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라캉입문-(4)실재와 사물의 향락

자크라캉 2007. 9. 9. 15:13

 

 

캉입문-(4)실재와 사물의 향락

각해보니 계획했던 라캉 입문의 마지막 부분은 오래 미뤄두고 있어 부랴부랴 업데이트합니다. 그래서(...) 너무나 긴 간극을 거친 끝에, 우리는 겨우 포스팅의 '실재'Real와 마주하게 된 셈입니다. 실재계 혹은 실재라고 번역되는 대문자 Real은, 흔히 라캉 이론을 구성하는 나머지 두 영역인 상징계, 상상계와 더불어, '원초계'라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게 대단히 잘못되었음을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요즘 그렇게 번역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실재라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인식능력에 포착되지 않는 사물 본연의 모습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사실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은 그런 본연의 물자체the Thing itself를 전제하지 않는 급진적 담론입니다. 왜 그런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는지를 간단히 생각해보면 : 원초적인, "사물 본연의 모습"이라는 단어는 기묘한 역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사물의 모습은 사실 사물에 대한 또 하나의 '모습'일 뿐입니다. 즉 우리가 현상의 외관appearance에 현혹되지 않고자 그 외관 이면의 모습을 상상하는 근원회귀의 과정은 역설적으로 외관의 '재배가'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즉 원본으로의 끝없는 시행착오의 여정은 시뮬라크르의 무한 생산이라는 악무한과 정확히 겹쳐질 뿐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지혜를 경청해야하는 것입니다. 미리 결론을 누설하자면, 라캉의 '실재Real'는 어떤 근원적 원본 혹은 상실된 이데아의 편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외관들의 재배가 ‘사이의 틈새’에 위치해 있는 것입니다.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재란 심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표면의 ‘찡그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지젝의 말을 이해하는 게 관건이겠습니다.

 

 

(*) 실재Real는 현실Reality과 다릅니다. 현실은, 사물들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바로 그 현실적인 영역을 의미하는 만큼이나, 환상적인 것입니다. 현실은 환상의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라캉의 역설입니다.    

 

  일단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가기 앞서,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의 리듬을 점검해보아야겠습니다. 이 셋은 인간 실존 조건을 구성하는 근본적 범주입니다. 우선 상징계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거주할 수밖에 없는 언어적 한계, 법과 금지의 작동, 사회적 담화체계와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들을 지칭합니다. 상징계의 함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 한마디로 인간은 자유롭게 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가 자유롭게 발화하고 있다고 믿는 바로 그 순간에 이미 언어 자체의 내적 규칙과 한계에 구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앞의 문장은 이데올로기(비판)에 대한 간단한 정식화일지도 모릅니다. 자,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상징계와 상상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실은 자유롭지는 않지만 자유롭다고 믿는 (척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언어의 내적 악순환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가령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말을 할 때 그는 그것을 자유롭게 인지-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게임의 룰에 따라 마치 자유로운 듯이 말을 하는 것뿐입니다.[오늘날에서 ‘자유주의’가 대표적인 궁극의 이데올로기입니다. 가령 우리는 시장 자유주의에 복종함으로써만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느낍니다.] 그런 식으로 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상상적 이미지를 정립합니다.[ex자유롭게 노동력을 파는 나]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억압적인 외적 강제력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속살까지 침투해서 자기규정에 대한 이미지, 극히 사적인 자존감마저 규정합니다. 간단히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듯 합니다. 이데올로기는 상상적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오인의 체계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체는 이미 이데올로기와의 공모자라는 점이고, 이는 단순한 멍청함이나 ‘사악한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구조적 필연성의 결과인 것입니다.[즉 이데올로기가 불러일으키는 착각은 누군가의 음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을 음모인 양 다루는 영화야말로 '궁극의 이데올로기'인 것입니다.] 즉, 언어가 제대로 작동하고, 언어적 담화를 통해, '의미'가 제대로 교환되기 위해서는 항상 상상적인 착각이 수반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곧바로, 자본주의 내 교환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화폐와 상품에 대한 물신적 착각이 수반되어야한다는 맑스의 비판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상징계와 상상계의 공모관계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와 더불어서 이들을 잇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면 너무 우울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가 다루지 않은 잔여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실재계the Real.” 하지만 실재계는 상징계와 상상계보다 ‘현실적’real이기는 커녕 더 비현실적이고 터무니없게 느껴지는 섬뜩한Uncanny 영역입니다. 실재란 바로 앞서 논의한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내는 ‘사건’으로서 정의됩니다. 그런 만큼 실재는 그 자체의 영역이나 실체를 결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에 대답하기 전에, 일단 현상론적인 분석을 하자면, “실재” 앞에서는, 기존의 상징계(언어와 담화체계)가 제공해주는 상상적 동일시는 ‘중단’됩니다. 즉 어떤 사건 앞에서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지탱해오던 근본적인 자기기만과 직면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그런 기만을 대체할 진리를 얻는다든가, 기만 이면에 도사린 진정한 자기정체성을 획득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들을 영원히 상실합니다. 그것이 ‘실재’입니다. 그런 끔찍한 귀결을 가져오는 실재의 비밀은 역설적이게도 실재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출발점이었던 상징계 즉 언어에 내재하는 것입니다. 즉 실재계란 상징계와 상상계와 독립된 또 다른 제3의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상상적 차원이 축출되어 버린, 날 것 그대로의 상징계로의 회귀인 것입니다. 결국 실재란, 상징계 자체에 내속적인 분열 내지는 틈새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실재와 마주할 때 우리는, 그것이 언제나-이미 상징계에 들러붙어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선 편의적인 예화 한 가지만 들겠습니다. 일단 실재가 상징계 자체에 내속한다는 체험을 얻기란 쉽지 않습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언어라는 커뮤니케이션의 체계는, 그것의 구조적 필연성 때문에, 항상 어떤 고정불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상상계’적 환상과 깊이 관여합니다. 실재는 정확히, 그런 의미가 거세되어 버린 날 것의 상징체계가 행사하는 어떤 폭력성과 마주함으로써 체험됩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가 그것을 체험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정의되는 무엇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령 우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모국어나 외국어 혹은 그것으로 씌어진 담화체계를 보고서 상징계에 들러붙은 실재의 위상을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컨대, 밀림지대나 사막오지 깊숙이 탐험하는 사람들이 오래 전에 잊혀진 문명의 유적에서,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기괴한 ‘상형문자’들을 마주하는 전대미문의 순간을 상상해 봅시다. 그리고 그 문자들이 적혀진 벽화에는 그 문자들을 발화하는 사제들이 포로와 신민들의 심장을 모종의 의식을 통해 칼로 도려내는 끔찍한 장면들이 형상화되어 있다고 칩시다. 우리는 도무지 그것의 의미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동일시할만한 어떤 뜻도 결여한, 절대적인 타자의 언어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마 이 사제들은 자신들의 행위의 의미가 매우 명확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천 년이 지난 탐험가의 눈에는, 심장을 도려내는 상징적 행위는 어떤 외부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저 그 자신에 기반한 터무니없는 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탐험가들은 그 자체로는 접근 ‘불가능한’ 실재를 과거의 흔적을 ‘통해’ 조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흔적 자체는 오늘날의 익숙한 언어에도 엄연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어는 어떤 의미를 지시하고 재현하는 투명한 도구가 아니라, 의미가 들어설 자리 자체를 만들어내는 [전의 사제의 것과 같은] “폭력적 행위”인 것입니다. 사제들의 상형문자에 따라 심장을 도려내는 행위는 지극히 언어적인 현상이고, 그런 현상은 의미를 따라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언어는 의미 자체를 창출하는 상징적 행위인 것입니다. “언어는 사물을 창조한다”는 라캉의 언명은, 바로 상징 자체의 ‘수행적’Performative 기능의 역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영화 아포칼립토가 타자의 역사에 대한 무례한 난도질이라고 비난합니다만, 그런 정치적으로 올바른 비판들은 핵심을 놓칩니다. 오히려, 우리는 타자의 잔혹함과 무의미함, 그리고 폭력성을 자신의 것으로 긍정할 때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상징Symbolique은 신호Signal와 달리 무언가를 지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사후적으로 도래할 의미들을 창조할 터전이자 흔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징은 권력 그 자체입니다. 권력은 투명하게 재현되기보다는 상징되기를 선호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권력이 국기라는 상징물이나 국기에 대한 경례 같은 의례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에는 명확한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이에 집착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투덜댈 때 우리는 핵심을 완전히 놓칩니다.기나 국기에 대한 경례와 같은 상징 혹은 상징화 절차들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지만’ 의미를 창출해 낼 어떤 빈 공간을 수립하는 권력의 기능인 것입니다. 즉 그러한 터전을 통해서만 우리는 유의미한 애국심이나 국가에 대한 상상적 표상을 가지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만약 의례가 그 자체로 의미가 없기에 없어져야 말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상상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입장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런 무의미성을 경유해서, 의미를 결한 상징계의 출현과 더불어 난입하는 ‘자의적’, ‘실재’의 폭력성을 감지해야합니다. 그리고서 동일한 ‘실재의 행위’로서, 우리는 의례 자체에 내재해 있는 권력을 파괴해야합니다. 상징계의 실재적 권력에 대항한다는 개념을 가져야만 그것이 동일하게 실재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기존의 언어로서는 사고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도박에 가까운 시도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예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에 필적하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신분석은 권력에의 대항담론이 종종 휴머니즘적인, 평화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형태를 띠는 것에 의심의 눈길로 쳐다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은 바로 좌파 근본주의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즉 가령 어떤 폭력적 개입 없이도 자본주의의 불의를 중단시키겠다는 ‘온정적 사회주의’라는 발상은 여전히 부르주아적인 담화체계 내에 머물러 있는 반동이라는 것이죠.] 아무튼 이런 반권력적 과제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앞서 다룬, 상징의 화용론적인 측면, 권력 창출의 기능 그 자체로서 상징은, 바로 상징계적 언어 자체의 내적 분열Split들을 예증하는 것입니다. 상징계 자체의 내적 분열은 다음과 같은 점을 이야기 합니다 : 즉 언어는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그 의미를 만들어내는 행위라는 것, 언어가 외부의 의미와 일대일 대응 관계를 이룬다는 관념은 사후에서야 도래하는, 언어에 대한 물신화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언어에 대한 이러한 물화 속에서 기만 당하는 것이야말로 기존의 언어를 지탱하는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실재라는 것은 이런 사후적 물신화에 가려져 있는, 상징적 행위 자체가 열어젖히는 공백을 통해 알려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공백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항상 이런 저런 환상적 틀을 통해서만 보기 때문이고, 그 환상적 틀은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입니다.[그런 환상적 틀로 바라보이는 것이 실재Real가 아닌, 현실reality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상징계의 공백-즉 실재와 마주칠 때, 기존의 언어는 발부리에 걸려 넘어집니다. 기존의 언어가 횡설수설하게 되는 사건, 어떤 중립적 틀로도 바라볼 수 없는 사건, 언어들이 불일치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바로 실재와의 마주침이고, 그런 실재를 다시 부여잡고 상징계의 의미를 다시 상상적으로 고정시키려는 시도가 바로 ‘타협형성물’로서의 ‘증상’인 것입니다.

 


  실재는 기존의 언어와 ‘적대’[여기서 우리는 맑스의 계급적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합니다. 가령 어떤 사건, 예를 들어 파업과 같은 사회적 갈등들은 기존의 언어가 각각의 입장을 전체화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드러냅니다. 파업과 같은 원초적 행위는 기존의 언어에 내재해 있는 수행적 공백을 드러냅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사회적 담화체계의 소통들은 자동적 의미보장에 실패를 겪습니다. 애초에 파업과 같은 사태들은, 정상적인 상징적 사회 속에 ‘차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적대’를 낳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태들을 ‘정의’하고 그 속의 당사자들의 입장을 ‘규정’하는 ‘기준’ 자체가 서로 대립하는 당사자들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가령 좌우의 대립] 결국 극한의 사회적-언어적 적대는 각자의 차이를 ‘측정할 수 있는’ 중립적 큰타자를 상실케 하고 그것은 곧 환상적 큰타자 이면에 감추어져 있던 상징적 언어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재는 상징화될 수 없기에 불가능한 위상입니다. 애초에 실재의 차원은 언표된 것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표하는 행위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겪는 모든 사회적 적대란, 바로 그러한 ‘언표행위’의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둘러싼 모든 갈등의 총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흔히 ‘누가 말하느냐’[중립을 가장하는 입장을 누가 어떤 의도로 발설하느냐?] 식의 속류 계복학적 비판을 연상시킬 수 있겠지만, 관건은 그런 행위의 주체가 실제로 ‘누구냐’[공산주의자냐? 파시스트냐? 쁘띠 부르주아냐? 신학자냐? CIA의 음모꾼이냐? 외계인이냐?]라기 보다는, 그런 행위의 주체가 애초에 상징계 자체에 내속한다는 것이며[즉 언표하는 행위자의 자리 자체는 이미 언어적 구조로서 상징계 자체에 함축되어 있다는 것, 언표된 것들의 의미는 바로 그러한 자리가 있고 나서야 나중에 들어선다는 것. 상징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언표주체의 자리를 마련한다는 것.], 그때그때마다 언표행위의 자리를 차지하는 실제 인물 중 어느 누구도, 바로 그러한 ‘자리’와의 간극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적입니다. 실재는 바로 언표하는 행위의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과 그러한 자리와의 필연적인 ‘간극’에 다름 아닙니다.[바로 그런 자리가 언어의 분열과 적대를 불러오는 것이죠.]             

       

  이러한 실재는 ‘상징계’에 선행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극히 잘못된 일입니다. 오히려 실재의 진실이란, 그것은 그 무엇에도 선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사물’이라는 주제와 연관시켜 고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징적 베일에 가려져 있는, 궁극의 지시대상으로서의 원초적 사물이라는 것은 오히려 ‘사후적’인 것입니다. 언어라는 상징적이고 무의미한 기표들의 연결망에 돌입할 때, 상실된 것으로 흔히 표상되는 ‘사물’이라는 것은 이미 그 언어 자체의 내적 규정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언어라는 게 없었다면 상실될 사물조차도 없었으리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사물이라는 것이 바로 ‘향락'을 산출하는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향락’은 매우 역설적인 위상을 차지합니다. (1)그것은 적법한 법에 의해 제약되는 ‘욕망’과 달리, 무제약적이고 무제한한 쾌락을 의미합니다. (2)동시에, 과도한 쾌락으로 표상되는 향락은, 희열과 고통이 뒤섞인 감정입니다. (3)마지막으로, 향락은 금지된 것으로서, 향락은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타자의 향락인 것입니다. 사물이 제공하는 그러한 향락은 어디까지나 금지된 것으로서, 상징계적 ‘법’에 종속된 주체의 편에서는 영원히 상실된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래서 주체는 상징계를 경유하여 욕망의 대상-원인으로서 상실된 사물을 얻고자 덧없는 욕망의 악순환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라캉이 지적하듯이,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상실된 욕망의 대상을 얻기 위한 끝없는 반복의 여정 자체가 정확히 사물적 향락과 겹쳐진다는 점입니다. 가령, “궁극의 보물”이라는 상실된 향락의 대상이자 욕망의 대상-원인a을 찾아 떠나는 모험을 하는 해적이 나중에 가서야 그가 ‘즐겼던’ 것은 바로 그 강박적인 모험 자체라는 사실을 깨닫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언어와 사물, 욕망과 향락은 일종의 뫼비우스의 띠의 상이한 면과 같이 공모한다는 것이 정신분석의 논점입니다. 그것들은 불가능한 지점에서 만납니다.

 


  (*)라캉은 향락과 욕망의 대상-원인a과의 관계를 양궁에 비유합니다. 가령 화살에게 있어 과녁 자체는 목표aim이지만, 그것이 영원히 과녁을 빗겨가면서 그리는 포물선 자체가 그것의 목적goal인 것입니다. 그것은 향락의 원환고리를 형성합니다. 


  더 논의를 진행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비교적) 최근에 큰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임상사례(?)로 들어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날 것 그대로의 상징계로의 근본적 회귀로서의 ‘실재’라는 역설을 다룰 것이고, 또한 실재의 사후성에 대해 다룰 것입니다. 또한 실재와 상관적인 주제인, 실재의 ‘향락’(쥬이상스)을 다룰 것입니다.


  일단,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의 설정을 살펴봅시다. 하루히라는 괴짜 여고생은 중학생 시절부터 온갖 괴짜질을 해온 화려한 이력을 자랑합니다. 애니 첫화에서 자기 소개를 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평범한 인간에게 관심 없음을 단언하며, 우주인 미래인 초능력자이거나 그들을 아는 사람들과만 관계하겠노라고 선언합니다. 미인인데다가 스포츠 만능인 그녀를 각종 동아리에서 유치하려 안간힘을 쓰지만, 어느 곳에서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녀는 이 모두를 거절하고 결국 교실에서 고립무원의 상태가 됩니다. 이러한 이유는 나중에 소개됩니다. 그녀의 어렸을 시절의 근본적인 체험이란 부모와 함께 야구장에 갔던 사건입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는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이 단지, 저 수많은 군중의 익명적인 개인일 뿐이고, 결국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야구장에 모인 소란스러운 군중은 하루히에게 타자의 불가해한 향락으로서 표상됩니다. 그러한 타자의 향락은 나중에 가서 그녀에게 근본적 욕망의 대상-원인으로서의, ‘우주인’, ‘미래인’, ‘초능력자’라는 모습으로 변형됩니다. 그녀는, 야구장의 군중과 마주침으로써, 타자의 언어, 제도, 상징적 관계망 속에서 상실된[하지만 그러한 군중과 마주치기 전에는 애초에 생각하지도 않았던] 근본적 ‘향락’을 바로 그런 상상의 이물적 존재자들에게 ‘전이’시킨 것입니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정신분석적 의미에서 사물적인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 외의 학업, 남자친구, 동아리 활동, 학급친구들이라는 그 나이의 여자아이에 있어 정상적인 욕망의 대상들은 기각됩니다. 하루히는, 그러한 ‘정상적’인 욕망의 대상은 자연러운 대상으로서 정립되기 이전에, 이미 상징계적 대타자에 의해 매개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상징계를 초월하는, 욕망을 주조해내는 법을 초월하는, 궁극적 향락의 대상을 상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루히에게 있어 남자친구를 만드는 것보다 더 진실한 삶의 태도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소 스포일링을 하자면, 애니메이션의 결론은, 기만적인 욕망의 악순환에서 초월하는, 바로 그러한 향락 추구야말로 궁극적으로 상징계의 테두리에 머무는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외계인 피랍자들이나 외계인 조우자들이 빈번하게 문명비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례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외계인 피랍 신드롬이 한창이었을 때, 외계인들이 피랍자를 통해 전하는 상투적 메시지란, 핵전쟁의 공포와, 환경오염, 그리고 인간의 독선으로 촉발된 각종 현대문명의 병폐들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여기서 흔히 외계인들은, 문명이라는 상징적이고 인위적 틀에 의해 매개된 온갖 욕망의 대상들을 초월한, 현인들로 표상되기 일쑤였습니다. 즉 인간 문명의 이기, 안일함, 맹목적 경제 성장, 이런 허황된 대상을 경유하지 않고서, 그달 자신의 진일보한 방식으로, ‘직접적인 향유’를 누리는 자들로 묘사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제멋대로 시공간을 오가고 신비한 모습으로 현현할 줄 알았던 이 전령들을 신으로 숭배하는 신흥 종교들이 한창 발흥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우주인과 미래인 그리고 초능력자에 강박된 그녀의 태도는 그녀 자신의 욕망마자도, ‘불가능한’ 차원에 놓음으로써,[즉 자신의 욕망을 우주인과 같은, 타자적 향락과 동일시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외계인 같은 괴짜가 됨으로써] 정상적인 성적 관계를 실패하게 만듭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들이 고백해왔지만, 그녀는 그것을 승낙했다가도, 그들이 ‘우주인’, ‘미래인’, ‘초능력자’와 무관한 진부하고 뻔한 남자들이라는 다소 자의적인 이유로 금새 차버린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그녀 자신을 바로 향락적 사물의 위치로 동일시-격상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향락’을 획득하고자 하는 순간, 남성과의 정상적인 성적 관계에서 실패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그것은 향락이란 실제로는 불가능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라캉의 논점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무제한적 만족의 목표로서 향락이란 실제로는 그 누구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체로서는 접근불가능한 타자[우주인 미래인 초능력자]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상상되는 쾌락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상징적 관계망에서 상호주관적으로 승인된 정상적 욕망의 대상들을 탈선시키고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는 [하루히와 같은] 현실적 실패의 과정을 겪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향락이란 다름 아닌 그런 실패의 반복된 과정에 의해서 정의된다는 점입니다.     


  애니메이션의 결말로 곧바로 뛰어넘어, 결국 하루히는 그러한 우주인 미래인 초능력자들이 의외로 가까운 급우들이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깨닫지 못하고(오히려 그러한 지식은 남자주인공만이 획득한 채 하루히는 끝까지 일종의 무지의 담지자로서 행동합니다.), 그녀의 향락과 마주치는 데 끝까지 실패합니다. 최종결말에서, 다소 놀랍게도, 그녀의 향락의 궁극적 상관자로 간주되는, 일조의, 기괴한 비가시적 유동성 물질이 나타나 기존의 공간을 교란시키고 학교를 중심으로 건물들을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정상적 현실 자체의 붕괴로까지 이어지는 위기를 낳습니다. 애니의 이러한 극후반의 위기는, 다소 전기적이고 엉뚱해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라깡적 ‘실재’에 대한 적합한 사례를 제공해줍니다. 실재는 전상징적인 사물의 영역이자 우리에게는 낯선 어떤 궁극적 향락을 가져다줄 것으로 흔히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우주인이나 초능력자들을 상정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간주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실재의 출현은,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향락과 사물에 대한 은밀한 욕망이 붕괴됨으로써만 진정으로 나타납니다. 애초에 그런 사물과 향락이라는 것은 전에 말했듯이, 정상적인 언어와 욕망을 초월하는 것으로 ‘기대되었을 뿐인’, 상상적 실체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런 상상적 ‘미끼’ [줄거리 내내 하루히는 결국 그런 미끼에 ‘낚여 있던 것’입니다.]는 바로 상징계 자체의 미끼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실재’란 바로 상상적 미끼를 던져주었던 상징계 자체의 날것의 계략과 대면하는 참기 힘든 사건인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우리는 실재와 마주칠 때 상징화되지 않은 어떤 궁극적 사물, 궁극적 향락들을 획득하기는 커녕 오히려 영원히 상실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자연스러운 현실감각마저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현실’이라는 것도 이미 초월적 사물과 무제한적 향락에 대한 환상과 은밀히 공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즉 정상적인 현실감각은 그러한 초월적 대상에의 소망을 유지시킨 채 역설적으로 그것을 끝없이 지연시킴으로써 유지되는 냉소적 차원입니다. 그런 분열은 애니메이션에서는 ‘�군’과 ‘하루히’의 분열로 표상됩니다. �군은 하루히의 소망에 대해 냉소적인 포지션을 점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이 끝없는 하루히의 환상을 부추길 뿐이죠.] 실재와 마주친다는 것은 이 둘 모두를 잃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렇다고 실재가 향락과 사물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향락이란 결국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애초의 '타자의 향락'이라는 향락 자체의 규정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만약 공통점이 있다면, 이 셋 모두가 상징계 자체의 분열을 함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두는 전상징적이라기보다는 후상징적인 것입니다. 사실 실재나 사물 그리고 불가능한 향락은, 바로 상징 자체가 열어놓은 공백을 실정화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재와 사물이란 잠재적인 대상이라고 불러야할 것입니다. 즉 그 자체로는 우리는 그것이 무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의미화, 기호작용, 합리화를 불러올 어떤 잠재적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막상 그런 잠재성이 이후에 특정한 의미나 해석의 체계로 인해 고정된다면, 그것의 잠재성은 상실되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에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식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실재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과 마주칠 때란 사실상 고정되었던 모든 의미가 교란되고, 현실이 붕괴되고, 사후에 어떤 의미가 도래할지 모르는 그런 광기의 지점에 서 있을 때인 것입니다. 그러한 지점은 기존의 언어로 사고불가능한 지점인 것입니다. 

 

***

 

  이것은 마지막으로 실재의 윤리를 요청합니다. 그것은 '환상의 가로지르기'라는 테제로 요약됩니다. 즉 실재와 대면할 것을 요구하고, 주체란 단지 결여의 주체, 빗금쳐진 주체임을 인정하는 것이죠. 이런 윤리는 프로이트가 말한, '쾌라원칙 너머'에 있는 죽음충동에 가까운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충동은 죽음으로의 충동이라기보다는, 삶과 죽음이라는 상징적 이분법 자체를 가로지르는 궁극적 행위에로의 추동인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향락과도 일치합니다. 향락이란 애초에 쾌와 불쾌에 무관심한, 무제약적인 즐김의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후기자본주의를 사는 우리는, 그러한 향락에 충실한 듯 하면서 일정한 제약을 가하면서, 여전히 어떤 환상적 프레임을 통해 그러한 향락을 욕망의 대상으로서 투사합니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인 즐김은 원래부터 불가능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상징계에 의해 '규정된' 결여된 대상을 욕망하는 악순환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운명임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상징계 내에서의 악순환과 강박적 여정 자체가 불가능한 '향락'과 일치한다는 역설 또한 우리는 압니다. 문제는 바로 그런 '반복'적인 향락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상징계 자체는 정교한 재현과 해석의 체계가 아니라, 애초에 폭력적인 설립행위에 기반함을 우리는 압니다. 바로 그런 불완전성이 상징계에 있어 내재적이라는 사실도 말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점에 충실하게, 바로 근원적인 상징적 폭력을 반복하는 제스추어를 추구해야하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은 바로 그런 변화, 새로운 설립행위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담론입니다. 다만 그것이 부정하는 게 있다면, 그러한 변화를 우리가 적절히 통제하고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인 것이죠.

  울리히 벡의 말처럼 우리는 위험사회에 직면해 있습니다. 통제될 수 없는 위험들이 산적해 있고, 그것들에 일목요연하게 대처할 어떠한 관점도 이데올로기도 부재한 시대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노무현 정권에 들어서 급증한, '위원회 정치'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점증하는 포스트모던적 위기, 실업문제, 성장동력 소진, 양극화, 테러문제, 종교적 민족적 근본주의 대두, 환경파괴, 심지어는 운석충돌과 외계인 침공의 가능성이라는 산포된 쟁점들에 대처하기 위해, 각종 임기응변식의 위원회들을 만들어 통제불가능한 위험들을 '관리'해야하는 시대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는 정 반대를 신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러한 배경은, 현대 뿐만 아니라, 과거에서부터 반복되어왔던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혁명이라는 것은 기존의 관점과 언어 자체를 변혁하는 근본적 변화를 추구해왔습니다. 그런 혁명은, 부분화된 문제들, 파편화된 쟁점들이란 처음부터 우리가 당연시하게 여기던 사회적 프레임 자체의 근본적 오류를 신호한다는 급진적 관점전환에 의해 지탱된 것입니다. 그것은 위험을 관리하는 신중함을 요구하기보다는 바로 그러한 위험과 동일화하는 도박에 가까운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급진적인 윤리입니다. 오늘날 혼란스럽고 뭐가 뭔지 모를, 거시적 전망 자체가 실종된 현대사회를 개탄하는 자들은 내기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전히 그런 거시적 전망을 급조하기 위한 냉소적인 위험관리식의 땜방질을 계속하든가, 아니면 이 사회의 모든 증상들을 단지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규정하는 바로 그 관점 자체를 변혁하든가 말입니다...

 

 

http://blog.naver.com/shim808/30021958962

출처 블로그 > 붉은서재

'라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캉입문-(2)쟁점들  (0) 2007.09.09
라캉입문-(3)거세와 무의식의 주체  (0) 2007.09.09
■ Post Modernism  (0) 2007.09.05
라캉과 현대철학, 홍준기, 문학과 지성사, 1999  (0) 2007.09.05
숀 호머의 <라캉 읽기>  (0) 2007.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