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ead 라캉, 지젝
읽다. 병원에 들어와서는 단 한 번도 관련 교과서나 임상에서 라캉이라는 단어를 들은 적이 없다. 그만큼 임상 정신의학 안에서 라캉은 이질적인 존재일테다. 얼마전(얼마전이 아니라 벌써 반년 전이구나)에 읽은 핑크의 <라캉과 정신의학>에서 라캉의 임상적 응용의 가능성을 확인한 적도 있고, 실제로 라캉은 단 한 번도 임상적 실천의 자리를 떠난적이 없지만 지금 최소한 우리나라 안에서 라캉이 정신의학자라기보다는 철학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듯 하다. 하여튼, 어제 심심하여 조금 머리를 새롭게 할 책을 찾다가 한 두달 전 사놓은 이 책이 눈에 들어와 뎅굴뎅굴하면서 읽었다.
역시 지젝의 라캉. 라캉의 골치아픈 개념들-대타자, 소문자 대상, 실제계/상상계/상징계...-을 라캉의 텍스트에서 시작하여 지젝스러운 예시들- 럼스펠드의 연설, 고전영화, 오래된 농담들, 프로이트의 텍스트, 최신 헐리우드 영화 등등..-을 통하여 알기 쉽게 풀어낸다. 처음 라캉을 접하는 사람이 읽기는 어렵겠지만, 이런저런 경로로 라캉을 익혀온 사람들이 개념을 다시 단련하기에는 훌륭한 책. 책 읽고나서 처음 든 생각은 ;지젝이라면 이 정도 책은 하루이틀만에 써제꼈을거라는 것. 젠장 지젝의 똑똑함이 부럽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지금/여기의 자리에서 나에게 라캉의 의미는 무엇이 될 수 있나.
-욕망의 근원적 질문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그들이 내 안에서 보는 것은 무엇이지? 나는 그들에게 무엇이지?" 다. -->> 이에 대한 지젝의 예시의 요약 : 아이가 딸기 케이크를 먹고 싶어하는 이유는 딸기케이크를 욕망하기 때문이 아니라, 딸기케이크를 먹는 자신을 부모님이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
-만약 우리가 '현실'로 체험한 것이 환상에 의해 구조화된 것이라면, 환상이 우리가 날것의 실재real에 직접적으로 압도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스크린으로 기능한다면, 그때 현실은 실재와의 대면으로부터 도피하는 기능을 한다. 꿈과 현실의 대립에서 환상은 현실의 편에 있으며, 외상적인 실재와 대면하는 것은 바로 꿈에서다. 이것은.....현실 자체가 자신의 꿈을(꿈속에서 드러나는 실제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다.
-자신을 곡식 알갱이라고 믿고 있는 남자가 있었는데, 의사들이 최선을 다한 결과 그는 자신이 곡식이 아니라 인간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치료가 끝나고 병원 문을 나설 때 그는 즉각 부들부들 떨면서 되돌아왔다. 문밖에 있는 닭이 자신을 쪼아먹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의 주치의가 말했다. "여보시오 당신은 곡식 알갱이가 아니라 인간이란 걸 잘 알지 않소?" 환자가 대답했다. "물론 나는 잘 알지요. 하지만 닭도 그걸 알까요?" 여기에 정신분석 치료의 진정한 내기가 있다 . 환자가 자기 증상의 무의식적 진실을 명확히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무의식이 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타인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용의 태도를 규정하는 것은 두가지다. 하나는 다름에 대한 존중과 개방성이고, 또 하나는 성가심에 대한 강박적 두려움이다. 다른 자는 그의 존재가 주제넘게 침입하지만 않는다면, 진실로 타자가 아니기만 하다면 좋다. 이 때 관용은 자신의 대립물과 일치한다. 타인에 대한 관용의 의무는 실제로는 그에게 너무 가깝게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 그녀의 공간을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즉 내 과도한 근접성에 대한 그, 그녀의 불관용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이 핵심 '인권'으로 점차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성가심을 받지 않을 권리, 타인과 안전한 거리를 유지할 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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