있어야 하는 이유다.
  계관시인이나 문학상 수상자에게보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가난하고 외롭고 슬프게 살았던 소월이나 백석, 윤동주와 같은 시인
에게 시의 영광이 돌아가야 하는 가닭 또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영광은 시인의 뒤에 남몰래, 시인도 모르게 온다. 그래서 시인은 전생
애를 시에 의탁할 뿐 아니라 그의 죽음조차 시에 위임한다.
  물질로 가득찬 현실 속에서 시는 갓난아이처럼 허약하고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다. 온갖 푸대접과 냉대를 받는다. 땅을 파는 노동자에
게는 일당이 책정되지만 시인에게는 근로노동법도 없다. 시인의 모습
은 언제나 초라하다.

    내 성명 위에 늘 붙은 冠詞.
    이 낡은 ?子를 쓰고
    나는
    비오는 거리로 헤매였다.
    이것은 전신을 가리기에는
    너무나 어줍잖은 것(박목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윤동주)

    '낡은 모자를 쓴 슬픔'이 가는 길은 어디인가. 이제 새 모자에 전신
을 가리는 비옷도 갖춰입었을까. '너희는 아프지 않니?/나무야, 새야/
오늘은 시말서 안 썼니?/정처없는 세월아'(전동균) 이 시대에도 시인
은 어디 말물어 볼 데도 없어, 나무와 새에게 묻는다. 나무와 새가 부
럽다. 가는 세월에게도 부끄럽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은 나무나
새와 얼마나 다른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가?
  옥스포드대학의 한 교수(왓슨)에 따르면 지구상의 생명은 전 생명
단계인 원시수프라고 할 만한 성간((星間)물질에 그 기원을 두고 있
다. 이 물질은 96% 정도가 탄소, 질소, 수소, 산소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아미노산과 같은 한층 복잡한 분자, 나아가 단백질로 발전하
는 과정은 실로 험난하다.
  자기복제의 기능을 갖는 디옥시리보핵산 DNA의 이중나선구조의 생
성을 위해, 무작위적이고 완벽한 재배열 과정을 반복하는 아미노산이
존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하나의 인슐린분자가 생성되어
나올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기존의 전우주에 걸쳐 1조
년에 걸쳐 실험을 계속하더라도 자연 시스템 안에서의 단백질 생성은
상상하기조차 불가능하다. 숫자적으로 10의 80승 분의 1이라는 확률 ㅡ
즉 그저 단순한 '우연'에 의해 출현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견해다.

      단백질의 탄생은 그만큼 희귀한 일이다. 따라서 굳이 전우주
    에 존재하고 있는 전자의 총수보다 더 큰 수 ㅡ 10의 80승 분의
    잉이라는 확률로 그것이 태어났다고 설명하기보다는, 그저 단
    순히 우연에 의해 출현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현명한 일
    인지도 모른다. ⑩

  고도의 지성을 가진 인강생명의 씨앗의 출현에 관해 인간이 가진
정보가 이 지경이고 보면 그 다음, 인간의 정신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에 대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을 가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노릇이다. 그런데 이 우연하고 신비한 존재인 인간이, 이런 시를 쓴다.

    말이 적은 나라에 살고 싶다. 아이들에게
    아무도 헛된 말 가르치지 않고
    대학 같은데 억지로 가서
    처셋말 배우려 하지 않는 나라
    .....
    하루 여덟시간 일하고
    저녁엔 시인이나 연주가가 될 수 있는 나라

    단 한번도 세상에는 없었지만
    많은 이가 꿈구며 살아가는
    그리운 나라(안태영, 학생/그리운 나라)

  시의 마음은 눈물겹고 애절하다. 그런데 시는 맑고 투명하다. 아픔의
흔적을 흔들고 출렁이게 하여 그 힘으로 물결처럼 우리를 부드럽게 안
아준다. 이 힘은 아픈 현실에 대한 분노나 탄식을 넘어서 온다. 눈앞의
슬픔이 우리를 짓눌러도 시 안에서 시를 통해 새로운 힘으로 바귀는
것, 그것이 시의 힘이고,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시의 연금술이다.
  슬픔을 넘어서 새 꿈을 만들고 영원히 부재한 새, '그리운'나라를
꿈꾸게 하는 수수쎄끼 같은 것, 그리고 수수께끼 속에 숨어 있는 비
밀한 뜻, 그것이 시다. M. 블랑쇼의 말을 조금 바꾸면,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가 시인을 만들고 우리를 만든다. ⑪
  다음의 수수께끼 같은 시 속에 이 땅에 사는 시인의 간절한 꿈이
있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연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들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넷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워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
  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
    이것은 그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백석)

  '히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것은 흘러간 시간과 죽은
사람들의 기억을 갖고 있다. 부드럽고 유장한 가락에 실려, 봄비와 여
름볕과 갈바람을 따라 오는 '이것'은 추억뿐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의 '마음과 꿈'을 간직하고 영원히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옛적의 '큰마니나 큰아바지'처럼 지금 여기 우리 속에 있다. 사라지고
흩어지는 현상 속에 영원히 이어지고 계승되는 마음을 발견하는 것
은 시인의 몫이다.
  이것은 사람이 먹는 하나의 음식이 아니라 먹는 행위를 통해 이어
지는 생명과 그 생명에 대한 외경과 찬탄의 시다. 그리고 현실의 아
픔을 누르고 '아득한 옛날'의 한가하고 즐겁던 날에 대한 간절한 그리
움의 시다. 그생명이 비록 '피의 비같은 밤같은 달 같은'슬픔(목구)일
지라도 끝내 회귀하지 않을 수 없는 영원한 고향임을 알기 때문이다.
  자칫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생명 본연의 소박한 마음과 꿈을 간
직하고 있는 것이 국숫발처럼 면면한이 시의 내면이다. 생명에 대한
이 '따뜻한 마음'은 지금도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이상국)

  수수께끼와 같은 시의 형식은 우리가 현실에서 익숙한 것으로로 그
냥 지나치는 사물과 현상의 깊은 뜻을 다시 살피게 한다. 실비아 플
라스가 '아홉음절로 된 수수께끼'에서 노래하는 것은 땅 위에서 가장
아르다운 것의 이름으로 드러나는 생명이다.

    나는 아홉음절로 이루어진 수수께끼,
    코끼리, 육중한 집,
    두 개의 넝�손 위에서 흔들리는 메론.
    오 붉은 과일, 상아, 좋은 목재들!(실비아 플라스)

  생명의 마음은 단순하고 소박하다. 그것은 다른 어떤 욕망이나 부
귀를 바라지 않고 다만 존재의 살아 있음을 즐기고 생 자체를 노래
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것은 지상의 어떤 것보다 힘차다. 살아서 약동
하는 것,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을까.
  몇 년 전 우리나라의 12세 소녀 장한나가 세계무대에 등장했을 때
세계의 첼로 거장들의 평은 '생명체처럼 약동'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
을 한 사람도 그것을 최대의 찬사라고 이식했을 것이다. 삶의 모습이
고통과 기쁨, 슬픔과 쾌락 등등이 뒤섞인 잡동사니와 같은 것일지라
도 생명체를 지배하는 원리는 생의 원리다.
  최근 세계적으로 노화연구가 활발해지고 있으나, 신이 입력한 인체
의 선당시계는 25세에 작동이 만료된다. 그 이후 서서히 노화가 진행
되어, 일반적으로 인간의 최대생존시한의 산출은 이 숫자에 5를 곱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장수를 위한 과학자들의 연구는 인간
의 최대수명인 125에 대한 도전이다. 실제 현재 세계 최고령자는 프
랑스의 124세 된 파파할머니이다.
  이 최대한으로 주어진 수량의 시간 동안 인간이 할 가장 가치있는
일은 무엇일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나라
는 질문에 많은 사람이 돈이라고 답한다. 어떤 일을 하며 어떤 모습
으로 삶을 살든 간에 인간에게 주어진 공통된 과제는 자기발견이 안
닐까. 이것은 또한 생명의 발견이며 인간의 발견이기도 하다. 융의 용
어로 말하면 자기원형의 발견이다.
  불교에서는 궁극적인 대우주를 대문자 A로 시작하는 Atman이라
하고 인간을 소문자의 atman으로 쓴다. 그리고 이 소우주인 인간이
대우주와 일치하여 평화와 조화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불교의 근본
정신을 이룬다. 우주에서 태어난 것이 우주와 합일하고자 하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양자물리학에 의해 물질의 미세단위인 소립자가 거대우주모형과
비�하다는 것이 오늘날 현대물리학의 연구성과이다. 원자폭탄을 가
능케 한 행융합은 사실 우주의 높은 밀도와 높은 압력 아래서의 빅
뱅과 흡사하다.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윤동주)

  '사람이 되지'란 지극히 평범한 한 줄에서 윤동주의 삶과 문학의 길
이 벋어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같은 지극히 순결한 시인의 길
이기도 하고 또한 인간의 길이기도 했다. 또한 이 길 위에 '모든 죽어
가는'생명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놓인다.

  ㅡ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
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작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널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
듯이(백석)

    그런데 이 사랑의 길은 어쩐 일인지 외롭고 쓸쓸하다. 마음에 사랑
이 가득하되 몸은 슬프다. 사랑과 슬픔이 한몸이다. 이 역설적 세계
속에 끝끝내 자존을 잃지 않고 그려내는 가스메 고드름이 달린 '꽁꽁
언 명태'(멧새소리)의 초상화는 비천한 지상의 생명에 대한 드높은
시적 위의의 상징적 투사물이다. ⑫
  시는 어떤 것에도 봉사하지 않으나 그가 헌신하고자 하는것이 있다
면 그것은 생명에 대해서이다. '민족도 아니고 문화도'(김수영)아니고
스스로의 생명을 포함하여 생명의 원리에 헌신할 뿐이다. 이 생명의 원
리는 김수영에 의하면 '온몸'의 원리다. 머리 따로 심장 따로, 형식 따로
내용 따로가 아니라,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다.
  예이츠가 꽃핀 밤나무를 통해 노래하는 시행 '오 밤나무여/그대는 잎
인가, 꽃인가, 혹은 둥치인가?'는 아름다운 생명의 모습과 그 생명의 원
리를 동시에 보여준다. 이것은 동시에 시의 원리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
다. 정지용이 말한, '통히 하나'(정지용)의 원리도 이와 동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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