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1장 프로이트와 라캉

자크라캉 2007. 9. 9. 16:09
벼리(nomadia)

1장 프로이트와

 

 

@이 장에서 보위는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 기술의 수사학, 그리고 이론구성에서의 특화된 상황을 통해 차이를 드러내려고 시도한다.  

 

1. "욕망은 언명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언명될 수 없는 것이 된다."(<에크리, 804;302>) ... 욕망은 정신분석의 주제이지만, 분석자가 그 욕망에 대해서 뭔가를 기술하려고 하면 늘 기술되지 않는 미진한 부분을 남기곤 한다. ... 그렇지만 라캉은, 정신분석 이론은 그 이론의 범위를 벗어나는 그 무엇에 대해서 침묵하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13) 

 

2. 프로이트를 비방한 사람들이 비록 프로이트가 '당치도 않은' 얘기를 꺼냈지만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다는 반응을 보인 데 비해, 라캉을 매도하는 사람들은 우선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런 이유로 '당치도 않은' 것보다 더 나쁜 경우, 즉 위험한 변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14)

 

3. "글쓰기는 텍스트를 중시함으로써 스스로의 변별성을 획득한다. 글쓰기의 이러한 특징은 독자들에게 들어온 입구가 곧 나가는 출구가 되는 그러한 의미의 고정을 뜻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입구를 어렵게 만들기를 좋아한다. 이런 의미에서 내 글은 전통적인 글쓰기와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에크리, 493;146>) 무의식의 출구에서 해방되는 '출구'와 그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제한된 '입구'를 동시에 찾아보겠다는, 이러한 어려운 글쓰기는 정신분석의 전통에서는 이례적인 것이다 ... 라캉처럼 의도적으로 애매 모호한 글쓰기에 지속적이고도 적극적인 가치부여를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14~15)

 

4.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 편지는 늘 그 목적지에 도착한다./ 가장 부패한(도움이 안되는) 위안은 지적인 위안이다./ 성적 관계라는 것은 없다. (16)

 

4-1. 라캉은 한편으로는 다양한 의미가 넘쳐흐르는 언어로 온갖 가능한 심리학을 꿈꾸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성과 자명성을 표방하는 단 하나의 타당한 심리학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17)

 

5. [프로이트가 생물학에 특권을 부여한 것에 반하여] 라캉의 저서는 첫 줄부터 강력한 반생물학적인 어조를 띠고 있다. 생물학은 심리 과학자에게 믿을 수 없는 모델일 뿐 아니라 탐구의 대상을 오도한다는 것이다. 심리 과학자의 의도가 인간의 행동 중 인간적인 것을 파악해 내는 것이라고 볼 때, '자연적인' 결정 요인보다는 '문화적인' 결정 요인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능보다는 콤플렉스, 욕구보다는 구조를 더 우위에 둬야 하며, 심리 과학자의 가까운 동료로서는 생물학자보다는 인류학자나 사회학자를 더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18~19)   

 

6. 초기저작에서는 종속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했던 두 개념-'언어'와 '무의식'-이 라캉 사상의 핵심 개념이 된다. ... 1938년 당시 라캉의 '문화'와 '인간계'(human order)는 '무한한 변주' 앞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가족 콤플렉스, 23>). 그러나 그 변주를 관측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단은 아직 없는 상태였다 ... 라캉의 후기저작으로 가면, 무의식과 무의식의 구조를 닮은 언어는 사실상 인간계의 모든 것이 되고 만다.(21)  

 

7. [프로이트가 '덧없음'에 대해 안정된 미적 가치를 부여하는 데 반해] 라캉의 이론은, 인간의 마음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덧없음'을 그 핵심으로 삼고 있다. 하룻밤의 꽃핌이 그 사랑스러움의 극치를 이루는 감각-지각의 세계는, 라캉이 볼 때 환상의 세계에 불과하다. 그것은 상상계(the Imaginary)의 영역이다. 이 상상계 속에서 인간은 세계의 파편을 선택하여 그 파편과 자기를 동일시함으로써 위안을 얻으려 하고, 또 완전한 것처럼 보이는 지각된 것에서 자아의 상상적인 완전성을 찾으려고 한다 ...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 모든 결과물은 이미 죽음의 표시가 새겨져 있다. 시들고, 실패하고, 부족하고, 분열되고, 쇠퇴하고 마침내 죽어 버리는 것이 그 결과물의 자연적인 영역이다. 욕구는 충족될 수 있지만 욕망은 충족될 수 없다. 욕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으며 욕망의 대상은 끊임없이 달아난다.(25)  

 

@ 맬컴 보위가 설명하는 라캉의 이러한 특징에서 불교적 인간관과 인생관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다. 또는 이러한 특징은 굉장히 '금욕적'이라는 것도...

 

8. 라캉은 프로이트보다 정신분석학의 주체와 인접학문과의 상관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확신한 것 같다 ... 언어학, 수사학, 시학이 필수불가결한 우군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위상을 놓고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사이에서 망설인 반면, 라캉은 그렇지 않았다. 라캉은 인문과학이라는 말을 싫어했고, 그래서 정신분석학을 가리키는 정확한 용어로 '추측과학'(conjectured science)이 더 적당하다고 말할 정도였다.(27)

 

@[보위의 문제의식] 공식적인 수학의 언어를 지향하는 듯하면서도, 욕망하는 무의식의 중구난방식 헛소리에 이끌려 갔던 것이다. 라캉이 보기에 정신분석은 '문화의 연구' 그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신분석을 이렇게 자리매김함으로써, 그는 하나의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 그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만약 '언어'와 '문화'라는 무제한의 영역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는 자신의 이론화 작업을 언제 언디서 멈춰야 할 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28)

: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이론'에 대한 라캉의 자세가 설명해 줄 거라 생각한다.라캉에게 이론은 '잡종교배'다. 즉, 기존하는 이론으로서의 언어학과 인류학이 정신분석과 교배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학문적 발전의 도상에서 서로 조력하는 관계인 것이지, 일상적 관찰 속에서 만나는 언어적, 인류학적 펙트 전체는 아닐 것이다. 이때 학문적 교배는 다양한 현실관계를 교통정리하는 신호체계를 얼마나 교묘하게 조절하는가 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8-1. 다른 형태의 담론과 마찬가지로, 라캉이 볼때 '이론'은 연쇄, 실타래, 빗장, 베짜기 같은 것으로서, 의미를 생산하는 요소들이 서로 뒤범벅된 것이다. 이론은 잡종교배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시간 속에 거주하며 끊임없이 변해 가는 과정이다. 이론 속에는 재치, 역설 그리고 애매 모호함이 늘 내재해 있다. 애매 모호하지 않은 명백한 언어를 명확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분석자-또는 언어 안에 항구적인 개념의 거처를 만들려고 하는 분석자-는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뭘 모르는 바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정신분석 이론가들과는 다르게 '뭘 아는 비바보'가 되려는 라캉의 노력은, 그의 모든 연구과제를 프로이트의 사상으로보터 멀리 격리시켰다.(28)

 

9. 라캉은 일관성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초기 이론을 후기 이론에 포섭시키는 기술이 너무나 교묘하여 그의 저작들은 모두 수미일관한 것처럼 보이며, 또 단일한 창조적 주제를 싸고 도는 지속적인 계시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교묘한 기술은 프로이트에게도 있었다. (31)

 

10. 인간의 언어를 중시하는 라캉이 살펴보는 인간의 일상적인 모습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자신의 말로써 서로 대화를 하고, 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자신의 의미하는 바와 의미하지 않는 바를 동시에 말한다. 그들은 무엇을 얻든 좀더 많은 것, 좀더 다른 것을 원한다. 그들은 늘 자신이 원하는 것의 일부만을 얻고 있음을 의식한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은 일상적인 것을 다루는 과학이다. 욕망의 수단인 언어를 다루는 과학, 직접 말할 수 있는 욕망과 직접 말할 수 없는 욕망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과학, 화자들이 서로에게 가하는 쌍방간의 압박을 다루는 과학이다 ... 그것은 인간에게서 가장 인간적인 특징 특징, 말하는 주체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학이다. "인간이 인간적으로 되는 그 순간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아무리 사소한 관계일지라도 인간이 상징적 관계로 들어서는 그 순간을 들어야 할 것이다."(<세미나 I, 178;155>) (33)

 

@라캉에게서 사회과학과 언어학이 중대한 시사점이라는 것은 이로써 충분히 알 수 있다. 프로이트와 변별점도 분명하게 인지되는데, 그것은 '주체성'과 '상호주체성'이라는 특징적 길항관계라는 것이다.

 

 

 

2장 '나'의 발명

 

@이 장에는 라캉의 초기 사상, 즉 자아와 동일시에 대한 보위의 생각이 서술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때, 보위는 라캉의 이 시기를 '상징계/상상계/실재계'로 가기 위한 사전작업의 시기로 본다.

 

1. 1936년 8월 3일 오후 3시 40분. 라캉은 마리엔트바에서 개최된 14차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거울단계}(Stade du miroir)라는 자신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에크리] 초판본 말미에 붙어 있는 참고 문헌에는, 이 논문의 발표 날짜와 시각을 기재함으로써, 그 논문이 역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35)

 

1-1. [이외에 자아형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다룬 논문들] ... {'현실원칙'을 넘어서}(Au dela principe de realite, 1936), [가족 콤플렉스], {정신적 인과 관계론}(Propose sur la causalite psychique, 1946), {정신분석에서의 공격성}(L'agressive en psychanalyse, 1948), {'나'의 기능을 구성하는 거울 단계}(Le stade du miroir comme formateur de la fonction du je, 1949) ... (36)

 

1-2. 라캉에 따르면, 임상정신의학, 연합심리학, 유럽철학의 데카르트 전통, 정신분석 학계 내에서의 수정주의 운동 등은 모두 심판의 날을 맞이했다.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학의 시조인 프로이트조차도 초기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부터 멀리 물러선 것[초기의 무의식 강조에서 후기의 자아 강조로의 후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36)

 

1-2-1. 프로이트는 자아가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권한과 책임을 자아에게 부여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물이나 세계를) 의식하는 개인의 정신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해 온 유럽의 고전 철학을 일방적으로 지지했다는 것이다. 특히 프로이트의 오류는, 그 자신이 정신분석학의 시조로서 충분히 이런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37)

 

1-2-2. 라캉은 [자아와 이드]의 이런 이중적인 측면 중에서 '추천 사항'["정신분석은 자아가 이드를 점진적으로 정복해 나가도록 도와주는 도구이다."(프로이트, [자아와 이드]) 40] 쪽에만 집중하면서 프로이트의 다른 쪽 주장(인간의 마음이 너무 분열되어 있다는 문제)은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 ...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그[라캉]는 또다른 도덕적 입장을 표명하고 싶어했고, 그런 입장을 더욱 도발적인 초기 프로이트를 바탕으로 구축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41) ->밑의 2. 참조.

 

2. 거울단계(mirror stage, 프랑스어는 stade du miroir ; 거울의 경기장)는 단순히 개인 성장사의 한 점을 차지하는 시기가 아니라 하나의 경기장(stade), 인간주체의 싸움이 영원히 치러지는 그런 경기장인 것이다 ... 이 말장난능 그 뒤에 더 거대한 야망을 감추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인생주기에서 개인의 인성이 위태로운 상태에 놓이게 되는 최초의 순간을 찾아 보자는 것이며, 나아가 정신분석이라는 도덕적 드라마의 새로운 시작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거울의'(specular) 순간에 대한 라캉의 설명은 자아의 탄생 신화와 타락 신화를 동시에 마련해 준다. (41)

 

2-1. 경험적 관측 사실 ...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된 유아의 행동 ... "이 행위(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것)는, 원숭이의 경우엔 거울 이미지의 허상이 파악되면 더 이상 원숭이의 흥미를 끌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원숭이와는 달리, 실제 아이에게서는 일련의 몸짓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거울 속에 비친 자기의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움직임과 그 움직임 주변의 환경, 그 자신의 육체나 그 옆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 말하자면 아이가 모방하는 현실 사이의 관계를 경험한다(<에크리, 93;1>)." (42)

 

2-1-1. 거울 단계의 시기에 난생 처음으로 아이의 세계에 뭔가가 가물거린다 ... 거울 앞에, 비록 조잡한 형태이긴 하지만 하나의 자율성 또는 개인의 통제력이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것이다. (42~43) 

 

2-2. 아이는 계속하여 그 이미지를 자기라고 착각하면서 계속 거기에 집착한다. 아이의 관심은 자신의 실제 몸뚱이와 거울 속에 비친 몸뚱이 사이의 공간적 관계에 집착하며(capte), 그 몸뚱이와 거울 이미지 속의 환경 사이의 공간적 관계에 몰두한다. 그러니까 아이는 거울에 사로잡혀 있다(captive). 그러나 라캉은 집착이나 사로잡힘이라는 용어보다는 별도의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그것은 도덕적이면서도 법적인 의미를 내포하여 포괄적인 뜻을 가진 포획(捕獲, captation)이다 ... 거울은 아이에게 위안을 주고 또 유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함정이면서 유인(leurre)이라는 것이다.(44)

 

2-2-1. "아이와 거울만 있는 그 현장은, 비록 책임 있는 행위자로 생각될 만한 존재(어머니, 유모, 아버지)가 없더라도, 형성중인 아이의 자아에 거짓과 기만을 주입시킨다." (44)

2-2-2. 인간이 진리를 향해 진보하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는 표면만을 제공하는 빛이 없는 거울'(<에크리, 188>)을 넘어서야 한다.(45)

 

@그렇다면, 진리는 '상상계'에 존재하지 않고 '상징계'에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서, 진리는 '자아'에 있지않고, '언어'와 '사회적 관계'에 있다는 것? 그러면, 자아에 집착하는 한 그는 진리에 대한 퇴행적 동일시만을 경험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이 질문에는 긍정적인 대답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져 있는 것 같아 보인다. 

 

3. [소외(alienation)의 문제] 라캉은, 거울에 사로잡힌 아이는 망상적인 자아형성의 길에 오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정신병원의 광기에 노출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라캉은 아이에게 이런 가혹한 시련이 뒤따른다고 주장하는 것이다.(45)

 

@[보위의 문제의식]바꾸어 말하면 alienation에 [맑스나 헤겔의 명료한 규정에 비해]너무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어서 그 의미들이 서로 갈등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으며, 그래서 소외가 가리키는 조건으로부터 빠져나올 길이 없고 또 탈소외(de-alirnation)의 처방이 아예 없는 것이다 ... 게다가 라캉의 가설에는, 소외가 조직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임상적 자료가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아무런 지형도나 메시지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만다. (46~47)

 

3-1. 거울 이미지는 '나'의 신기루이며, 아이가 나중에 획득하게 될 통합 조정의 잠재적 능력이 언젠가는 실현될 것임을 예고한다. 실제로 거울 이미지는 이런 능력의 발달을 촉진시킨다 ... 그러나 '나'의 소외적 방향'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개인(아이)이 영구히 자기자신과 불화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동결(고정)시킬 수 없는 주체의 과정을 끊임없이 동결시키려-즉, 늘 움직이는 장인 인간의 욕망을 고정시키려-하는 것이다.(48~49)

 

3-1-1. 이러한 주체의 자기분열은 프로이트의 꿈 연구로 처음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것은 라캉에 의해 하나의 악몽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다.(49)

 

4. '파편화된 신체'(corps morcele) ... 이 환상은 자아의 '소외하는 동일성(identity)'(<에크리, 97;4>)과 구조적 관계를 맺고 있다 ... 아이는 어릴 적에 신체가 전반적으로 파편화되어 있는 것처럼 느낀다. 이런 기억과 관련된 불안이 안전한 몸을 가진 '나'의 소유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촉진시킨다. 그런데 자아를 향한 이러한 투사는 파편화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인력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을 당한다. 그리고 자아의 단단한 무장이 오히려 개인에게 하나의 폭력을 가하여 또다시 그의 파편을 흩뿌리게 한다. (50)

 

4-1. 주체가 자아를 향해 앞을 내다보든 또는 파편화된 신체를 되돌아보든, 주체는 하나의 구성(construction)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며, 그 구성이 상태만 바뀌어서 나타나는 것이다. (50)

 

5. 초기의 라캉은 이마고(Imago)라는 용어를 특히 좋아했는데, 이 용어에 아주 큰 의미를 부여해 놓은 것이다 ... '이마고'는 마음의 대상으로서, 어린아이의 아주 초창기 경험에 바탕을 둔 무의식적 원형이다 ... "우리는 이마고를 심리학의 중심과제라고 지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갈릴레오가 불활성의 구체적인 부분을 물리학의 기본으로 삼은 것과 유사하다."(<에크리, 188>)(54~55)

 

6. 라캉의 초기 논문들 사이를 흐르고 있는 안정된 중심점은 동일시(identificatation)라는 개념 ...  (55) 

 

6-1.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라캉에게도 동일시는 정신적인 장치의 주요동기이다. 동일시는 활력의 원천이며, 개인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끊임없는 극적인 상호관계의 촉진제이다. 그러나, 라캉은, 동일시라는 기제가 막강한 설명력을 가지려면 아주 초창기의 원형 상태에서부터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의견을 달리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시작될 즈음에는 아이가 이미 너무 커 버렸고, 또 아이의 동일시의 범위가 너무 넓어져, 동일시의 원칙에만 바탕을 둔 설명은 어색하거나 불분명한 것이 된다는 주장이다. (57~58)

 

6-1-1.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적 동일시를 최초의 근원적 순간-남자아이나 여자이이나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가장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지 모르는 순간-으로 파악했으나, 라캉은 오이디푸스가 2차적 순간이며, 자아를 진정시키고 정상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에크리, 116~7;22~3>). 오히려 라캉은 파괴적이고 문제적인 최초의 동일시가 거울 단계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58)

 

7. 아무튼 라캉이 재조정한 '동일시'와 '나르시시즘'은 종종 한 가지 개념으로 사용된다.(58~59)

 

7-1. 이 주인공[나르시스]은 자기의 얼굴을 비추는 표면의 막강한 힘에 매료되었고, 또 그 표면에 비친 이미지를 자기파괴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사랑한다 ... "이런 성애적인 관계 속에서 인간은 그 자신을 소외시키는 이미지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관계 속에서 자아가 형성되는 에너지와 형태를 얻게 되며 또 자아는 바로 이 관계에서 비롯된다."(<에크리, 113;19>) 이렇게 형성된 자아는 자살적 희생의 궁극적 순간을 향해 그 열정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60)

 

7-2. 자아가 형성되는 바로 그 순간에 자아의 파괴가 벌어진다는 것 ... 소외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는 소외된 상태가 악화되는 것뿐이다. (60)

 

7-3. 자아의 먼 과거에 대한 라캉의 시각은 자아의 미래에 대한 야만적인 시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의 '1차적' 나르시시즘은 필연적으로 모든 인간적 욕망을 움직이는 구조적 사령탑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모든 인간이 복속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환상이 있다. 이것은 데카르트적 의미에서 '육체의 열정'에 복속되는 것, 그 이상의 것이다.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 이것은 영혼의 지고한 열정이며, 가장 고상한 욕망을 포함하여 모든 욕망에 그 구조를 부과하는 나르시시즘이다."(<에크리, 188>)(61)

 

8. 라캉은, 거울단계에서 주체의 내부에 동일시 기제가 진행되면 이것이 나중에 시각적 지각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한다. 그의 논지는 바로 자기동일시의 원초적인 충동이 거울 너머의 세계에서도 무한히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거울의 이미지는 가시적 세계의 문턱이 될 것이다."(<에크리, 95;3>)(63)

 

9. 라캉이 볼 때, 이 연합심리학의 악덕은 늘 유사성의 관념을 가지고 작업을 하려 드는 데에 있다. 라캉은 이 유사성이 심리 모델을 만들어 내는 데에 일관성을 보장해 준다고 보는 태도를 못마땅해했다. 게다가 이 심리학은, 관념이 어떤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보았다(<에크리, 75~6>) (64)

 

9-1. 모든 형태의 동일시는 유아의 나르시시즘적 의식의 반복이다. 아이는, 라캉이 볼 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분열을 일으키는 미덕이라도 갖추고 있지만, 지식을 추구하는 어른-가령 심리학자들-은 기계적으로 동일시적 절차를 적용하여 그들의 망상적 근원을 위장하려 들 뿐이다. (64)

 

10. 인간의 마음에 내재된 그 대파국은 편집증과 똑같은 증세를 보인다. 자아는 편집증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에크리, 114;20>) 거울의 가  사회적 로 바뀌면서 편집병적 소외가 나타난다(<에크리, 98;5>). 치료방법으로서의 정신분석은 통제된 편집증을 인간주체 안에 도입시킨다(<에크리,109;15>). 그리고 지식 그 자체는 모든 양태에서 치료 불가능할 정도로 편집증적이다(<에크리, 94;2/96;3/111;17/180).

 

10-1. 라캉도 달리와 마찬가지로 인간계의 내재적 구조에 대해서 말했다. 인간의 지식은 환상-오해, 기만, 유혹, 유인 등-에서 시작되고, 그 결과 불가피하게 자동화 체계를구축한다. 그러니까 정신분석은 주체의 원초적 섬망을 재복제하고 조절하려는 노력이다.

 

11. [임상적 수준 이상으로 도약하기를 꺼려했던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라캉은 자신의 정신분석적 개념 수정이 정신분석 학계를 넘어서서 전 분야에 커다란 반향을 몰고 오기를 기대했다. (69)

 

12. 이 시기의 라캉은 정신분석이 곧 자아와 상상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72)

 

제3장 언어와 무의식

 

@이 시기에 중요하게 생각되는 논문은 {문자의 기능}과 {정신분석에서 말과 언어의 기능과 영역}(The function and Field fof Speech and Language in Psychoanalysis)[로마 담론]이었다.

 

1. "여기에 기계적 사용에 의해서 무의미하게 된 개념들이 있다. 그리고 그 개념들의 역사를 새롭게 점검하고 또 그 개념들이 주체의 기반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따져서 얻어낸 새로운 의미가 있다. 나는 그 개념들에게서 이 새로운 의미를 분리시키는 것이 긴급한 과제라고 본다."(<에크리, 240;33>)(79)

 

1-1. 정신분석자들은 이런 주장을 무시하고 무의식을 하나의 장소, 힘, 체계, 무언의 충동덩어리, 혹은 아직 문자화되지 않은 생각이나 관념 등으로 뭉뚱그려 생각하기가 더 쉬웠다.(79)

 

1-1-1. 그런데, 이 시기의 라캉에게는, 언어란 하나의 미로였다. 즉, 언어란 정신분석과 그에 관련된 모든 특징이 생겨나는 미로였고, 정신분석자들은 그 미로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나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 정신분석자는 정신분석의 원래 목표와는 다른 엉뚱한 길로 들어서게 되고, 또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79~80)

 

1-2.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은] 근본적인 본능적 욕구[drive]의 영역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또 역동적 상태를 유지하는 기억의 저장고(그러나 의식이 접근하지 못하는)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에 관한 이론을 전개해 나가던 프로이트는, 이 순간에 언어 또는 언어의 유령이 그 '아래쪽' 깊숙한 곳에 침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 그리고 정신분석이 종국에는 통합된 인간과학 분야에서 생물학으로 편입되려면, 드리이브는 침묵하는 것, 불가해한 것, 단순한 말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 되어야많 했다. (86)

 

1-2-1. 라캉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말을 줄기차게 천명하고 다닌 것은, 결국 프로이트의 야심만만한 관점에서 본다면 정신분석을 언어에 값싸게 팔아넘긴 것밖에 되지 않는다.(86)

 

1-2-2. "가령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보자. 여기에서 꿈은 문장의 구조 또는 책의 내용에, 또는 더욱 가깝게 말해 보면, 그림 퍼즐의 구조를 갖고 있다고 되어있다. 즉 꿈은 문자의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의 꿈은 원초적 도상학으로 나타날 수 있고, 어른의 꿈은 의미화 요소의 음성적, 상징적 요소를 동시에 재생한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 혹은 지금도 쓰이고 있는 중국의 한자 등에서 나타난다."<에크리, 267;57>(87)

 

1-2-3. 프로이트는 자신이 동원한 많은 이미지들이 불만족스러울 정도로 잠정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또 언어학적 모델이 아닌 다른 모델도 자신을 매혹시킨다고 말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순전한 언어과학으로 파악하는 것을 꺼렸다.

 

1-3. 환자와 분석자는 정신분석에 들어가면 인간 소망의 덧없음을 느끼게 되고 또 그 덧없는 소망을 정확히 집어내지 못해 한없는 절망을 느끼게 된다. 이러나 절박한 상황을 감안할 때, 정신분석을 하나의  일관된 이론적 언어로만 포착하려는 라캉의 시도는 본질을 흐리는 것이거나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90)

 

2. 프로이트를 상징계의 선구자로 지목하는 것엔 문제가 있다. 특히 전문 용어의 차원에서 볼 때 그러하다 ... 프로이트의 상징은 근본적인 인간 경험에서 우러난 고정된 의미를 갖고 있었으며, 그 상징의 의미는 여러 개인 혹은 여러 문화에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 압축(condesation)과 전치(displacement) ... 너무 경직되지도 또 너무 유연하지도 않은 체계인 이 두 양태는 개인의 욕망이 갖고 있는 의미화의 구조를 잘 드러내 준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이 체계를 '상징계'로 지목했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 라캉이 프로이트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이 '상징계'에 있다.(91~92)

 

2-1. "인간은 말한다. ...... 그러나 그것(말하는 것)은 상징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가능하다."(<에크리, 276;65>)(94)

 

2-2. 라캉은 상징계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단지 인습적인 규칙에 의해서만 구속받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 부재와 배제 등의 냉혹한 사법적(제도적) 절차에 의해서도 규제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한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 옮겨갈 때(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갈 때) 새로운 구조적 원칙, 새로운 배제의 원칙이 기능하게 된다고 간략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한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 전환하거나 번역하는 것이 문제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점을 단 한순간도 암시하지 않는다.(95)

 

2-3. 라캉의 새로운 상징과학은 기존에 있던 체계적인 요소들을 새로운 전체로 엮어내기는 했지만, 기이하게도 별로 변증법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 상징과학은 기호의 안정성을 채택했고 그래서 내부적 균열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문장학, 수상학, 골상학처럼 형이상학적으로 거대한 야망을 갖춘 그런 것이 되고 말았다.(98)

 

3. 라캉이 내세우는 소쉬르는 기호를 신봉하는 학도이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붙는다. 그 기호가 모호할 뿐만 아니라 위협적인 의미를 표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소쉬르는 프로이트와 함께 보편적인 인간성향의 공동 발견자로 추대되어 왔다. 그리고 그 보편적 인간 성향은, 확고부동한 구속의 틀 안에서 인간의 모든 사고를 불완전하고 잠정적인 것으로 만드는 긴 그늘을 던지는 것이었다.(99)

 

3-1. 라캉의 논문에서는소쉬르의 이름이 거명되기도 전에, 이 균형(기표와 기의 사이의 균형)이 깨지고 만다. "언어과학의 등장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의미의 과학이 모두 그런 것처럼 구성과정을 연산식으로 공식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연산식은 다음과 같다. 'S/s'.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기표가 기의를 지배한다. 여기서 지배한다고 하는 것은 기표와 기의를 구분하는 가로줄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에크리, 497;149>"(100)  

 

3-1-1. 첫번째 주제는 기표들 사이의 관계가 다른 언어적 관계보다 훨씬 중요하고 도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의미는 서로 다른 요소들의 닫혀진 질서 내에서 발생하는 조합적 놀이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것도 분해 가능하거나 다시 다른 의미와 조합할 수 있는 일련의 개념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만질 수 없는 발산물의 형태로 생겨난다. 기표의 영역은 독립적이며 또 자치적이다. ...... 이리하여 말의 의미화(기표화) 연쇄과정은 다음과 같이 된다. "기표들은 목걸이로 만들어진 또 다른 목걸이 속의 고리일 뿐이다."(<에크리, 502;153>)(101~102)

 

3-1-2. 두번째 주제는 '기표'가 스스로의 경계를 가진 체계가 아니라, 기의를 적극적으로 압박하는 힘이라는 점이다. 기표는 기의를 '예상하고', 기의를 '침범하고' 또 그 안으로 '들어간다'(102)

 

3-2. 의미를 생산해 내는 책임이 기호의 구성 요소들(기표와 기의)의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에너지가 충전된 단 하나의 구성요소(기표)에 의해 생산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103)

 

3-3. [라캉에게] 시인들이 언어의 다의성이라는 세계에 빈번히 출입하면서 이미 상징계를 훤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인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기표의 대가'라는 것이다. ...... 모든 의미화 작용이 기호의 감옥으로 운좋게 타락한 결과라는 점 ...... (106)

 

3-3-1. '기표'는 글쓰는 사람의 영역이지만 또한 모든 사람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표가 그 행동 양태에 따라 세분화되고, 또 은유와 환유(라캉이 야콥슨에게서 빌려온 용어)라는 두 개의 비탈(<에크리 511;160)에서 서로 경쟁하는 관계라고 본다면, 글쓰기는 공공재산의 일부가 되는 것이고 글쓰는 사람은 그 재산에 대해서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라캉은 이 두 용어를 간단하게 다시 정의했는데, 그 정의는 언어 속의 일상용어로 확립되었다. 그 정의란 바로 "은유는 '한 단어 대신에 다른 단어를 선택하여 사용하는 것'이고 환유는 '한 단어에 이어서 다른 단어를 결합하는 것'이다."(<에크리 506~7;156~7)(107)

 

3-4. "압축(Verdichtung)은 기표들의 포개짐이다. 은유가 중요한 수사법으로 등장하고 Verdichtung  dichtung('시의 창작'이라는 뜻)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압축은 선천적이고도 고유한 시의 기능으로 간주된다.

전치(Verschiebung)는 환유 속에서 드러나는 의미작용의 방향전환과 관련이 있다. 환유는 프로이트가 말했던 것처럼 무의식이 검열을 피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기도 하다.(<에크리, 511;160>)"(110) 

 

4. 무의식이 의식적인 생각, 말, 행동 등에 가하는 압박에 대해서, 라캉은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아무런 중단 없이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라캉에게는 마음의 수력학이 없다. 무의식의 압박은 하나의 의미화 질서와 다른 의미화 질서 사이에서 벌어지는 간섭의 방식으로 일관되게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정신분석적 면담에서 도움이 되는 생물에너지학적인 힘(인간이 내뱉는 말의 '뒤'와 '밑'에 숨어 있는)도 없5고, 기표들의 미친 듯한 행진을 마침내 종식시킬 베일 속에 감추어진 대기중의 기의(veiled signified-in-waiting)도 없다.

"무의식은 근원적인 것도 아니며 본능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이 알고 있는 근원적인 것이란 기표의 근본에 불과하다."(<에크리, 522;170>) ...... 의미화의 마지막 초소를 넘어서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니 경계가 없고 표현할 수 없는 공허-프로이트를 포함하여 많은 정신분석 저술가들이 본능과 생물학적 필요라는 용어를 애타게 중얼거리면서 달아나려고 했던-가 있다. 이것이 라캉의 주장이다.(112)

 

5. [라캉은] 기의=억압된 기억이라는 등식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만약 억압된 것에 이런 종류의 권위를 부여한다면 그의 'S/s' 연산식에서 기의가 오히려 윗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은유와 환유는 의미화 연쇄에서 연쇄고리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양태이고 또 구조와 일관성을 제공하는 원칙이지만, 기의는 모호함과 (환자의) 주관적인 힘을 위해 작용하는 비밀요원인 것이다.(114)

 

5-1. 기의는 아주 심각한 제한을 받으면서 이론의 장으로 들어오게 된다. 대체로 보아 기의는 기표가 성공적으로 축출해 버린 것으로 등장하고, 미끄러짐(라캉이 기표와 기의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를 묘사하는 데 사용한 용어. 소쉬르에게 의미작용은 기표와 기의 사이의 안정된 결합이지만, 라캉에게는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결합이다. 라캉은 소쉬르의 연산식에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 가로줄을 그려 넣는 것으로 이를 상징화했다. ...), 굴러내림, 망설임, 도망침, 끝나버림, 분산됨, 사라짐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5-2. 기표와 기의의 뒤얽힘을 지칭하기 위해 그가 만들어낸 용어는 ...... 고정점(points de capiton)이라는 것 ...... 만약 이 고정점이 너무 빡빡하면 개인은 절망이나 자기희생으로 내몰리게 되고, 너무 헐렁하면 광기의 위협을 받게 된다. "나는 자세한 수치는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표와 기의를 일치시키는 근본적인 고정점을 최소한 여러 개 성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이리하여 그 사람은 정상이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고, 만약 그 고정점이 전혀 확립되지 않거나 또는 그 고정점이 뜯겨 나간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가 되는 것이다.<세미나 III, 304>"

그러니까 자살과 정신병이라는 양극단 사이에 일상적인 삶의 구도가 잡힌다는 얘기이다.(115)

 

6. [라캉이 보기에]정신분석 운동은 ...... 자아가 개인적인 자기동일성의 터전이라는 주장을 터무니 없이 우대했다. 정신분석은 개인의 내면에서 영원히 벌어지고 있는 파편화와 투쟁을 보았으면서도 일부러 그 특징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 그래서 정신분석은 '자동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자아의 사회학적, 시적 기능을 철저히 신봉하는 올바른 사고방식'(<에크리, 523;171>)이 되어 버릴 위험에 빠져 있다고 라캉은 주장한다. 그리고 자아를 강조하는 자아심리학에 대하여 라캉은 아주 강력히 반대 입장을 표명한다. ...... '기표'-라캉이 특별히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 것-는 여러 세기에 걸쳐 누적되어 온 쓸모 없는 심리학적 추측을 싹 쓸어내는 새 빗자루가 되었다. (116~117)

 

@근대철학의 회의적 경험론자들로부터 시작되는 '자아심리학'의 구조물이 라캉에 와서 심대한 반발에 부딪히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 흄은 그가 상정했던 경험적 지각의 '다발'이 관념을 형성하는 과정과 필연성에 의문을 던졌었다(이 아포리아는 칸트의 '선험철학'에서 극복된다고 철학사가들은 대체로 말하고 있다). 불교철학적으로도 이러한 기표-기의 관계는 때로는 부정적(라캉식으로 '미끄러짐'의 관계)으로 [중론]에서 거론되며, 때로는 교학적으로 중요한 붇다의 언설일 경우 차라리 더욱 의무적인 어조로 긍정된다(예를 들어, '이 경 중 사구계 만이라도 받아 지닌다면 ... 운운<금강경>). 

 

6-1. '주체'는 더 이상 구체적인 성질을 갖춘 실체도 아니고, 나름대로 차원을 소유한 고정된 형체도 아니고, 경험에 의해 마련된 다양한 내용물을 기다리는 컨테이너도 아니다. 주체는 언어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이며 곡절, 수사, 굴곡의 행진이다. '기표는 또 다른 기표로 주체를 드러내 주는 것'(<에크리, 819>)이라고 라캉은 여러 해 뒤에 말했다.(118)

 

6-2. 프로이트 이후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실존적 명제를 정립시킬 단 하나의 안정된 '생각'(자아)은 이미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 그리고 라캉 이후 적합한 정신분석 명제를 내세우게 해 중 단 하나의 의미차원도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코기토는 단단히 거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조건이나 명제적 구조가 다음과 같은 풍자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 / 내가 내 생각의 노리개인 곳에서는 내가 없다. /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나의 존재를 생각한다.<에크리, 517;166>"(119~120)

 

7. 라캉이 재해석한 소쉬르의 용어(기표)는 모든 다른 언어의 문턱에 서서 이론가들을 그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일단 기표가 조화시키는 기능을 완수하면, 그것은 새로운 풍성한 의미-또는 색채의 풍성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를 정신분석의 언어 안에서 혹은 너머에서 생겨나게 해 준다. 분석자는 말의 세계에서 끝없이 방랑하는 기사가 되고, 그는 어디를 가나 무의식의 새로운 모델이 손짓하는 광경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122)

 

8. [라캉은 '기표'가 감당하지 못하는 상호주체성의 변증법을 구조화하기 위해] 헤겔을 펼쳐 들었고 거기서 '타자'(Other)라는 개념을 찾아냈다.(123)

 

8-1. 이 헤겔이 [에크리]의 논의에 두 가지 뚜렷한 방식으로 도입된다. 첫째, 그는 개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욕망하는 거래에 대해서 많은 멋진 진술을 제공한다. 둘째 다른사람들이 주체의 형성에 처음부터(ab initio) 작용하는 구성적 역할에 대해서 진술한다.(123~124)

 

8-2. "...... 인간의 욕망은 다른 사람의 욕망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욕망의 대상을 입수하는 열쇠를 갖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첫 번째 욕망의 대상이 남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에크리, 268;58> (124)

이러한 인용문에서 보면 주체와 타자의 만남은 언어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응시와 반대응시 사이에서 벌어진다.

 

8-2-1. "그러므로 타자는 그(타자)와 함께 말하는 내가 구성되는 장소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하나의 대답이 되고, 그 말을 들어주는 타자는 내가 말했는가 혹은 말하지 않았는가를 결정한다.<에크리, 431;141>" 

"타자는 그것(타자)이 없으면 거짓말도 가능하지 않을, 내 속에 있는 진리의 보증자이다.<에크리, 524;172>"

말-진실된 혹은 거짓된 진술, 질문, 대답, 이름 등-은 이제 욕망의 필수불가결하고 필연적인 수단이 되었고, 주체와 타자가 서로 참여하여 서로에게 압박을 가하는 장소가 되었다.(125)

 

8-2-2. 그는 언어의 구조와 주체의 구조는 서로 친족관계라고 암시하고 있다. 이 두 구조는 차이의 언명이다. 두 구조는 중심이 없다. 두 구조 속에서는 끝없는 전치가 계속된다. 두 구조는 포화점이나 혹은 정지점이 없다.(126)

  

8-2-3. 언어는 물론 추상적인 체계로 간주되고,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내용이 배제된다. 그러나 언어가 말의 형태를 취하는 순간 그것은 상호주체적인 특성을 다시 취하게 된다. 그것은 '제3의 장소'(<에크리, 525;173>)가 되는 것이며, 주체와 타자가 만들어지고 용해되고 다시 만들어지는, 무한히 유동하는 공간이 된다. (127)

 

8-3. 타자는 주체와 '그의' 욕망  대상 사이에 늘 교묘하게 비집고 들어선다. 타자는 그 대상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대상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타자가 욕망의 대상을 늘 바꾸어 놓기 때문에, 욕망은 결코 흡족하게 채워지지 않는다. 언어가 욕망의 토양-욕망이 생겨나고 변모하고 왜곡되는 최고의 메커니즘-이기 때문에, 타자는 언어를 행동의 들판으로 삼는다. ...... 타자는 기표를 영원히 떠돌아다니게 만든다.(128~129)

 

8-3-1.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또 무엇을 하든지 기표는 이미 거기에 있다. 그것은 개인과 집단이 행사하는 힘 뒤의 힘이다. ...... [라캉의 이런 식의] 주장은 그를 위험스러울 정도로 언어의 근본주의자로 밀어 붙인다.(130)

 

9. [라캉-프리자파티의 메세지에서]'지계, 보시, 자비'는 건설적인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는 세 가지 분석적 지침을 제시한다. 가령 이렇게 의미를 풀어볼 수 있다. "당신(분석자)은 언어가 정신분석적 면담에 가하는 압박의 냉혹한 틀을 잘 알고 그것을 지켜라(지계).", "당신은 환자에게 그의 소원과  일치되는 말을 해 주어야 한다(보시)." "당신은 그(환자)에게 자비를 가지고 대해야 한다."(133)

 

10. 라캉의 개척자적 논문["로마강연"]에서 내린 결론은 역시 라캉답게 애매모호하다. 상징계는 한편에서는 인간의 경험을 미리 규정하고 조직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 경험을 취소시킨다. 그것은 의미를 창조하는가 하면 의미를 철수시킨다. 그것(의미)에 활력을 주는가 하면 굴욕을 준다. 라캉이 말하는 '언어처럼 구조화된' 무의식은 아주 위험스러운 조건 속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라캉이 이 표어에 갖다붙인 폭넓은 교훈은 종종 대단히 불편한 것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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