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라캉과 현대철학, 홍준기, 문학과 지성사, 1999

자크라캉 2007. 9. 5. 14:06

 

 

캉과 현대철학, 홍준기, 문학과 지성사, 1999

'이 책은 라캉 정신분석학의 철학적 의의를 탐색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비슷한 작업을 진행 중인 '슬로베니아 학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저자인 홍준기씨는 비록 슬라보예 지젝의 저서를 탐독하긴 했지만, 독자적인 관심을 통해 비슷한 길을 걸어가게 된 것 같다. 굳이 차이점을 따지자면 지젝 등 슬로베니아 학파가 사회학적 관심을 가진 반면 홍준기씨는 (적어도 이 책에서는) 형이상학 쪽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다.

홍준기씨 역시 라캉 정신분석학의 '철학적 의의'뿐만 아니라 '철학사적 의의'를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기 때문에, 이 책은 "라캉과 현대철학"보다 "라캉과 근대철학"이 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지젝은 칸트와 헤겔을 직접 끌어들여 논의를 펼친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게 하기보다 '근대철학을 계승 혹은 극복하려고 하는 현대철학자들'과 라캉을 엮고 있는데, 이는 논의를 지식정치학의 맥락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펼치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학문적으로는 하고 싶은 말을 (아직은) 살짝 에둘러 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이 책은 그 자체로 꽤 잘 구성되었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가 더 명확히 드러날 다음 저서를 기다리게 된다.

홍준기나 지젝이 '라캉 철학'의 성격에 대해 말하는 바를 요약한다면, "우리는 흔히 데카르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근대주체철학'과 '주체의 종언'을 선언했던 프랑스의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라캉을 후자의 그룹에 위치시킨다. 그러나 라캉은 '근대주체철학'의 비판적 계승자이며, 그런 의미에서 합리주의의 계보를 잇는 사람이다."가 될 것이다. 좀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라캉은 근대철학을 외곽에서 때리는 시시한 인물들과는 달리, 근대철학을 그 내부에서 넘어선 (몇 안되는) 형님이다!"쯤이 되지 않을까. 그게 사실이라면 그들이 그 사실을 널리 포교하고픈 '심정'은 '인지상정'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들이 전혀 허황된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라 보고 라캉이론에서 쏠쏠한 재미도 느끼고 있다. 그러나 '포교자'의 그룹에 합류하는 것을 방해하는 몇가지 꺼림칙한 면이 있는데 그것을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어찌됐건 '주체'범주의 재도입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실패했다는 징후다. '그 동네의 실패에서 그(=라캉)만은 벗어나 있지.'라는 주장은 웬지 다음과 같은 공격을 당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는 프랑스의 자식 중에서 가장 큰 위인이었으나, 프랑스를 벗어나면 갓난아이도 그보다 더 크니라..." 한마디로, 이왕 포스트모던이 한계에 이르렀다면, 왜 그 한계를 지각한 포스트모던 조류 내의 사상가에 주목해야 하는 걸까? 애초부터 포스트모던을 씹던 그 '외부' 사상가들이 아니라?

둘째, '첫째'에 대해 예상되는 반론. 라캉의 '주체'이론은 푸코가 느닷없이 '자기에의 배려'를 외치는 것과 다르다. 말하자면 푸코가 '주체'의 (완전한) 해체불가능성을 '몸'으로 느꼈다면, 라캉은 그런 파국이 닥치기 전에 이미 이론적으로 주체가 완전히 해체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해체론의 긍정성을 살리면서 그 한계를 보는 저자로 라캉이 유의미하게 언급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그럴 듯 하고 나 역시 이 비슷하게 생각하는 바다. 그.런.데....

해체론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건 이미 플라톤이 두번이나 보여줬다. 한번은 고르기아스를 논파하면서, 다른 한번은 트라시마코스를 논파하면서. "고르기아스의 말에 한점이라도 진리가 있다면, 왜 그는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사기꾼 역시 사기에 성공하려면 사기꾼 서로에게 신뢰를 줘야 하네. 완전한 사기꾼은 곧 완전한 파멸을 의미할 뿐일세." 여기서 이미 우리는 진리와 허무의 공존을 보게 된다. 문제는 단지 방점 뿐. '진리'에 방점이 찍히나 '허무'에 방점이 찍히나 무슨 차이를 지닐 수 있을까? 하나의 예시를 들어보자면, 어느 견습마도사가 플라톤-아우구스티누스 식으로 "혼돈은 질서의 결여일 뿐."이라고 생각하나, "코스모스는 카오스의 바다 위에 솟아오른 우연적인 섬일 뿐..."이라고 생각하나, 오늘 외울 주문의 내용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게 너무 철학에 적대적인 예시라고 생각한다면, 오늘 외울 주문의 내용 뿐 아니라 상당히 고수준의 마법이론을 서술하는 데에도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겠다. (이 점은 라캉을 넘어 최근 내가 철학이론을 보는 관점과도 관련이 있는데, 나중에 다른 글에서 상술하게 될 것 같다.) 한마디로, 라캉의 관점으로 '철학사를 새로 쓰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 새로 쓰인 철학사는 단지 이전의 철학사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용어'만 반대로 뒤집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다.

셋째, 첫째와 둘째가 좀 추상적이고 막연한 비판이라면 이번 것은 정신분석학의 논쟁 방법에 관한 것이다. 라캉 정신분석학과 철학을 접맥하려는 저자들의 작업이 진정한 성과를 거둘려면 그들은 정신분석학의 '임상'과 정신분석학의 '형이상학'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라캉은 자신의 이론에서 정신분석학의 담론과 철학의 담론을 매우 다른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본다하더라도 정신분석학이 철학에 끼어들때는 '철학의 담론'을 펼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임상'에 한발을 걸치고 경험과학인 척하면서, 기타 형이상학들을 훈계하는 태도는 꼴같잖다. 왜 그런고 하니 흄선생의 훈계 때문이다. "내가 모든 종류의 윤리학 책에서 발견하는 이상한 점은, 그들이 '...이다.'는 형태의 문장을 쓰다가 갑자기 '....이어야 한다.'는 문장으로 비약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실-명제와 가치-명제 사이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 홍준기의 주장대로 정신분석학이 '윤리적 학문'이라면, 비록 그것이 임상에서 태동했으되 이미 (어떤 측면에선) 임상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왜? 흄의 말대로 윤리적 명제는 임상에서 연역되지 않기 때문이다. 임상의 기술은 임상의 기술대로 다른 임상의 기술과 경쟁해야 하고, 비록 임상에서 솟아난 이론일지라도 메타 심리학 (앞서 계속 '형이상학'이라 언급했던 것처럼, 나는 이 역시 폭넓은 의미로는 형이상학이라고 본다.)은 그저 이론 그 자체로 다른 철학 이론과 경쟁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정신분석학은 그 점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고, 오히려 모호한 자신의 포지션을 강점으로 써 먹고 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정신분석학을 철학과 접맥시키는 시도는 훌륭한 것이라 생각하며,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시도한 작업들을 인정할 수 있다. 라캉과 그 지지자들의 공로는 프로이트를 독일 형이상학의 강보에 감싸 안았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 독일은 칸트와 니체를 동시에 보유한 나라다. 라캉주의자들이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그릇된 생물학주의로부터 구출하여 칸트식의 '선험' 위에 올려놓을 때, 그리고 프로이트의 '그것'(이드)의 어원을 니체의 글들에서 발견할 때, 어떤 일이 생기겠는가. 이건 정말로 제대로 된 '그림'이고, 사람을 흥분시키는 그림이다. 그림이 된다고 해서 그게 꼭 '흥분제' 이상의 효용이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것은 좀더 두고볼 일이다.

이 책의 5개장은 나름대로 독립적이므로 반드시 순서대로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라캉이 프로이트의 생물학주의를 어떻게 벗어나고 있는지를 먼저 알고 싶다면, 그러니까 라캉에 대한 선지식이 별로 없다면 "제5장 정신분석학의 위기와 라캉: 외디푸스 콤플렉스와 아버지 개념을 중심으로"부터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라캉이 '아버지'를 생물학적 실체에서 이름으로, 은유로 가져가는 과정을 쉽게 해설하고 있다. 그런 후 1장을 읽고, 그후 각자의 관심에 따라 2,3,4장을 읽으면 된다. 근대철학에 관심이 있는 이는 3장에, 포스트모던에 대한 현대의 논쟁에 흥미가 있는 이는 2장에, 맑스주의나 이데올로기론에 정서가 맞는 이는 4장에 치중하면 된다. 개인적으로는 후설에 대한 재평가까지 겸비한 3장이 제일 흥미로웠고, 수준도 제일 높다고 느꼈다. 그러나 3장은 동시에 가독성이 가장 떨어지는 장이기도 하니 그 점을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