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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파트는 성급하게나마 라캉 정신분석이 실제 적용되는 영역과 관련한 부분들부터 소개하고, 이와 관련한 '주의점' 내지는 관전 포인트를 서술할까 합니다. 역시 제 역량으로서는 라캉의 명제가 직접적으로 무엇이다라기보다는 적어도 이렇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정도에 그칠 것 같습니다. 이런 경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은데, 이런 소거적 정의에다 조야한 실제 경험적 비유들을 덧붙이는 것으로 만족할까 합니다. 라캉에 대한 용어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더욱 좋을 듯*^^*
라캉이 각종 비평과 학문 영역에 미친 영향
우선은 영화, 문학 비평이 있습니다. 라캉이 등장하기 전에는 텍스트 안에서 오이디푸스 시나리오나 남근 상징 따위를 찾아내려는 비평이 주류였다고 합니다. 가령 햄릿을 해석할 때, 햄릿 왕자가 그토록 그의 숙부를 증오하는 동시에 죽이는 것을 망설이는 이유를 그의 숙부가 그의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욕망을 대리만족시켰기 때문이라는 식이죠. 그러나 라캉 정신분석학 이래로 정신분석적 비평은, 캐릭터나 글쓴이의 무의식에 대한 분석이 아닌, 텍스트와 독자의 상호무의식적 전이를 강조하는 비평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독자는 어떻게 텍스트에서 그의 욕망을 작동시킬 환상적 배경을 발견하는지에 대해서와, 텍스트는 독자를 통해서 어떻게 그 효과를 산출하는지에 대해서 동시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영화비평에서도 이제는 슬라보예 지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영화비평이 그의 주임무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은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영화가 어떻게 인간의 욕망을 구조화시키며, 그것이 어떤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산출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영화와 문학 비평 양쪽에서 그러한 분석으로 머물지 않는 실천적 측면을 가지기도 합니다. 동시에 어떻게 하면, 영화를 비판적으로 '독해하여' (영화를 통해 작동하는) 욕망을 구조짓는 환상적 프레임을 어떻게 가로지르는지에 대한 전략적 접근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론적 측면 뿐만 아니라, 이런 실천적 측면에서 라캉이 많은 비판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소 실천적 쟁점에 관련하면서도 오해를 많이 받는 부분에 대해 대략적으로 기술하겠습니다. 남녀의 성차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주체의 위상에 대한 쟁점적 진술들이 이어질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거세와 욕망 그리고 실재의 향락이라는, 라캉 정신분석의 동력원이라 할만한 부분들은 다음 글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용어 주의!!! 환상은 욕망을 실현하는 상황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가능하게 만드는 배경 내지는 무대장치로서 기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상이란 욕망의 미장센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주말 연속극에서 누가 암에 걸리고 바람 나고 막 그런 상황을 보여주는 것은 얼핏 보기에 시청자의 대리만족이라는 쾌락원칙적 측면에서 반하는 것 같지만 그 배경 자체가 극적인 욕망을 추구하게끔 하는 조건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극적인 사랑도 해보고 멋있게 눈물도 좀 흘려보고....
남녀의 성차에 기입된 근본적 적대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여성학-'남녀의 성차'에 대한 의미심장한 통찰을 전개했습니다. 그 영역에서 그것은 남녀 성차의 근본적 적대를 강조합니다. 근본적 적대. 이것은 결코 남녀가 심하게 다투는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한마디로 남-녀 둘의 변별적 자질을 '동시에' 이론적으로 접근하기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ex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따위의 담론들) 가령 여성은 남성과 대립되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남성적 태도를 대립되는 관점에서 관찰할 때 발견되는 대립규정에 가까운 것입니다. 따라서 라캉 정신분석에서, 남녀의 성차는 외재적 대립이 아닌 내적 분열로 규정되곤 합니다. 그런 내적분열이 근본적인 적대로 말해지는 이유는, 전에도 말했지만 그런 분열양상을 동시적으로 조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녀의 성차는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계가 실패하는 두 가지 방식-그러나 불가분의 관련을 맺는 방식들-이 신체에 작용한 결과로서 파악됩니다. 이를 나중에 라캉은 기묘한 수학적 담화 공식으로 (제 멋대로 바꾸어서 표현하자면,) 표현합니다.
남성(All-nothing) : 모든 존재자는 보편적 법칙에 종속된다. 그런데 그 법칙을 넘어서는 예외자가 하나 존재한다. 가령 법칙을 수립한 자나 법칙 그 자체는 법칙 하에 종속되는 존재자들에 대해 예외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식이죠.
여성(Not-all) : 모든 존재자가 전부 보편적 법칙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적어도 하나의 예외는 있다). 그리고 그러한 예외성이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에 예외란 없다.
기묘한 점은, 이 두 가지 얼핏 보기에는 상충된 명제들 같아 보이지만, 보편적 법칙이 실패하는 상황을, 즉 보편적 법칙에 반하는 예외의 산출을, 두 가지 관점 내지는 방식으로 바라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식들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남성적 담화논리는 법 제도 등속의 상징적 보편법칙의 예외성-결국 실패와 자가당착-을 기만적으로 위계화 특권화 하는 반면에 여성적 담화논리는 그런 예외성을 아예 법칙으로서 전치시켜버리는 논리를 구사합니다. 예외 없는 곳이란 없다는 여성적 논리는 고로 예외를 특권화 된 자리로 파악하거나 상징적 법칙 수립을 위해 배제되고 은폐되어야 할 소수자들로서 치부하는 남성적 논리에 맞서게 됩니다.
이 성차는 실천적인 함의를 지니는데, 가령 인권담론에서 ‘모든 인간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남성적 논리는 항상 ‘다만 인간이 아닌 자들은 예외이다’라는 외설적 보충항을 수반하곤 하죠. 결국 인간 아닌 자로 배제된 자들을 경유해, 보편적 인권담론을 확립하는 것이 남성적 논리인데 이에 맞서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는 저마다의 특수한 권리가 있다’는 여성적 논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적 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철거민 등등의 특수한 개개인 들을 시스템에 편재하는 예외로서 파악하는 것이고 그것은 나아가 그 예외 자체를 권리로서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향합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이 두 논리의 대립은 상징계적 법칙에 수반하는 ‘예외지점’ 곧 상징계의 균열점 내지는 실패(상징계 자신은 상징계에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배제하거나 포착하지 못한 것들은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상징적 실패들)라는 동일한 지점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역설을 두고 라캉은 담화논리로서 남녀의 성차를 ‘내적 분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내적 분열을 마치 모든 인간에게는 '여성적 측면'과 '남성적 측면'으로 둘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속편한 이야기로 받아들일 위험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남녀의 근본 적대가 어째서 근본적인지에 대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상징적 예외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공평하고 중립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관점 따위는 없습니다. 언제나 모 아니면 도이죠. 혹은 남 아니면 여. 앞서의 인권담론에서도 결국 문제란 그들을 배제할 것이나 아니면 수용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 대결만이 남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에 대한 '거시기'한 페미니즘의 비판
그런데 정신분석은 언제나 남근을 특권화 한다는 페미니즘의 비판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라캉도 예외는 아니죠. 특히나 그가 상징계를 고정시키는 누빔점(=솜을 고정시키기 위해 소파에 단 고정점)으로서의 남근기표를 언급할 때 이것은 언제나 특정 젠더를 특권화하는 함의를 지닌다고 비판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라캉 정신분석에서 남근기표Phallus는 실제 생물학적 남근Pennis과 달라진다는 점을 지적해야겠습니다. 페니스와 팔루스 차이는 쉽게 말하면 좆과 거시기의 차이라고 해야할까요?*^^* 무언가 의미가 불안정한 문장을 발화할 때 흔히 전라도 쪽에서 거시기... 거시기... 하는 것처럼 의미를 고정시켜주는 기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또 다른 의미에서 '주인기표S1'이나 '기의 없는 기표'라고도 표현합니다. 가령 어떤 부족언어에 '마나Mana'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달리 어떤 대상도 지시하지 않으며 그저 충분히 말해질 수 없는 언어의 한계 외부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그런 Mana가 주인기표의 다른 이름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기표는 그 자체로 별 의미가 없으면서도 마치 '의미가 있는 양' 다루어집니다. 언어의 한계 너머, 말해질 수 없는 것이 어느새 마치 말해질 수 있는 것처럼 은유됩니다. 이런 "공백의 실정화"라는 모티프는 앞으로도 반복적으로 등장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특권적 기표, 동시에 '거시기'를 관점을 달리해 보면, 그것은 은폐막이자 속임수입니다. 우리가 이런 팔루스 규정을 받아들일 때, 우리가 과거 남근을 특권화할 때처럼 여성을 남근이 결여된 인간으로서 정의했던 것을, 남성을 남근이 달린 (척 하는) 여성으로 역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남근이란 기만적인 가림막이죠. 무의미 무능력 이런 것들을 가리는 베일로서 말이죠....
이데올로기와 타자의 욕망이라는 심연
사회학과 국제관계학에서 정신분석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틀로써 매우 유효합니다. 슬로베니아 학파가 그 분야에서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주체가 타자와 관계할 때 개입하는 각종 환상적 틀과 욕망의 논리의 작동양상을 분석실의 외연에서 확장시켜 국민과 국가 민족 그리고 계급과의 관계로까지 고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알다시피 모든 주체는 타자를 대면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때 중요한 것은 이 타자는 그가 경험적으로 대면하는 일상적 인격체들의 외연을 넘어선 그 무언가라는 점이죠. 쉽게 말해서, 우리가 언어를 통해 제도와 관습을 통해 타인을 만나는 이상, 직접적이고 전인격적 관계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관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상실된 것으로 간주-상상됩니다. 마치 어머니와 아기의 관계를 상상하듯이 말이죠. 이것을 라캉 정신분석에서 단적으로, ‘상징적 거세’라고 명명합니다. 모든 주체는 그런 '사후적으로 구성된 결여'를 안고서 상징계(언어 제도 관습 등속)에 거주합니다. 우리가 타인을 대면하는 구체적 윤리적 태도들은 언제나 그 타인과 나 자신을 둘러싼 더 넓은 외연의 ‘타자’의 규율과 욕망에 종속됩니다. 문제는 그 타자의 규율과 욕망이 진정으로 무엇이냐는 점이죠. 진정으로 타자가 원하는 것. 나를 둘러싼 상상적인 공동체(국가 계급 민족)가 바라는 궁극적인 대의란 무엇이냐는 질문은 라캉 정신분석에서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공식화 됩니다. Che vuoi? 난 너에게 무엇이지? 넌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거지? 이에 대한 궁극의 시나리오를 제공해주는 것이 ‘이데올로기’입니다. 이데올로기 투쟁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타자가 나를 통해 이루려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각자의 환상들이 투기장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히스테리와 도착증. 히스테리란 상징계 타자의 궁극적 의미 즉 그것이 나에게 의미하는 바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이며, 도착증이란 타자가 자신에게 원하는 바가 명확하다고 믿는 태도입니다. 마치 부츠를 입고 채찍을 휘두르면서 자신이 타자가 원하는 바를 집행한다고 믿는 사드적 태도와 같이 말입니다. 궁극의 이데올로기적 태도란 바로 이런 도착증의 태도에 다름 아닙니다. 앞서 성차 공식을 떠올려봅시다. All-nothing은 바로 도착증인 태도이고, Not-all이란 바로 히스테리적 태도입니다. 도착적 남성, 히스테리적 여성. 일반적으로 라캉주의 정신분석에서 도착증보다 차라리 히스테리가 나은 것으로 취급합니다. 가령 마광수 같은 진보적 도착증자보다는 히스테리에 시달리는 보수적 도덕교사가 나은 것이지요. 아니면 신에 대한 물음에 사로잡힌 신자라든가...
문제는 그런 환상이란 타자의 자의적 욕망에 대한 가림막이라는 점입니다. 타자의 욕망은 불확정적이며 언제나 기표의 연쇄망으로서 복수의 자의적인 의미들을 산출해낼 뿐입니다. 가령 자유민주주의라는 담론-체제에서 작동하는 자유, 민주주의라는 기표들은 언제나 다른 기표들과의 연관 하에서야 구체적 (무)의미를 산출해 냅니다. 그래서 같은 자유민주주의라는 기표가 북한이나 안보라는 또 다른 기표에 상응할 때 여기서 자유민주주의적인 기형아,(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국가보안법 같은 반자유주의적인 것이 튀어나오기도 하죠. 순진한 이들이 보기에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잘못된 이해로만 보겠지만, 진정 정신분석적으로는 국가보안법과 같은 외설적인 보충물이란 자유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구성적 예외로 파악됩니다. 국가보안법이 문제라면 애초에 자유민주주의라는 상징적 담화구성물 자체도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 겁니다. 아무튼, 무슨무슨 주의, 제도, 언어적 담화 이 모든 상징적 구성물들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불확정적이기에, 정신분석에서 일종의 결여로 표상됩니다.
역설적인 이데올로기적 주체
그런데 이 "결여"가 "표상"될 수 있다는 것은 정신분석 특유의 고유한 역설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없음을 마치 있는 것처럼 표상되고 다루어질까요? 그 자체로는 무의미를 배경에 까는 'Mana'라는 단어나 '거시기'라는 기표처럼 말이죠. 성차 부분에서 다루었던 '남근기표= 주인기표 S1= 기의 없는 기표= 주체'라는 것도 결국에는 무의미한 공백을 마치 유의미한 대상처럼 다루어 상징계 자체가 활동할만한 터전마련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분석학의 궁극적 역설.
문제는 이러한 터전이 바로 주체에 다름아니라는 점입니다. 가령 이런 상황을 가정합시다. 우리가 쓰여진 문장을 이해하지 못할 때 그것의 저자 혹은 말한이에게로 찾아가면서 그 의미를 묻습니다. 그러나 그 저자 자신도 도무지 무슨 정신으로 그런 글을 썼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되는대로 말을 막 지어내죠. 블라 블라 블라... 물어 본 사람들은 어찌�든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하... 이러면서 말이죠. 실제로는 이해했는지 어쩐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런 '안다고 가정된 주체'의 위치에 컨설팅하고 나서 뭔가 '알았다'는 충만한 느낌에 사로잡힌 채 발걸음을 돌립니다. 실제 문제의 구절에 대한 이해의 정도는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실제로 세미나를 진행해본 저의 경험에 기초한 일화랄까요???ㄲㄲㄲㄲㄲㄲ
이 비유로 든 일화는 다소 극단적이지만 언어를 사용하며 상징계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주체가 살아가는 곤궁을 전반적으로 예시한다고 생각됩니다. 주체가 말하는 바는 결코 주체 자신을 적합하게 재현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그런 곤궁이 어느 지점에서인가 역전되어 재현되지 못한 주체가 하나의 궁극적인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문장은 이거다 저거다 충돌하며 분열 일보 직전으로 나아가는 상징계를 고정시켜주는 특권적 주인 기표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소 여담이지만 많은 학술 세미나라는 것이 실정적으로는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것에 그치지만 그 세미나가 열리는 '자리 그 자체'가 하나의 특권적 의미가 되어 세미나의 실패에 대한 가림막이 되어줍니다. 그래서 동아리 세미나 한 게 그냥 하나의 성과로서 동아리 연합회 보고서에 당당하게 올라가고 지원금을 타는 그런 식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그게 바로 남근 기표, 주인기표로 실정화된 빗금쳐진 주체$인 것이죠.
여기서 주의할 점은 '주체'라는 것은 물론 개별 인격적 주체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더욱 넓은 외연이 되어 국가나 민족단위가 하나의 주체로서 상징계 속에서 인식되기도 합니다. 가령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가 '어머니 러시아'를 외치며 포화 속으로 돌진하는 것도 더 넓은 외연의 주체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서도 정신분석적 전도가 목격되는 데, 총도 없고 총알도 없고 완전 막장인 2차 대전 때의 붉은 군대가 그러한 실패와 무의미를 '어머니 러시아'라는 실정화된 남근 기표로 대체하는 게 그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주체는 상징계의 결여에 실정화된 대상으로서 위치한다는 의미에서, 그래서 그 결여에 대한 환상적 은폐막이 되어준다는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입니다. 이 부분이 정신분석이 알튀세르 류의 호명 이론과 대립되는 것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주체가 상징적 과정을 통해 통조림처럼 생산되는 것으로 파악한다면, 정신분석은 그런 과정에 항상 상상적 과정이 개입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정신분석과 알튀세르의 대립각은 위의 책에 잘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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