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라캉 입문-Intro

자크라캉 2007. 9. 9. 15:25
출처 블로그 > 붉은서재
원본 http://blog.naver.com/paxwonik/400364
 
 
 
 
캉 입문-Intro
 
 

 

  라캉과 같은 사상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러움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나 자신이 옹호할 것 같은 사상가는 더욱더! 그런 의미에서 라캉이라는 사람이 어떤 자인지에 대해 몇 차례에 걸쳐 대략 소개하는 포스팅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난삽하고 난해하며 고도의 역설로 가득차 있고, 또.... 얼마나 미움 받는지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기란 사실 귀찮고 어려우며 번역 여건상 또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할 일이란 다음과 같은 짓입니다. (1)진짜 링 위에 올라가서 라캉과 레슬링하려하기 보다는 라캉이 레슬링하는 장면의 관전 포인트를 제공하기! 시사적인 사례라는 이름의 팝콘과 음료수를 더불어. (2) 라캉이 제시하는 가시밭길을 그대로 따라가기. 그러나 결코 그것이 접근불가능성과 동의어가 아님을 보여주기. (3) 그 가시밭길을 걸어가면서 라캉이 왜 미움받는지를 이해할 것.

  물론 여기서 라캉의 구체적 인품이 어쨌는지와 관련한 정보는 제공하지 않음. 관련 정보는 최근 출간된 라캉에 대한 평전을 참고할 것.

 

 

주체를 성급하게 해체하기 전에...

  

  곧바로 라캉에 대한 서술로 들어가기 이전에 우리는 그가 주체를, 그것도 데카르트 이래 최초로 성립된 근대과학의 주체를 계승한 철학자로 자칭하고 다녔다는 점을 상기해야할 것입니다. 이 점이 오늘날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직접적으로 주체의 해체 내지는 주체의 죽음을 외치고 다니는 현대철학[특히 스피노자와 들뢰즈 계열의 유목적 무정부주의적 정신분열적 철학...]의 조류에 대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마치 라캉을 손쉽게 특권화된 주체를 내세우는 권위주의적 철학자라고 손쉽게 비판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라캉이 성실하게 천착해 들어가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분열된 주체, 빗금 쳐진 주체라는 점에 유의해야합니다. 사실, 프로이트가 첨예화했던 주제인, 분열된 주체, 무의식과 의식의 괴리에 시달리는 주체,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주체, 내가 나로부터 소외되어있는 주체, 이 모든 것들의 출발이 바로 근대 주체 철학에서 시작된 것은 하나의 철학사적 스캔들입니다. 의심의 대상으로서 경험적 자아와 이를 반성-의심하는 초월적 의식 간의 최초 간극을 지적한 것도 데카르트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라캉은 이들 근대의 주체 철학자들을 출발점으로서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데카르트, 칸트, 마르크스, 헤겔 그리고 몇몇 저자들을 넘어설 수 없다. 그들은 진정한 연구 방향,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라캉이 말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일 것입니다. 사실 이 네 철학자들만큼 손쉽게 비판당하는 동네북도 없지요.ㅠ_ㅠ

 

*라캉적 문맥에서도, 우리가 흔히 혼용하는 '자아'와 '의식'은 분명히 구분됩니다. 자아란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구별시켜줄만한 일관된 자기표상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기표상은 자신을 비추어주는 '외부대상'에서 찾아지는 것이기에, 그것은 마치 나르키소스가 수면의 자기반영에 도취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나르시즘적인 것입니다. 가령 나는 눈이 예쁘다. 인상이 서글서글하다. 학점이 좋다. 이런 자기-이미지들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나 상징적으로 재구성되어 되돌아오는 나의 성적표에 반영된 '나'라고 가정된 외부-이미지들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상상계 부분에서 다루겠지만, 자아의 자존감이란 외부의 타자적 이미지에 의존합니다. 

 결론적으로 자아란 항상 구체적 이미지들로 구성된 자기표상과 같은 것입니다. 그에 반해 자기 반성적 의식이란 이 모든 외부의 구체적 내용물을 초월하는 것이지요. 그 스스로를 거울에 비추어본다 한들 스스로를 거울에 비치는 행위 자체는 거울에 비추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의식이란 기술적인Constantve 것이 아니라 수행적Performative인 것입인니다. 그래서 의식은 기술적 언어로 포착될 수 없습니다.

  자아란 외부-이미지 속에서의 자기 소외라고 한다면 의식이란 바로 이 가운데 소외된 나의 본질이라고 말하고 싶어서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의식이란 결국 나 자신에 대해 구체적 내용을 말할 수 없는 텅-빈 본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주의해야합니다. 게다가 이 감상포인트는 헤겔을 읽을 때에도 유효하다는 사실!

 

  요즘의 인기 있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주체는 ‘탈-중심화’되었다는 것이 분명 라캉 정신분석의 요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주체의 해체 내지는 무위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주체는 탈중심화되어 있다는 바로 그러한 점에서 흥미로운 탐구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주의해야할 점은 주체는 항상 언어 속에서, 상징계 속에서 발화하는 주체라는 점인데, 이 말하는 주체는 다음과 같은, 언어학적 방식으로 분열 됩니다: “말해진 주체(언표된 주체)” “말하는 주체(언표행위의 주체).”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각각은 자아와 자기의식에 대응될 것입니다.

 

  앞서 데카르트의 경우에서도 “내가 정말로 나일까?”라고 반성하는 언어 속에서도, 첫 번째의 ‘내’가 말해진, 즉 경험적으로 대상화되고 기술되는 자아라고 한다면, 뒤에 등장하는 ‘나’ 혹은 이 문장 자체를 발화하는 ‘나’는 행위자로서의 자기의식인 것입니다. 이를 맥락을 바꾸어서 말하면 다음과 같은 딜레마로 번역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경험적 대상들 심지어 나 자신의 기술적 특징(난 마르고 안경잡이이고 시커멓고 등등)들을 대상으로서 탐구하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를 말하는 행위 수행적 나 자체는 언제나 언어의 파악 대상의 자리에서 비켜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정합적이고 이성적 지식을 추구해나가는 근대 과학적 주체라 할지라도 정말 활동적인 차원에서 나는 그러한 지식에서 비켜나 있는 것입니다.(난 내가 거머리의 뇌구조에 대해 샅샅들이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근데 이런 짓을 하는 나는 도대체 뭐지?)   

 *구성적 예외로서의 주체. 주체는 언제나 외부 현상에 대한 ‘구성적 예외’로서 존재합니다. 성차 파트에서 말하겠지만, 어떤 자가 일관된 법칙이 통용되는 보편적 지평을 수립-탐구할 때, 그것을 수립한 자 자체는 그런 법칙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역설을 언제나 동반합니다. 그러나 이 두 역설은 불가분의 관계 심지어는 상호보완의 관계를 맺기에 기발한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예외란 보편적 법칙 자체에 ‘구성적’(Constituitive)인 게 아닌 가?‘라는 것이 라캉을 관통하는 핵심 통찰 중 하나입니다.

 

  라캉 정신분석은 이런 분열양상을 주체의 기각 사유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분열이 일종의 주체의 역설적 존립조건이 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가령 앞서 말한 포착될 수 없는 순수 행위 수행적 주체, 혹은 자기 반성적 의식은 과학의 해체지점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으로 과학의 전제가 된다는 라캉의 지적도 이와 유사합니다. 다소 감상적인 방식으로 말하면, 인간이 (실천적으로든 반성적으로든) 스스로가 아니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야 비로소 인간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탈존Ex-ist’이라는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적 철학적 용어를 라캉이 적극적으로 차용한다는 점도 매우 의미심장한 맥락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그 자신의 확고부동한 중심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스스로를 다시 비추어보고 미래로 자기 자신을 던져본다는 점에서 인간은 단순히 존재exist하는 게 아니라 탈존Ex-ist하는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활동 또한 그런 자유의 심연에서 출현하는 엄밀한 학문일 테고요.

 

  쓰고 보니 너무 감상적인 서술이 되어버렸는데, 우리가 손쉽게 무의식과 의식으로 분열된 주체를 실존적 기투로서의, 자유와 동일시할 수 없겠지만 이는 분명 자유의 조건이 된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분열과 난포착적 심연을 탐사하는 정신분석학은 단순히 주체가 직면한 곤란함에 대한 스캔들적 서술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 조건을 탐구하는 학문이리라 기대합니다. 한마디로 일목요연하게 규정된 현상의 계열(가령 물리학의 법칙으로 파악된 현상계)이 어떻게 규정되지 않은 주체의 순수한 탐구 행위로써 ‘출현’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메타과학 담론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과학의 조건으로서의 주체를 탐구하는 담론이 정신분석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유의미한 인식의 선험적 조건을 탐구한 칸트의 방법이 정신분석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문제는 So what?입니다. 순수한 행위로서 출현하는 한 편의 주체성을 과학의 조건으로서 탐구한다는 것은 결국 무슨 의미가 될지에 대해서 아직은 소화해야할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주체성을 또 다른 말로, '욕망'이라고 불러도 큰 무리는 없겠습니다. 그래서 흔히 라캉의 철학을 '순수 욕망 비판'이라고 패러디해 부르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욕망이 출현하는 지점입니다. 욕망은 또한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이런한 질문은 주체와 타자의 문제로 이끌고 갑니다. 욕망이란 주체와 타자가 '언어적으로' 관계맺는 방식이지요. 이런 통찰은 다시금 우리를 향락과 실재에 대한 섬뜩한 통찰로 인도합니다. 이 모든 여정은 우리를 다시금 언어적 역설의 장으로 데려오게 될지 혹시 누가 안답니까? 

 

P.S.

  자아와 의식의 관계??? 제가 느끼기엔 이렇습니다....

 

 자아  /  의식

경험적 / 초월적

소외  /  공백

기술적 / 수행적

 표면적 / 심연적

규정성 /  자유

   나르시즘 / 히스테리

심리학의 대상 / 포착 불가능

                의심의 대상 /  의심의 주체             

        언표된 주체 / 언표행위의 주체

 

P.S. MBTI 등속의 성격유형 테스트가 자기 자신을 아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이지만 여전히 그것은 자기 의식의 심연적 본질을 제대로 포착하는 데 부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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