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씨실

信劑公神道碑銘<신재공 신도비명>

자크라캉 2006. 6. 26. 17:04

진주군 신재공 신도비명(眞珠君 信齋公 神道碑銘)

  강릉(江陵) 심군(沈君) 박() 및 노영(魯永)이 쇠병(衰病)한 몸으로 어렵게 대관령(大關嶺)을 넘어와 그의 선조 신재공(信齋公)의 묘비문(墓碑文)을 부탁하기에 내가 차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고 감히 그의 평생 사적을 서술하니 아마 후세의 군자(君子)가 이것을 인하여 그의 훌륭한 점을 알 것이다.

  공의 휘(諱)는 동로(東老)로서 처음 휘는 한(漢)이며 삼척인(三陟人)으로 신재(信齋)는 그 호(號)이다. 고려(高麗) 때 휘 적충(迪)이 문림랑(文林郞) 군기주부(軍器主簿)로 진주군(眞珠君)에 봉해졌는데 공은 그 후손이다. 증조부의 휘는 후(候)로 좌승선(左承宣) 병부시랑(兵部侍郞)이며 조부의 휘는 윤의(允儀)인데 양온령(良令) 동정(同正)으로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상호군(上護軍)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아버지의 휘는 수문(秀文)인데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으로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증직되었다.

  공은 충선왕(忠宣王) 경술(庚戌 : 충선왕 2, 1310)에 태어났는데 젊어서부터 글을 잘지어 훌륭한 명성(名聲)이 있었다. 충혜왕(忠惠王) 임오(壬午 : 충혜왕 30, 1342)에 생진(生進 : 생원 진사) 제2등으로 합격하여 늦가을에 직한림원사(直翰林院事) 판성균관학록(判成均館學祿)이 되었으며, 충목왕(忠穆王) 을유(乙酉 : 충목왕 1, 1345)에 예문 검열(藝文檢閱)로 임명되었으며, 병술(丙戌 : 충목왕 2, 1346)에 수찬춘추관(修撰春秋館)으로 임명되었다.

  때마침 문간공(文簡公) 안 종원(安宗源)이 사한(史翰)에 보직(補職)되었다가 임기가 차 전임(轉任)할 때를 당하여 마침내 공에게 그 관직을 사양하였으니 공이 일찍이 명류(名流)에게 추대받음이 이와 같았다. 정해(丁亥 : 충목왕 3, 1347)에 판밀직당후관(判密直堂后官)이 되었으며, 무자(戊子 : 충목왕 4, 1348)에 승봉랑(承奉郞) 통례문 지후(通禮門祗侯)로 전임되었다가 뒤이어 통주사(通州使)에 임명되어 정령(政令)이 깨끗하고 간편하니 백성들이 대단히 편리하게 여기었다.

  충정왕(忠定王) 신묘(辛卯 : 충정왕 3, 1351)에 내직(內職)으로 들어가 지제고(知制誥) 우정언(右正言)이 되었으며, 공민왕(恭愍王) 신축(辛丑 : 공민왕 10, 1361)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가 특지(特旨)로 봉선대부(奉善大夫) 중서사인(中書舍人) 지제고(知制誥)가 되었다. 이때에 당시의 정치가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을 목격하고 마침내 삼척(三陟)의 별업(別業 : 별장(別莊))으로 물러가시니 공민왕은 공이 동쪽으로 돌아간다고 하여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내려주어 은총(恩寵)을 베풀었다.

  목은(牧隱) 이공 색(李公 穡)이 학사승지(學士承旨 : 고려의 대제학(大提學)이 되어 공민왕에게

  『심한(沈漢)이 나이나 덕(德)이 모두 높고 학식(學識)도 신(臣)의 위에 솟으니 신의 관직을 그에게 주소서.』하고 아뢰었으나 왕은 윤허(允許)하지 아니하고 칙명(勅命)으로 죽서루(竹西樓)에 놀게한 뒤에 자주 불러 봉정대부(奉政大夫) 예의한서(禮儀判書)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에 이르렀으며 또 식읍(食邑)도 하사(下賜)하고 진주군(眞珠君)에 봉(封)하여 융숭한 예우(禮遇)가 온 세상을 진동시켰다. 그러나 끝내 부임(赴任)하지 아니하고 산수(山水)가에 소요(逍遙)하며 시례(詩禮) 속에 우유(優遊)하면서 그의 일생을 마쳤으며 또 사람들을 가르침에도 게을리 아니하여 성취(成就)된 사람들이 많았다.

  삼척부(三陟府)의 북쪽 10리쯤에 있는 능파대(凌波臺) 서쪽에다 조그마한 정자(亭子)를 지었는데 천하에서 뛰어난 경치라고 말할만 하다. 현판(懸板)을 해암정(海巖亭)이라고 붙이고 날마다 술마시며 시(詩)를 읊음으로써 스스로 즐기어 그 한가롭게 회포(懷抱)를 푸는 것을 사람들이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으며, 덕행(德行) 문장(文章)은 또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및 여지승람(與地勝覽)에 나타나 있다.

  공의 돌아간 연월(年月)은 전한 바가 없으며 강릉부(江陵府) 남쪽 망상촌(望祥村)에 장사지냈다.  부인(夫人)은 옥당부인(玉堂夫人) 삼척 김씨(三陟金氏)로서 합문지후(閤門祗侯) 유(儒)의 딸이자 대장군(大將軍) 정휘(正暉)의 손녀이다. 묘소(墓所)는 공의 묘소에 부장(부葬)하였다.

  아들 공무(公懋)는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이며, 딸은 부정(副正) 김 경생(金慶生)에게 시집갔다. 공무의 아들에 원복(原福)은 현감(縣監), 원충(原忠)은 학사(學士), 원달(原達)은 절제사(節制使), 원련(原連)은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 원린(原麟)은 호장(戶長), 원룡(原龍)은 별장(別將)이며, 원립(原立)이다.  딸들은 윤 원계(尹元桂), 조 윤의(趙尹義), 주서(注書) 김 구(金臼), 서 수충(徐守忠), 황 원범(黃原範), 중랑장(中郞將) 김 광유(金光裕), 장군(將軍) 김 양인(金良印)에게 시집갔다.

  공이 돌아간 지가 벌써 4백여 년이 되었으나 그 동안에 벼슬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군수(郡守) 산보(山甫), 현감(縣監) 가보(家甫), 사정(司正) 충보(忠甫), 군수 희전(希佺), 참봉 관(灌), 지제고(知制誥) 준(濬), 좌찬성(左贊成) 홍문제학(弘文提學)으로 호는 적연(淵)인 언경(彦慶), 참봉 언량(彦良),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으로 호는 어촌(漁村)인 언광(彦光), 위수(衛率) 두(), 훈도(訓導) 주한(周瀚), 감찰(監察) 열(說), 직장(直長) 재(材) 등이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하였으며 후손들이 지금 대단히 번성하여 남은 경사(慶事)가 한창 다하지 아니하고 있다.       

  아! 목은(牧隱) 같은 현인(賢人)으로서 반드시 실정(實情)에 지나친 말이 없었을 것이다. 목은이 조정(朝廷)에 주청(奏請)한 말에 의하면 공의 가슴속에 품은 경륜(經綸)이 참으로 국가에서 소중히 여기는 대상이 되어 인망(人望)이 쏠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지(召旨 : 임금이 부르는 명령)도 여러번 내려 공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지 아니하였건만 끝내 훌쩍 먼 곳으로 떠나가 얽매인 바 없이 한번 간 뒤로는 다시 되돌아오지 아니하여 산택(山澤)의 고상(高尙)한 선비와 같은 점이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가?

  대체 성의(誠意)를 다하고 힘도 다하여 임금이 알아줌에 보답할려고 하는 것은 바로 신하(臣下)의 본디 심정인 것인데 공은 임금의 은혜를 두텁게 받은 처지로서 물러나 일생을 마친 것이 어찌 그 즐거운 것이었겠는가?  오직 단단한 돌같은 지조(志操)가 시대에 맞지 아니하여 속세(俗世)의 밖으로 벗어나 지금까지 바닷가의 선옹(仙翁)이라고 불리니 참으로 탐욕스러운 사람을 청렴(淸廉)하게 만들고 나약한 사람을 수립(樹立)시켜 뒷 사람에게 법(法)이 될 만하다. 그러나 공의 마음을 상상하여 봄에 어찌 개연(慨然)히 한숨 나오지 아니하게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공이 동쪽으로 올적에
    어찌 기쁠만한 것이 있었으랴.

    바다의 물결만 아스라이 넘실거려
    답답한 심정을 씻어 주었으리.

    넓고 큰 공의 뜻은
    마치 황하(黃河)가 터짐 같았네.

    왕이 그 아름다움을 성취시켜 주니
    누가 공을 저지할 수 없었네.

    무엇으로 은총(恩寵)을 베풀었느냐 하면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고

    또 무엇으로 공에게 주었느냐 하면
    진주(眞珠)로 식읍(食邑)을 봉해 주었네.

    수많은 바위들이 귀신이 깎아 놓은 듯
    여기저기 우뚝 솟아 적막하였지.

    멀리 떠나온 외로운 회포(懷抱)를
    기이한 경치에다 붙여 두었네.

    동쪽에서 해가 떠올라 따뜻하면
    옥(玉)을 차고서 여기저기 배회(徘徊)하고.

    얼큰하게 취하면 노래도 불러
    물고기나 새들과 벗을 삼았지.

    머리를 돌려 대궐문을 바라보니
    아득하게 하늘 끝에 있었네.

    쫓아가 님을 따르고 싶었지만
    길이 막히고 멀기도 하였네.

    공더러 돌아오라고 왕이 이르면서
    가끔 얼굴을 대하자고 하였지만.

    머리를 조아리고 사양한 것은
    감히 도망하여 숨음이 아니라오.

    선비가 벼슬하여 조정(朝廷)에 들어가면
    명절(名節)을 보전한 이가 적으니.

    스스로 뜻을 지켜 충성을 바침도
    역시 거룩한 일이 된다오.

    지금은 능파대(凌波臺)가 주인이 없어
    동쪽 바닷가에 아스라이 있지만.

    공이 남긴 맑은 바람은
    능파대와 함께 영원히 전하리.
 

     숭정(崇禎 : 明 毅宗의 年號) 후로 세 번째 돌아온 무오(戊午 : 正祖 22, 1798)중양일(重陽日 : 음력 9월 9일)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겸 경연관 원자우유선(兼經筵官 元子右諭善)이 성보(李城輔) (직보(直輔)로 고쳤다)는 짓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전행승정원좌승지(前行承政院左承旨) 겸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지제교(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知製敎)이 석우(李錫祐)는 글씨를 쓰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연춘현감(永春縣監) 겸충원진관 병마절제도위(兼忠原鎭管兵馬節制都尉)유 한지(兪漢之)는 전(篆)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