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라캉입문-(3)거세와 무의식의 주체

자크라캉 2007. 9. 9. 15:19

http://blog.naver.com/shim808/30021959195

출처 블로그 > 붉은서재
원본 http://blog.naver.com/paxwonik/40036731429
 
캉입문-(3)거세와 무의식의 주체
 
프로이트로적 무의식의 복귀 

 

  실재와 사물 그리고 욕망과 향락이라는 라캉의 가장 스릴 있는 주제들을 다루기 전에 우선 정신분석을 접할 때 항상 연상시키기 마련인, '무의식'과 '거세'에 대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무의식을 규정할 때, 우리는 그것이 사고를 이끄는 실제 과정으로 다만 우리가 알기를 회피하는 사고과정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무의식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무의식을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진정한 본질로 간주하는 유감스러운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오해는 정신분석을 자아와 의식의 진정한 합치, 상실된 자아를 찾아 떠나는 내면 여행으로 간주하는 더더욱 불행한 통념으로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프로이트는 실제로도 무의식의 영역으로 의식 이면의 잠재된 사고 과정으로서, '시간'과 '인과'를 모르는 사물표상과 이미지들 그리고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과 흥분으로 구성되는 영역으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물론 프로이트는 이 영역이 진정한 자기의 본질로 생각할만큼 순진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여전히 무의식을 실제적인, 그러나 단지 숨겨져 있을 뿐인 메커니즘으로 이해하는 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여기서 라캉은 프로이트를 비판하는 대신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더욱 철저히 프로이트 본연으로 복귀하자!"

  여기서 유의할 점. 사실 프로이트로의 복귀가 라캉 정신분석 전반을 가로지르는 모토입니다. 그럼에도 실제 정신분석적 개념은 프로이트의 것과 달리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런 역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관건은, 프로이트의 실제 개념들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근본적인 절차를 수용하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농담이 있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프로이트는 충분히 프로이트적이지 않은 한에서 이미 라캉주의자였다." 혹은 라캉은 "프로이트 안에 있는 프로이트보다 더 한 무엇"을 간파하고서 그것을 계승하고자 노력햇던 게 아닐까요.

 

  그 무엇이란, 바로 언어가 실패하고 꼬이는 '증상(=욕망의 타협 형성물)'의 지점입니다. 실제로 초기 저작들, '꿈의 해석',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에서 보이듯이, 꿈 농담 그리고 히스테리적인 허튼소리들에 등장하는 논리와 시간 관계를 무시한 분열된 언어들을 통해서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존재를 유추해내었습니다. 우리의 의식을 규정하는 합리성을 벗어나는 어떤 이면의 과정 없이는 도무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는 병리적인 증상들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령 아무런 해부학적 결함도 없는 여성이 신체적인 발작과 경련과 헛소리를 내보이는 임상사례는 정신적 합리성과 해부학적 과학성을 넘어서는 어떤 메커니즘을 떠올리게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프로이트는 그러한 점을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

 

  라캉이 보기에, 프로이트적 사유를 근본적으로 위대하게 만드는 점은, 그가 바로 현실의 분열과 간극과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보았기 때문이며(꿈과 농담과 허튼소리를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 않은 점), 그런 현상을 별도의 설명(=그러나 궁극적일 수 없는)이 필요한, 난포착적인 잉여로 파악했다는 점과(가령 히스테리 여성에 대해 : "이건 단순히 욕구 불만일 뿐이야, 집에 가서 안정을 취하면 해결될 문제라고" 안일하게 말하지 않고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파악한 점), 상기한 제반 증상들을 언어와 관련된 현상으로 파악했다는 점에 있는 것입니다. 언어와 증상과의 관련성은 매우 밀접한 것으로 파악해서 그의 치료 요법도 마찬가지로 분석가와 피분석가와의 담화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이는 라캉주의 정신분석도 마찬가지)

 

  무의식과 언어의 근본적 관련성

 

  라캉은 언어와의 관련성을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과 언어와의 관련성을 직감적으로나마 간파하고 있었지만 라캉은 이 관련성을 더욱 급진화시켜 무의식을 언어의 실패 자체로 파악합니다. 이와 관련한 유명한 명제는,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초기 구조주의적인 발언일텐데, 유감스럽게도, 마치 무의식이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구조주의적 인류학자들이 분석한 상징적 변별체계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뉘앙스의 발언에 속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실 라캉은 무의식을 랑그와 같은 공시적 언어구조 자체로 본 것이 아니라, 무의식을 언어의 실패 결과로서 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의식이란 은폐된, 의식 내 현존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시간적 양상으로 볼 때 무의식이란 이미 뒤늦은 것이거나 혹은 너무 이른 것으로 도래합니다. 이미 뒤늦은 무의식이란 증상적으로 발현(=헛소리 꿈 히스테리 신경증적 발작) 이후에 그것을 사후적으로 분석-해석의 결과물로서 파악된 무의식이고, 너무 이른 무의식이란 우리가 아직 파악할 수 없는 증상의 순수한 발현인 것입니다. 무의식은 결코 우리에게 충만한 의미로서 현존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무의식에 천착해 들어가는 정신분석이 현존하는 자아의 본질적 내명 탐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런 면에서 정신분석은 해체주의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

 

  여기서 라캉이 파악한 언어란 우리의 일상적 담화체계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때, 학적-일상적 담화체계를 규정하는 차별적 기호들의 집합을 포괄하기도 합니다. 이때 언어에 걸린 역설이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언어의 의미란 (1)결코 주체의 내적 의지의 발현에 의해 보증될 수 없고, (2)외부 대상을 투명하게 재현-지시하는 도구적 의미로서만 파악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런 역설의 근본원인이란, 언어는 자신 내부의 변별적 기호들의 변별화 과정으로서만 의미를 산출해낼 수 있기에, 언어는(표현적 의미로서든 도구적 의미로서든)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과 일치할 수 없다는 점일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눈 앞에 보이는 컴퓨터 화면을 언어적으로 지시-재현하고 그런 화면을 바라보는 자신의 의지를 언어적으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결국 그런 컴퓨터 화면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 자신을 주변 세계로부터 분절시키는 작동원리는 언어 내부에 기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언어는 그 의미를 궁극적으로 보증해줄 외부를 상정하지 못한 채, 그런 외부적 시선을 내적으로 돌린 반성 속에서, 스스로의 의미를 고정시키려 한다는 역설을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말할 때" 그 무엇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할 때 여전히 언어학 내적 악순환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듯이 말입니다

 

  무의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언어적 곤란이 신체에 미치는 작용의 결과로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프로이트가 초기에 분석했던 히스테리 환자의 놀라운 점은 바로 아무런 신체적 원인 없이 순순한 정신적 사고과정에 의한 듯한 신체적 증상이 발현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라캉에 이르러서 비로소 언어학적 사고 방식(그러나 이것은 언어학 자체라기보다는 언어의 결여와 내적 악순환에 대한 학문적 고찰에 가까울 듯)으로 이 역설을 재해명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가령 한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는 여성이 궁극적으로 그런 현상을 보인 이유가, 그녀를 둘러싼 상징적 우주 곧 19세기 보수적 부르주아 사회의 언어적 담화 체계 속에서, 그녀를 그토록 성적으로 억압했던 아버지의 죽음을 어떤 식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여야할 지에 대한 딜레마였다는 프로이트의 통찰을 빌려봅시다.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어떤 무의식의 자동적 발현으로 보기보다는, 성을 무자비하게 억눌렀던 폭군적 아버지라는 상징적 위상과 동시에 자상하게 보살핌 받아야할 연약한 아버지라는 모순적 표상이 그녀의 신체에 병리적 작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무의식적인 영역이 구성된 것이라고 '반성적Retrospective'한 관점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난포착적인 잉여로서의 무의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무의식을 어떤 실체로 파악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을 궁극적으로 언어와 언어를 발화하는 주체를 둘러싼 외부적이고 익명적 사고과정이라기보다는, 애초에 관점 자체를 내부로 돌려, 언어와 언표주체 내부 자체에 기입되어 있는 내적 분열과 간극 그리고 실패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무의식을 궁극적으로 난포착적인 것으로, 그래서 정신분석이란 바로 이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메타적으로 말하는 역설적 위상을 차지한다는 섬뜩한 사실과 마주할지도 모릅니다.

 

거세Castration와 욕망Desire

 

  이미 말했듯이 라캉 정신분석에서 남근을 생물학적으로 보아서는 안되듯이 '거세불안'이라는 특유의 용어조차도 그렇게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프로이트가 염두에 두었던 거세불안이란 어머니에게 남근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 자신에게서도 비슷한 결과가 닥치리라는 불안한 예감이, 어머니를 욕망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아버지에게 느끼는 죄책감과 겹쳐지는 심리적 발달과정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라캉에게 있어서 거세란 보다 근본적으로 언어 속에서 주체와 욕망의 발생이라는 근본 사건과 관련됩니다.

 

  거세는 주체의 타자와의 조우에 의해서 발생합니다. 우선 초기 모델로서 다음과 같은 아이와 어머니의 관계를 상정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는 오직 그 외부의 타자로서 어머니만을 바라보고 그는 그 자신이 어머니에게 있어 전부인줄로만 착각한다. 이때 아이는 어머니의 유일한 그 무엇이 되고자  욕망한다." 이때 유일한 타자를 대면할 때 그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인수하는 과정을 라캉은 '소외'라고 명명합니다. 소외 속에서 주체는 타자와의 전인격적인 합일을 추구 혹은 향유하는 것으로 상상됩니다. 결국 이때의 주체는 그가 마주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타자의 자의적인 욕망에 의해 소외되어 있다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이때 주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거세는 또 다른 타자의 존재(가령 아버지의 개입)와 그를 향한 또 다른 욕망을, 주체가 발견할 때 발생합니다.

 

  말하자면 어머니의 시선이 나만을 향하고 있었던 게 아님을, 그것이 아버지를 향하고 있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속한줄로만 알았던 무차별적이고 자의적인 향락(*매우 중요한 용어)의 대상(남근으로 상상되었던...)이 전혀 다른 외부에 있는 것으로 표상되기 시작하는 이 국면에서부터, 그런 표상물은 바로 어머니의 결여를 채우리라 상상되는, 바로 은유적인 '남근기표'로 대체됩니다. 제3자(상징적 언어)의 개입으로 인해, 그런 남근기표가 유일무이한 타자와의 합일적 관계에서 쪼개져 나오는, ('나를 향하지 않은 어머니의 나머지 시선은... 그것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를 의심하게 되는) 과정이 바로 거세과정입니다. 이때 주의해야할 점은 이때의 거세를 '상징적 거세'라고 명명함으로써, 실제 생물학적 거세불안과 같은 상상적 거세와 지평을 달리한다는 점입니다. 아무튼 이때부터 주체는 바로 처음에 인지했던 유일한 타자(어머니)로부터 소외된 관계를 넘어, 그녀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인 욕망의 주체로 재탄생합니다. 물론 이때 욕망의 주체란, 바로 타자의 결여분에서 위치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주체가 무언가 욕망을 하게 되는 것은, 그가 관계 맺었던 타자에게서 바로 그런 욕망의 대상이 결여되었다는 인식을 하고 그것을 찾아 나서는 한에서입니다. 주체의 욕망은, 아니 욕망하는 주체 자체는, 정확히 타자의 결여에서 출현합니다. 

  *처음의 타자와의 전인격적인 합일의 상상적 관계를 '소외'라고 부른다면 제3의 타자의 개입으로 인해 나타난 거세의 과정, 욕망의 대상의 상실을 겪고서 그것의 획득을 위한 끊임없는 동일시 과정을 욕구하는 '욕망의 주체'라는 탄생은 '분리'로서 불려지기도 합니다. 
 

  이 이후부터 동시에 관계맺는 여러 타자들과 그들과의 관계란, 넓게 말해서 대타자라는 강제적인 언어적 규칙에 종속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흔히 말하는 '아버지의 법'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이 점이 의미심장한 점은, 여기서부터 (제멋대로 즐기는...) 전능한 향락적 타자에 대한 믿음이, 그런 타자 자체를 규율하는 언어적 대타자로의 복종으로 전이된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자의적인 어머니의 향락으로 파악되었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모종의 합리적 규칙에 규율되는 욕망으로 인식되고, 주체는 바로 그런 규율을 받아들임으로써 마찬가지의 합법적 욕망의 주체로 승인되는 것입니다. 욕망의 대상이란 제멋대로의 향락과 달리, 바로 금지와 규율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순환하는 것입니다. 고로 향락이 법을 매개함으로써 욕망이 성립되는 사건이 바로 거세의 또 다른 이면적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전의 유일한 타자와의 소외된 관계(너가 나고 내가 곧 너다 식의...) 속에서는 주체가 마주하는 타자의 불가해하고 자기충족적인 향락의 원인이 타자를 규율하는 타자 '바깥'(=상징적 언어와 규율 곧 대타자)에 있다는 점을 깨닫고 나면서부터 그런 향락은 금지된 '욕망'으로 파악되고, 그런 욕망의 중심에는 타자의 '결여'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타자에게는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 그에겐 그것이 금지되어 있다. 타자는 전능하지 않다. 타자가 욕망하는 것은 그 결여를 충족시킬 그 무엇이다...." 이런 식으로 욕망하기 시작하는 주체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 욕망의 주체란 정확히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자입니다. "나는 너에게 있어 무엇인가?" Che vuoi? 욕망은 이런 타자와 자신에게 상호기입된 결여분과 상응하는 것입니다. 너와 나의 관계를 의문짓는 방황하는 결여에 대한 질문.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법에서 '아버지'란 실제 가부장적 권위를 정당화한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겠으나, 실제로 정신분석에서 참조하는 아버지란 현실적 아버지의 실패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역설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절대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라는 참조점은 아버지 혹은 법적 질서의 현실적 무능이 부각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아버지-의-은유'인 것입니다.

     

  실제로 라캉에게 있어서 욕망은 결여의 욕망입니다. 결국 욕망은 결국 결여의 등가물인데, 욕망에 걸린 궁극의 역설이란 그것의 등가물로서의 결여가 도대체 무엇의 결여인지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라캉은 욕망을 그 자체로 정의하려 하기보다는 '감산분'으로서 '잔여분'Remainder으로서 다음과 같이 우회적으로 정식화 함으로써 그것의 근본적 난포착성을 분명히 합니다.

Demand(삶의 전반적 요구)-Need(생물학적 욕구)=Desire(둘의 차이로서 파악되는 모호한 욕망)

*하이힐에 대한 욕망의 모호성을 마찬가지의 감산 공식으로 파악해보는 것이 어떨련지?

 

여전히 지속되는 악순환

 

  물론 욕망을 함으로써 비로소 탄생하는 주체 자신도 애매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주체가 단순히 상징적 제도 속의 일상을 담담하게 살아나가는 것이라면 그는 주체라기보다는 자동인형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체가 주체인 것은 바로 타자를 의심하고 그 속의 결여의 대체물을 찾아 나서는 한에서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다소 실존주의적 성향의 초기 라캉은 '자신의 욕망에 대해 양보하지 말 것'을 정신분석의 주요한 윤리로 내세웠습니다. 타자의 신체 속에 함몰된 망각된 자아를 구출하여서 자신만의 고유한 욕망을 함으로써 온전한 주체로 자리매김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라캉 자신도 그것만으로는 주체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언어가 지시하는 욕망의 대상을 찾아 나서는 주체 역시 그것을 언어 내부에서 찾으려는 기만에 빠짐으로써 병리적인 주체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욕망하는 주체 자체가 이미 병리적인 것임을 지적한달까요. 그래서 라캉은 주체의 실존 방식을 흔히 '도착적', '신경증적', '강박적'인 것으로 분류함으로써 주체란 결코 병리성에서 탈출할 수 없음을, 오히려 병리성이란 주체의 근본조건이라는 점을 명확히 합니다. 그런 주체성에서 성급히 벗어나는 것, 언어와 제도를 포기하는 것을 '정신병'으로 분류한다는 점에서 이런 딜레마는 손쉽게 탈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주체는 앞서 소개했던 언어의 악순환과 비슷한, 내적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주체는 타자 속의 결여를 발견하는 진전을 이룩하지만, 그런 결여를 채울 대상을 다름 아닌 그 타자 속에서 여전히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악순환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앞서 말했듯이 대타자로서의 언어란 언제나 외부를 지시하지만 그 분절된 외부 자체도 언어 내부의 변별화 메커니즘에 의해 지탱되는 것입니다.) 도착증자는 그 타자에 있는 결여를 물신주의적 부인의 형식으로('나는 타자에게 욕망의 대상이 없다는 것을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타자에게 그것이 있다고 믿어') 채우려 시도하는 자이고, 신경증자는 그 결여 자체를 부여잡고 이도저도 아닌 난국에 빠진 자이며, 강박증자는 여전히 타자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불안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자인 것입니다. 타자 속의 결여를 여전히 상징적 대타자 속에서 찾아 나섬으로써 주체는 언제나 빗금쳐진 주체= 분열된 주체= 병리적인 주체(=$)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신분석은, 언어적 상징계적 대타자 외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병리적이고 분열된 대타자 자체에 기입된 역설적 역전이라는 내적 해결책을 궁구합니다. 말하자면 주체라는 것이 언어 속에서 그 스스로를 적합하게 재현할 욕망의 대상을 영원히 상실한 채로, 여전히 그 언어 속에서 그것을 찾아 나서는 분열 양상을 더욱 극단으로 첨예화시키는 것이, 해결책입니다. 물론 이때의 해결책을 택한다고 해서 상황은 실질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지만 중요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말하자면 동일한 상황을 그저 다른 관점으로 그대로 전도시켜버리는 것인데, 이때 주체는 그 스스로가 분열된(불가능한) 대타자 한 가운데에 기입된 스스로의 조건을 직시-반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적 반성을 통해 주체는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자기 자신의 내적 공허함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주체는 실정적 대상들을 비워낸 바로 그런 텅빈 터전으로서 자기 자신을 승인하고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류의 본격적으로 실존적인이고 능동적인 욕망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태도 변환으로 애초에 결여를 안고서 그 결여의 타자 주위를 맴도는 주체의 병리성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전에는, 자신의 욕망을 자기 고유의 본질로 오지각했던 과거에서 탈피하는 것, 자기 욕망에 거리를 두는 것, 나의 욕망 자체를 하나의 질문으로 삼는 것, 나의 욕망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보다 현실적 물음을 던지는 것에서부터 여전히 타자와의 분리 속에서 상실한 대상을 향한 노스탤지어에 의해 여전히 소외되어 있던 주체를 진정한 주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이 주체란 어떤 항구불변의 실체가 아님을 또한 주의해야할 것입니다. 주체란 언제나 이런 태도에 직면할때에야 비로소 주체인 것이지요. 그런 태도를 이끌어내기 위한 분석의 작업은 끝이 없습니다. 정신분석학에게는 매우 좋은 소식이지요.  

 

  *열된 대타자, 불가능한 상징계, 이런 것들이 지시하는 것은 바로 앞서 우리가 논했던 '언어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과 일치하지 못하는 역설'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신분석의 중심에는 언제나 불가능한, 결여를 안고 있는, 무의미를 의미의 원천으로 지니는 언어의 역설이 있다는 점을 언제나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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