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깡, 욕망의 시니피앙 / 김인호
라깡이라는 기표(시니피앙)는 붙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자꾸만 달아난다. 그가 설명하는 기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저 멀리 달아나서 우리를 비웃고 있다. 어쩌면 라깡, 혹은 어떤 개인이라도 그것을 언어로 설명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라깡에 대한 필자의 글쓰기도 라깡이라는 기표를 찾는 데 반쯤은 실패를 감수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라깡이라는 실체를 붙잡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냥 주저앉고 말아야만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그러기에 라깡은 현대를 설명하는 데, 혹은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너무도 많은 논거를 현대의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라깡은 1981년에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담론은, 즉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한 그의 구조주의는 철학·문학·언어학·사회학 등에서 깊이 연구되고 있다. 라깡은 담론으로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그는 소쉬르의 언어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레비스트로스 인류학 등을 통해 사상적인 맥락을 넓혀 갔다. 특히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새롭게 해석하고 더욱 풍요롭게 심화시키는 데 학문적인 열정을 바쳤다. 프로이트가 없었다면 라깡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를 정신분석가만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다. 그의 이론은 정신분석의 측면보다는 철학적인 측면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프로이트를 뛰어 넘어 스스로 독특한 사상 체계를 형성해 낸, 그를 철학자 또는 구조주의자로 나아가게 한다. 많은 면에서 그는 반인본주의적이다. 그것은 인간을 거부하겠다는 의도보다는 인간에 대한 더 폭넓은 지점을 발견하겠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그는 구조주의로 시작하여 탈구조주의로 넘어가는 지점의 문을 연다.
라깡을 알려면 기표(시니피앙), 무의식, 남근, 타자 등 많은 개념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명료하게 개념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단지 그의 저술인 『에크리』를 통해 그 자신의 사상이나 개념을 더듬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기존의 ‘주체’ 개념을 어떻게 변형시켜 나가고, 새롭게 등장시킨 ‘구조’라는 개념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는지 살펴볼 때, 우리는 얼핏 라깡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먼저 그가 발견한 ‘타자의 세계’를 찾아가 보자.
1. 바라봄과 보여짐
바다 위에 깡통이 떠 있다. 그 깡통이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나는 그 깡통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그 깡통은 내가 바라보려고 했기 때문에 바라보게 된 것일까? 아니면 그것이 보여졌기 때문에 본 것일까? 어쨌든 나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확실한 계기를 알 수 없다. 사실 그것은 나의 의도가 개입되어 본 것일 수도 있자만, 의도와는 상관 없이 보여졌기에 본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볼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그 순간 빛이 깡통을 비추었기에, 혹은 나의 무의식의 어떤 영역이 그 어떤 것을 찾고 있었기에, 그 순간 그 존재가 보여진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빛은 직선으로 발산되지만 때로는 굴절되고 확산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빛은 사물을 꼭 제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기괴한 형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어느 땐 사물이 아니라 빛 자체만으로 보일 때도 있다. 그렇다면 화가는 깡통을 그려야 하는가, 빛을 그려야 하는가? 그동안 원근법이 회화에서 중요한 원리였다면, 평면광학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빛의 원리는, 홍채가 거리뿐만 아니라 빛에도 반응한다는 것을 밝혀줌으로써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열었다. 이때부터 대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이 인정된다. 깡통은 원근법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부피로나 질감으로 존재할 수 있고, 또는 엉뚱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화가는 깡통을 의식적으로 그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깡통이 화폭 위에 무의식적으로 담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바다 위의 깡통은 화가의 ‘바라봄’의 의식에 앞서 ‘보여짐’의 의식으로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좀더 ‘나(주체)’와 ‘타자’의 문제로 들어가 보자. 나의 시선(바라봄)이란 무수한 ‘보여짐’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보여짐’이 ‘바라봄’을 존재할 수 있게 한다. ‘나’란 존재는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지만, ‘나’는 모든 방향에서 보여지는 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라깡은 지금까지 주체를 추구하던 철학이 ‘바라봄’으로 나타내어진 일종의 ‘인지착오’에 빠져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조금 방향을 바꾸어 무의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흔히 꿈을 꾸게 되면 ‘그것은 단지 꿈일 뿐이야’라고 말하지, ‘나는 이 꿈의 주체야’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꿈은 우리의 의식이 바라보는 주체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보여짐’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꿈의 주체란 없는 것일까? 라깡은 그런 식으로 무의식을 탐구한다. 모든 ‘보여짐’을 포괄한, 모든 타자를 수용한, 그래서 온갖 욕망들이 들끓는 무의식의 주체를 찾아내고자 몰두하는 것이다. 그는 전통철학적 주체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모든 태도들이 이것에 다다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타자의 시선을 철저히 배제시키기 때문에 ‘보여짐’의 사유를 배제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깡은 ‘보여짐’의 개념을 발전시켜 대문자 타자(Other)를 발견한다. 이것을 ‘큰타자’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소문자 타자(other)와는 달리 모든 ‘보여짐’이 포함된 기표(시니피앙)를 말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무의식 전체를 포함한 ‘복합적인 나’를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좀더 라깡이 발견한 타자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하자. 여기에는 ‘말하는 나’와 ‘언급당하고 있는 나’가 있다. 다시 말해, ‘말하는 나’는 ‘바라봄’의 주체요, ‘말해진 나’는 ‘보여짐’의 주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라는 주체 속에 ‘바라봄’과 ‘보여짐’의 두 개의 주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라깡은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즉,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또는 생각할 수 없는 무의식 속에서도 존재한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라깡은 ‘자아’를 해체한다. 즉, 실존적 자아나 현상학적 자아를 해체하는 것이다. 또한 라깡은 여기에서 나아가 기표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만들어 낼 때에만 의미를 갖게 되는 ‘부재의 주체’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라깡에게 총체적인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우리가 ‘말하는 바’와 우리가 ‘의미하는 바’ 사이에는 주체보다는 틈새가 존재한다. 어느 땐 주체로서의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짐을 당하는 내가 존재하게 되고, 그래서 자기 말의 주인인 독자적인 인격으로서보다는 내 속에 있는 타자의 욕망으로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가 존재할 수도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타자는 남이 아니다. 오히려 무의식 속에 들어 있는 자기 자신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이것을 했는데 저것으로 오인을 받을 수 있고, 그의 욕망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큰타자의 욕망이 될 수 있고, 그는 바라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보여진 사람일 수도 있고, 때로는 그 오인을 통해서 진리로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자 이제 ‘타자’의 개념을 어느 정도 이해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라깡의 ‘주체’는 동일자 철학의 인식론적인 주체가 아니라 ‘고정되지 않은 주체’로 사용된다. 또한 ‘타자’는 주로 큰타자를 지칭한다. 라깡은 ‘바라봄’으로 바라보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거울 속의 환영, 곧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거울 속에서 바라보는 ‘나’는 비추기만 할 뿐 보지를 못한다. 그 거울 속의 ‘나’는 바로 ‘나의 부재’를 말한다. 그리하여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본다’라는 인식을 통해서 ‘보여짐의 나’를 상정할 수 있게 되고, 비로소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출발선상에 서게 된다.
2. 남근을 찾아가는 욕망
타자를 찾아서 하나가 되려고 하는 욕망은 언제나 결핍을 느낀다. 결핍 속에서는 언제나 욕망이 들끓는다. 이때 ‘남근’이 환영처럼 떠오른다. 오디푸스 삼각형 꼭대기에서 빛나는 욕망은 우리의 꿈이고 환상이다. 라깡은 『욕망, 그리고 ‘햄릿’에 나타난 욕망의 해석』에서 말한다. ‘주체가 박탈당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남근Phullus’이다. 대상은 이 남근에 의해 환상 속에서의 역할을 부여받고, 환상을 근거로 욕망이 형성된다.’
우리가 말하는 언어로는 실체를 보기가 어렵다. 오히려 언어는 실체의 죽음을 초래한다. 단어로 사물이 재현될 때 사물은 없어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체는 담론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다른 사람의 발화에 의해서 명명됨으로써 실체를 상실하게 된다. 실체는 지시적인 언어가 아니라 환상으로나 얼핏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논리적인 언어보다는 말실수, 농담, 웃음의 틈새 속에서 존재의 얼굴이 살며시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근도 환상의 흔적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남근)’이 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누구도 남근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페니스가 아니다. 라깡이 사용한 ‘남근’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로마에서 따 온 ‘환영simulacrum’의 비유어로서 ‘존재 속에 들어 있는 결여lack-in-being’를 말한다. 주체는 그러한 결여 속에서 구성되며, 그 결여를 느끼는 사람은 누구나 남근의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남근은 잠재적으로 부재한다는 그 지위와 더불어서 잃어버린 욕망 대상의 대역을 담당한다. 남근은 목적도 아니고 어떤 최종 진리도 아닌, 역설적인 의미에서, 불가능한 정체성의 최고 기표가 되는 것이다. 남근은 기표들 중의 기표이며, 나아가서는 만족되지 못한 욕망이다.
따라서 남근은 우리를 가득 채워주리라고 기대된다. 언어로 대상이나 존재를 표현하는데 부족함을 느낀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남근이 존재하게 되고, 우리는 그 남근을 찾아 그 부족함을 메꾸고자 한다. 남근은 대상을 표현하는 언어와 대상 자체와의 차이를 나타내는 표시이다. 그래서 남근은 언어의 상징계 속에서 언어의 결핍을 메꾸어주기 위해 떠돌아 다닌다.
이제 오디푸스구조를 살펴보자. 그 속의 남근을 좀더 면밀히 살펴보면,
첫째, 오디프스 초기에 어린아이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어머니와의 접촉이나 관심이 아니다. 아이는 어머니를 자신의 동체(同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머니의 모든 것이 되어서 그녀의 삶에 필수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 즉 남근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제 아이는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며,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욕망의 대상인 남근과 동일시한다.
들째, 그런 단계를 거쳐 아이는 오디프스를 통해 언어의 상징계로 진입한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자신의 욕망을 억제시키고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근친상간의 ‘금지’를 명하고, 모든 것을 ‘하지 마’ 하며 질서지우는 ‘법’의 존재가 된다. 그런 면에서 아버지는 약탈자이다. 그는 아이에게서 욕망의 대상인 어머니를 빼앗고, 어머니에게서는 남근적 대상을 빼앗아 가는 사람이다.
셋째, 그리하여 성장한 아이는 결여를 메꾸며 마침내 아버지와 동일시된다. 이때 아버지는 ‘법’의 대리인 큰타자로 존재한다. 이렇게 해서 아이가 자기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게 되면 ‘남근을 갖게 됨으로써(남근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디프스를 통과하게 된다.
거세컴플렉스가 나타나기 전에 어머니는 아이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아이에게 타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언어의 상징계에 들어가게 되면, 아이는 어머니에게 남근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점차 남근을 상징적인 기능으로 변화시켜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부터 아이에게 주체가 생겨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결여를 느끼고 있는 주체이다.
결여가 있는 한 욕망이 분출한다. 거세된 실체와 현실을 전제할 때라야만 그것을 채우려는 욕망이 발생한다. ‘거세가 가정됨으로써 결여가 생겨나고 이 결여를 통해 욕망이 생겨난다. 욕망이란 욕망에 대한 욕망이다. 즉,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에크리』)
라깡은 프로이트의 오디푸스구조에서 <거세-결여-욕망>을 발견하여 기표의 세계를 설명한다. 프로이트는 ‘거세 콤플렉스’에 의해서 문화가 전달되고, 인류가 현 상태의 특성을 지속하게 되었다고 믿는다. ‘거세’가 상징하는 것은 자연의 질서와 반대되는 ‘인간의 질서 바로 그 자체’이다.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통과의례의 과정을 거친다. 그것은 자연의 질서에서 문화의 질서로 이행하는 의식이다. 라깡에 의하면 이러한 거세란 모든 인간이 상징적인 질서로 편입되면서 치러야만 하는 가혹한 댓가라고 한다. 그런데 문화의 질서란 언어를 획득해야만 가능해진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인간의 법칙(제도, 법 등)을 숙지하게 되는 것이다. 남근은 아버지에 의해 거세되었지만 그 아버지의 법과 이름이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든다. 따라서 아버지의 법은 아이에게 욕망의 원초적 억압을 주는 동시에 대체적 욕망의 허용이란 권리를 인정해 주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은 타자를 향한다. 끊임없이 타자를 찾음으로써 그 결핍을 메꾸고자 한다. 타자와 하나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은 나르시스가 되어 물 속에 비친 자기의 타아(他我)를 잡으려다가 익사하고 만다. 이래서 합일의 욕망은 결국은 죽음에의 욕망이다. 곧, 죽기 이전까지 욕망은 채워질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당신에게 없는 것이다. 당신에 대한 헌신으로, 당신을 위한 희생으로, 나는 당신을 채워줄 것이고 당신을 완성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따름이다.
누구나 거세 극복을 통해서 ‘아버지’로 나아간다. 그렇다고 결혼을 하고 문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해서, 그 결핍이 메꾸어지고 욕망이 끝나는 것일까?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사랑을 요구하지만 아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젖이라는 욕구의 충족일 뿐이고, 연인이 대상에게서 사랑을 원하지만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성적 욕구의 충족일 뿐이다. 사글세를 사는 사람이 집을 샀다고 해서 욕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부자는 더 큰 돈을 욕망한다. 주체를 갖게 되었다고 해서 완벽한 대상(기표)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욕망은 영원히 순환한다. 우리가 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놓쳐버리는 기표, 언제나 우리 주위에서 떠돌고 있는 그 절대군주와도 같은 기표를 찾아서 우리는 오늘도 헤매고 있다.
이런 면에서 라깡의 주체는 이전의 주체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주체이다. 아니면, 주체라고 이름붙일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차라리 사물이나 언어의 구멍에서 엿볼 수 있는 어떠한 것이다. 차라리 그것은 ‘꿈’ 혹은 ‘무의식’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어떤 것이다.
3. 주체에서 구조로
라깡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패러디하여 말한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사유와 존재의 완전한 일치를 구가했다면, 라깡은 데카르트와는 달리 사유와 존재가 쪼개진 입처럼 ‘입벌림’을 하고 있다는 데서 인간이란 존재를 이해하려고 한다.
라깡에게 있어서 주체라는 것은 결코 자율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대상으로서 기표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무의식 속에서 주체는 타자로서 많은 기표들의 결과이거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주체는 자기 의식의 반성에 의해 투명해진 입법자의 그것이 아니라, 끝없이 타자를 욕망하는 ‘쪼개진’ 혹은 ‘떠도는’ 주체이다. 그리고 주체라는 것은 형성 초기부터 이미 자기 자신 아닌 타인(어머니나 아버지)의 매개를 통하여 거기에 복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라깡은 진정한 실체를 찾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먼저 에고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에고는 ‘자아를 잘못 뜬 형mould’에 불과하다. 그 에고에서 벗어날 때 주체를 확립시킬 수 있고, 또한 기표로 나아가는 해방을 맛볼 수 있다고 말한다. 에고로부터 질서를 구하는 행위는 오히려 주체를 소외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주체는 ‘고정된 주체’가 아니라 ‘담론 속에서 가면을 쓰고 항상 변하는 주체’이다. 이런 주체는 담론 속에서 반영되는 주체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주체의 에고로 규정된 모든 철학을 거부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큰타자Other를 찾아나설 수 있게 되고, 에고가 질서를 세운 언어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발화(말, 글)를 할 때 의미가 언제나 이리저리 바뀌거나 대체될 수 있는 것이라면, ‘고정된 주체’는 원래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탈중심적 자아이론에서 기의는 기표 위에서 그저 미끄러질 따름이다. 주체가 자기자신과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진실을 찾아낼 수 있는 지점은 기의가 미끄러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때이다. ‘진실은 말하자면 기표와 기표 사이의 ! 공간에, 그 사슬의 구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럴 때 이전의 ‘기의 중심’ ‘로고스 중심’의 모든 철학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라깡은 이렇게 주체를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찾는다. 그가 찾아낸 것은 구조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말은 그가 구조에 천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무의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조란 무엇인가? ‘구조’를 알아야 라깡을 이해할 수 있다.
소쉬르의 말대로 언어는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의 구조로 되어 있는데, 기의가 언어의 내용(의미) 측면이라면 기표는 표현(발화)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소쉬르가 발견한 언어의 구조에서 나아가, 구조주의자들은 주체(인간)를 무대 위로 올려놓는 독특한 장치, 즉 구조를 찾아낸다. 구조는 ‘차이의 공시적 체계로서의 상징적 질서’이거나, ‘세계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서 욕망구조(라깡), 담론구조(푸코), 코드(바르트)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구조주의적 사유로 인해 주체에 종속되어 있던 이전의 대상(세계, 자연)은 주체의 예속에서 벗어나 하나의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 구조주의자들은 ‘구조’를 ‘또 하나의 초월성’이 아니라, 단지 ‘세계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내재화된 어떤 것’으로 보는 것이다. 라깡은 구조에 대해서 말한다. ‘구조는 구성요소들이 집합으로 정의될 수 있는 모든 관계를 상징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조란 형태가 아니다. 문제는 바로 구조만이 사유를 하나의 지형학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구조는 이론적인 모형이 아니라 주체를 무대 위로 올려놓는 독특한 장치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에크리』) 그러나 이번에는 어떤 면에서 대상은 주체가 아니라 구조에 예속되게 된다.
다시 주체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라깡은 주체가 언어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어떤 면에서는 언어가 주체를 만든다. 불완전하게나마 주체는 언어의 세계(상징계)를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어에 구속되어 있다. 그 어느 것도 언어의 벽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주체는 언어에 의해 구성되며, 언어를 통해 세계를 전유한다. 프로이트적 조망으로 ‘인간은 언어에 포박된, 그리고 언어로 고문당하는 주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라깡은 말하는 것이다. 다시 라깡은 말한다. ‘주체는 결과이다. 이 결과에서는 언어의 구조가 발견된다. 그리고 이 결과에 의해 주체는 물질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언어의 관계들이 주체에게 반향된다.’(『에크리』)
기실 라깡의 ‘주체’는 중심이 없는 조직망구조에 존재한다. 그래서 누구라도 주체에 대해서 명확히 정의내릴 수 없고, 단지 주체가 언어를 통해 간신히 그 조직망의 틈새를 들여다볼 뿐이다. 이제 주체는 구조의 중심이 될 수도 없으며, 오히려 타자가 있을 때라야 존재가 가능해지는 화용론적인 존재가 된다. 라깡의 ‘진정한 주체’는 타자를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주체이고, 과정 속의 주체이다. 우리는 단지 언어를 통해서 과정 속의 주체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단지 구조만이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런 말을 통해 존재의 낯선 차원으로서 ‘탈중심화된 주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기표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잠시 신체의 성감대를 생각해 보자. 성감대는 일종의 원초적인 글자이다. 입술이나 눈까풀, 또는 구석진 신체의 부분은 쾌략을 향하여 열린다. 왜 그러할까? 신체에 새겨진 글자는 본능, 혹은 본질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것은 발화된 언어보다 앞선다. 신체가 아무리 심하게 억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은밀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지점, 그 틈새를 통해서 진실에 접근해 갈 수 있다. 주체가 임의로 소유할 수 없는 신체는 틈새로서 빛나며 본질의 세계를 언뜻이나마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틈새는 무의식이라는 구조로 들어가는 문이 되며, 그 자체로 구조가 된다. 그러한 틈새가 없다면 실체는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오디푸스 콤플렉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합하고 싶은 욕구를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의 근원적인 구조이다. 오디푸스는 문화와 언어로 이루어진 인간세계에 대한 무의식적인 표출이다. 오디푸스는 바로 무의식적인 형태의 사회구조이다. 이렇게 라깡은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인간화 과정의 중심점으로 본다. 그 구조를 이해할 때만이 틈새가 열리고 우리는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존재의 조직망을 우리에게 상세히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오디푸스 삼각형이 우리 머리 위에서 전제군주처럼 군림하는 것만을 보여준다.
4. 해체의 토대를 마련하다
라깡은 존재의 구멍, 즉 구조의 틈새를 통하여 자신의 사유를 체계화시키지만, 한편으로는 본격적인 탈구조주의의 작업에 일익을 담당한다. 라깡이 발견한 구조의 틈새에서 탈구조주의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역동적인 힘’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라깡의 연구는 그가 대상으로 삼은 언어와 무의식을 넘어서 존재를 이해하는 중요한 담론이 된다. 그는 주체의 무의식 깊은 곳에 들어 있는 면들을 훌륭하게 설명해낸다. 그리고 그는 나름대로 독특한 사고의 조형물을 만들어낸다. 그러면서도 라깡의 이론은 진리를 경험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탈중심적인 사유를 이루어낸다.
라깡의 이론은 복잡하면서도 정교하다. 그의 이론이 우리가 획일적으로 지향하던 사고의 폭을 확대시켰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아직도 진리에 대한 욕망 때문에 데카르트의 이성 중심적인 사유와 헤겔 이래의 주체 문제를 완전히 전복시키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라깡은 현대의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가 내보인 ‘틈새’가 정말로 진리나 본질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을 내보이느냐 하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라깡 식의 사유로 인해 많은 소외된 것들은 복위되고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특히 해석학이나 패미니즘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의 새로운 실체를 발견하고, 무의식의 작동 원리를 찾아낸 라깡의 노력에 경의를 표할 수 있다.
그래도 라깡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세력들도 만만치는 않다. 그들은 과연 무의식이 라깡이 말한 것처럼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을까 회의를 한다. 그들은 라깡의 가정이 지나치게 비약된 것이라고 말한다. 무의식을 언어처럼 환유나 은유로, 또는 기표로서 구조화시키려는 의도는, 무의식의 카오스적인 특성을 잊게 만든다는 것이다. 언어가 무의식을 만든다는 것은 놀라운 제안이지만, 이것 또한 무의식을 발생시킬 수 있는 많은 요인들을 배제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을 구조화시키려는 의도가 인간이 상징계에서 벗어나 실재계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준다고 할지라도, 라깡의 구조화는 자칫 또 다른 오인을 낳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데리다는 라깡이 구조에 묶여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무의식은 분명히 언어와 닮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무의식은 기표와 차원이 다른 그런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라깡에 의하면 모든 기표는 궁극적으로 주체를 표상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체란 담론의 기표 전개를 소통시키는 것으로서 기표의 그늘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표시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표상을 성립시킬 수는 없다. 결핍으로서 주체는 다만 이미 전개되어 있는 여러 기표에 있어서 출현해 온 기표에 의해서 표상될 뿐이다. 따라서 고정된 기표 속에 주체를 표상한다면, 주체는 라깡이 전체에의 고유성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내는 것을 제안하는 역설적인 기표의 다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모순을 발생시킨다.
이쯤 되면 라깡의 절대기표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담론성으로 살아 있지만 수많은 검증을 요구한다. 라깡은 동일자 철학을 거부하고 있지만, 기실 그의 기표는 신을 대신하는 로고스의 또다른 대체물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지점에서 데리다는 라깡이 행한 오디푸스 컴플렉스의 과대평가, 남근의 과대평가에 대해서 비판을 가한다. 그것은 한낱 남근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남근이성중심주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라깡과 마찬가지로 기의보다는 기표 측면의 사유를 전개시키지만, 기표를 절대적인 위치에 올려 놓지는 않는다. 바르트는 라깡의 기표의 연쇄구조를 통해 언어가 의미화 작용하는 원리를 발견하지만, 마침내 ‘주체의 죽음’,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면서 그의 기표에서 벗어난다. 푸코는 라깡의 무의식적 구조를 사용하여 담론의 질서를 세우지만, 계보학적인 ‘관계들의 그물망’을 만들어내어 라깡의 정태적(情態的)인 조직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들뢰즈는 라깡의 정신분석에서 정신분열자분석을 끌어내지만, 오디푸스 삼각형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한다고 보고서, ‘결핍을 메꾸려는 욕망’이 아닌 ‘생산하는! 욕망’을 만들어낸다. 이들은 모두 라깡을 하나의 텍스트로, 또는 하나의 담론으로 보면서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도 라깡은 무수한 도전과 전복에 직면해 있지만, 푸코의 말대로 ‘담론성의 창설자’라고도 말할 수 있다.
어쨌든 라깡의 작업은 정신분석학 담론으로 당대의 모더니즘 국면을 포스트모더니즘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이제 구조의 ‘사이’에서 라깡을 넘어선 탈구조주의자들은 ‘열린 운동’을 발견하고서 근대의 ‘주체’를 좀더 철저히 와해시키면서 탈근대를 열게 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참고문헌
1.자끄 라깡, 『욕망이론』, 권택영 편, 서울: 문예출판사, 1995.
2.아니카 르메르, 『자끄 라깡』, 이미선 역, 서울: 문예출판사, 1994.
3.마단 사럽, 『알기 쉬운 자끄 라깡』, 김해수 역, 서울: 백의, 1995.
4.셰리 터클, 『라깡과 정신분석 혁명』, 여인석 역, 서울: 민음사, 1995.
5.권택영, 『영화와 소설 속의 욕망이론』, 서울: 민음사, 1995.
6.박찬부, 『현대 정신분석 비평』, 서울: 민음사, 1996.
7.계간 『현대시사상』 94년 여름호.(통권 19호)
8.질 들뢰즈·펠릭스 가따리, 『반오디푸스』, 최명관 역, 서울: 민음사, 1995.
9.아사다 아키라,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이정우 역, 서울: 새길, 1995.
10.에디츠 쿠르츠웨일, 『구조주의의 시대』, 이광래 역, 서울: 종로서적, 1990.
11.윤호병 외, 『후기구조주의』, 서울: 고려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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