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恭公
漁村(沈彦光)祖 略歷

漁村 沈彦光(어촌 심언광)은 1487년
음력 3월 초3일에 강릉부 大昌 龍池村(현 강릉여고 부근)에서 태어났다. 公의 字는 士炯이고 號는 漁村이며, 三陟沈氏 始祖인 賜名(임금이 내린
이름) 沈東老公의 후손으로 戶曹佐郞 沈濬(심준)의 아들이다.
公의 遠祖는 고려조때 文林郞 沈迪 (심적충)이고, 公의 七代祖인
호 信齋 初諱 沈漢(심한)은 고려 恭愍王때 中書舍人, 禮儀判書, 集賢殿提學(중서사인, 예의판서, 집현전제학)을 지냈다. 恭愍王
10년(1361년) 嶺東 三陟府에 退去함으로써 江原道와 永世의 地緣을 맺게 되었다. 眞珠는 三陟의 옛이름으로 公의 遺訓에 따라 子孫들이 公을
始祖라 하고 三陟을 本貫으로 정한 것이다.
朝鮮朝에 들어와 沈彦光의 父親 沈濬이 進士에 올라 戶曹佐郞을
지냈으며 家門을 크게 빛낸 것은 漁村公이 그의 兄인 沈彦慶과 함께 高位官職에서 활약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 沈彦慶은 中宗 11년(1516) 文科에
及第하여 三司의 要職을 두루 거쳐 禮曹判書, 左, 右贊成에 이르렀다.
漁村公은 中宗 2年(1507)에 司馬,
그리고 同王 8年(1513)에 文科에 及第하여 그해에 翰林(한림)의 檢閱(검열)에 천거되어 들어간 뒤 兵, 禮 兩曹(병, 예 양조)의
正郞(정랑)과 弘文館修撰(홍문관수찬), 藝文館應敎(예문관응교)등을 거쳐 同王 25年(1530)에는 江原道觀察使(강원
도관찰사, 지금의 도지사)를 비롯하여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大司成, 大司諫, 大司憲), 공조판서, 이조판서(工曹判書, 吏曹判書),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등을 두루
역임하셨다.
특히 漁村公은 中宗 32年(1537) 吏曹判書 재임시 明나라
정사 공용경(正使 用卿)과 부사 오희맹(副使 吳希孟)이 來朝했을 때 이들을 맞이하여 안내하는 관반사(館伴使)로 임명되어 그들과 交遊하며 詩를
酬唱했을 정도로 詩文에 뛰어 났다.
이때 명나라 정·부사는 漁村公의 안내로
이곳 강릉에와 漁村公이 지은 해운정(海雲亭)에 들러 공용경(用卿)은 ‘경호어촌(鏡湖漁村)’이라는 편액과 화선에 ‘오언율시(五言律詩)’를 써
주었으며 부사 오희맹(吳希孟)은 ‘해운소정’이라는 편액과 환선에다 두절의 시(詩)를 써서 기증하였음을 볼 때 그들의 친분이 어떠했는가를 집작하게
한다.
지금도 이 편액은 漁村公의 은퇴정자인 ‘해운정’에 걸려 지난
세월을 굽어보고 있으며 화선과 환선은 그의 후손들이 고스란히 대물림 해가고 있다.
이 전 어촌공은 형 언경과 함께 유배 중인 ‘김안노’의 용서를
주청하여 예조판서에 등용케 했으나 그의 외손녀를 세자빈으로 삼으려 하자 이를 꾸짖어 반대한 탓에 도리어 ‘안노’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관찰사로
좌천되었으나 1537년 ‘안노’가 사사된 뒤 공조판서가 되자 앞서 ‘안노’를 구원했다는 일로 탄핵을 받고 이듬해 삭직 당했다가 숙종
갑자년(1684)에 그의 5세손이자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인 심징(沈澄)의 설원으로 복직되었다.
그후 영조 신사년(1761)에 8세손 ‘상현’이 조상에게 내린
시호를 받들었으니 바로 文恭公(문공공)이시다.
漁村公은 중종 25년(1530)에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조선 상류 주택의 별당 건물에 속하는 ‘해운정’(보물 제183호)을 지었으며, 1538년에는 ‘망서정’을 지었다. 이는 그가
만년에 향리에 돌아와 이곳에서 소일하며 여생을 보내고자 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望西亭은 海雲亭 西편에 있으며 望西는 대궐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는 마음을 뜻하는 것이다. 漁村이 임금을 그리는 望西詩를 보면,
一上高亭望百面
정자에 한번 올라 백번을 바라보니 (일상고정망백면) 雲海隔瑤臺
아득히 먼 궁궐 구름에 가렸구나
(초초운해격요대) 此身永負承明謁 이몸은 영원히 임금에게 매인 몸
(차신영부승명알) 猶幸終南入夢來 다행히 종남산을 꿈에서 볼
줄이야. (유행종남입몽래)
특히 우리는 1972년 임자년 벽두에 국보급 문화유산의 하나인
東國正韻(동국정운) 초인 완질본 6권 6책이 이곳 강릉에서 발견되어 학계를 흥분시켰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바로 漁村公 沈彦光의 유품으로 책의 소유임을 표시한
‘책주망서정’은 귀향하여 ‘망서정’을 짓고 은퇴생활을 하다가 서거한 중종 35년(1540) 사이에 자서한 것이다.
이렇듯 문벌의 명가이었기에 그간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고이
간직하여 대물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락같은 문집이 전함에도 아직까지 번역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였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선 무엇보다
시급한 년보를 이번 기회에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漁村公(沈彦光) 年譜(略述)
● 성종 18년 정미(1487)
1세
대명헌종황제 성화 23년 정미 성종대왕
18년(1487) 삼월초삼일 선생은 강릉부 대창 용지촌에서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기질이 다른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용모가 남달리
뛰어났다.
● 성종 19년 무신(1488) 2세 효종황제 홍치
원년
● 성종 20년 기유(1489) 3세
● 성종 21년 경술(1490) 4세
말을 배우고 글을
읽을 줄 알았다. 평상시 말을 할 때는 조금 더듬었으나 글을 읽을 때에는 조금도 더듬지 않았다.
● 성종 22년 신해(1491) 5세
● 성종 23년 임자(1492) 6세
비로소 배움에
나아갔다. 하루 저녁에 부친 좌랑공이 선생을 안아 무릎위에 올려 놓고 등불에 대하여 시를 지으라고 하니 소리내며 응대하거늘 “등불이
방 가운데 들어왔다 밤에는 밖으로 나가네”라 하자 좌랑공이 크게 기특하게 여겼으며,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그를 신동이라
불렀다.
● 성종 24년 계축(1493) 7세
● 연산 원년 갑인(1494) 8세
일찍이 옛사람들의
가르침인 효제를 따서 글씨를 써놓고 좌우명으로 삼았으며, 늘 경계하고 반성하는 자세로 행동하였다.
● 연산 2년 을묘(1495) 9세
4월 부친 좌랑공이
서울에서 돌아가시자 강릉 집으로 모셔와 청량산에 안장하였다. 맏형과 함께 여묘를 하면서 몸소 제찬을 준비하였으며 춥고 더운 것을 가리지 않고
3년동안 거르지 않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보는 사람마다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연산 3년 병진(1496) 10세
● 연산 4년 정사(1497) 11세
3년상을 마치고
돌아와 독서에 열중하였다. 어머니 김씨부인은 엄했으며 학식과 도량이 크고 넓었다.
항상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람에게 있어서 충성과 믿음은 음식에 있어서 간장이나 반찬과 같은 것이다. 진실로 착한 마음으로써 스스로 다스린다면 천가지 재앙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비천한 사람도 후일 재상이 될 수 있으니 너희들은 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여 선조들의 과업을 이어가야
하느니라. 내가 차마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것은 오직 너희 형제들 때문이니라”고 하자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들고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였다.
● 연산 5년 무오(1498) 12세
처음 기일이
돌아왔으나 슬프고 사모하는 정이 돌아 가실때와 마찬가지였다. 가절을 맞을 때 마다 슬픔이 더했다.
● 연산 6년 기미(1499) 13세
오대산 절에서 독서를 했다.
어려서 부친을 잃고 집마저 가난하여 공부할 책이 없었다. 다만 고문선 한권이 있었는데 천 번이나 읽고 드디어 대가가 되었다.
● 연산 7년 경신(1500) 14세
● 연산 8년 신유(1501) 15세
향시에 응시하여
삼장장원을 하였다.
이 때 감사 남궁찬이 순방차
과시장에 들러 여러사람의 글을 읽어보다 특별히 선생의 글을 읽어 보고는 칭찬하기를 “먼 훗날 큰 재목이 되겠구나”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문명이
경향각지에 소문이 났다.
● 연산 9년 임술(1502) 16세
3월 강릉박씨와
혼인을 했다. 부친은 장사랑의 벼슬을 지낸 “승서”의 딸로서 문군사자검의 현손이다.
● 연산 10년 계해(1503) 17세
자경문을 지었다. 하루는 책을
덮고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선비가 세상에 나서 궁벽한 시골에서 스승의 가르침이 없이 어찌 성현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 연산 11년 갑자(1504) 18세
‘김윤덕’과 또다시
오대산사로 공부하러 떠났다.
● 연산 12년 을축(1505) 19세
● 중종 원년 병인(1506) 20세
● 중종 2년 정묘(1507) 21세
정월 할아버지
판서공께서 돌아 가셨다.
9월 진사시에 장원을 하였다.
용재 ‘이행’이 강원도에 왔다가 서울로 돌아가자 대제학 ‘신용개’가 “본 도에 인재가 있는가?”라고 묻자 이공은 “강릉 「심생원」이 문장이
남보다 뛰어납니다”라고 하였다.
● 중종 3년 무진(1508) 22세
● 중종 4년 기사(1509) 23세
삼가 ‘박수량’과
원정 ‘최수성’이 경호재에서 강회를 열었다.
● 중종 5년 경오(1510) 24세
맏형 적연공께서
진사시에 올랐다.
부친 좌랑공을
추모하니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였다.
● 중종 6년 신미(1511) 25세
정암 ‘조광조’가
도봉을 방문하고 경서강론을 여러날 하다가 마치었다.
● 중종 7년 임신(1512) 26세
아들 “운(雲)”이
태어났다. 신재 주세붕과 함께 의동여관에서 심경을 강론하였다.
● 중종 8년 계유(1513) 27세
9월 명경을과에
5위의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 중종 9년 갑술(1514) 28세
● 중종 10년 을해(1515) 29세
● 중종 11년 병자(1516) 30세
정월 한림에 천거되었으며 임금의
명으로 상원황감운을 지어 올렸다. 정월 초열흘 대비전 향연때 모든 재상들을 모신 가운데 전정에서 시를 지어 올렸다. 강릉으로 어머니를 뵈러
갔다. 이때 맏형 적연공께서 문과에 급제하고 돌아와 함께 갔다.
● 중종 12년 정축(1517) 31세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
부사 황필이 임기가
되어 서울로 돌아갔다. 황공은 강릉에 있을 때 학교를 크게 일으켜 학문 장려에 힘썼다. 임기가 되어 돌아갈 때 선생은 40운의 시를 지어
보냈다.
● 중종 13년 무인(1518) 32세
예문관 봉교에 승진되었다.
임금께서 성리대전을 하사하자 예를 갖추어 받았다. 이때 임금께서 학문을 일으키는 일에 대하여 마음을 단단히 먹고 힘써 하라고 하시며 사서오경을
인쇄하여 반포하라고 하였다. 또한 소학·향약·가례·근사록 등의 책들은 백성들의 교화와 풍속을 순화하는데 근본이 된다고 하시며 조정암 선생의 말은
모든 신하들이 성리대전에서 취하라고 하였다. 홍문관에 모여 강론하라고 하자 한달에 세 번 나가 강론하였다.
● 중종 14년 기묘(1519) 33세
좌상 ‘김웅기’가
죽자 곡을 하였다.
선생은 평소 김공과
허심탄회하게 지냈으므로 제문을 지어 올렸다.
호당에 뽑히었으며
곧이어 경성수교에 제수되었다.
● 중종 15년 경진(1520) 34세
조정암 선생께서
돌아가시자 곡을 하였다.
● 중종 16년 신사(1521) 35세
● 중종 17년 임오(1522) 36세
예조좌랑으로
임명되었다가 병조좌랑으로 옮겼다.
● 중종 18년 계미(1523) 37세
얼마 않있어
홍문관수찬·이조좌랑,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다.
2월에 임금께서 몸소
밭을 갈자 태학생들이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지었다.
5월에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대전에 나아가 단오첩자를 올리자 특별히 만든 활을 하사하였다. 또한 강원도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죽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
● 중종 19년 갑신(1524) 38세
부름을 받고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어 갔다. 대전입춘첩자를 지어 올리자 특별히 벼루를 하사받았다.
충청도도사로
옮겼으며, 공조·병조·이조정랑과 사복시첨정에 제수되었다.
● 중종 20년 을유(1525) 39세
대전 입춘첩을 지어 올렸으며,
4월 경성판관에 임명되었다. 11월에 큰눈이 내리고 폭풍이 불어 바닷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가옥이 무너지는 등 100여인의 사망자를 냈다.
선생은 해안에 제단을 설치하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자 잠시 뒤 바람은 고요해 지고 파도가 가라앉았다.
● 중종 21년 병술(1526) 40세
4월 조정의 부름을
받고 사헌부장령에 승진되었다. 5월 역대군신도상 한 질을 하사 받았다. 이는 지난해 윤 12월 홍문관에서 공자를 비롯 역대 군신들의 모습을
상하로 나누어 그렸는데 대제학 이행과 지제교가 명을 받들어 찬하고 간인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선생은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자 인륜도덕과 풍속이 순박해지는 도에 대하여 소를 올렸다. 소에 대한 간략한 내용은 옛날 성인들은 정으로 인하여 예를 만들었으며, 사리에
따라 정한 훌륭한 조리로써 사람을 섬겼기 때문에 어버이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어버이에 효도하는 정이 곧 어버이를 섬기는 예가 되었으며,
형제간에 서로 공경하는 정이 곧 형제간의 예가 되었다. 또한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공경하는 정이 군신간의 예의가 되었으니 이것이 곧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이라 하였다.
8월 공의 모친 김부인이
돌아가셨다. 슬픔이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와 같았으며, 평소 극진히 모시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사람들이 어버이를 받드는 지극한
정성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용재 ‘이행’이 김부인의 만사를 지었으며, 부친 좌랑공묘上에 안장하였다.
● 중종 22년 정해(1527) 41세
● 중종 23년 무자(1528) 42세
삼년상을 마치고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시폐에 대한 상소를
올렸으며, 하늘을 두려워 하고 재앙을 조심하여야 한다는 말씀도 함께 진달하였다. 이 때 겨울인데도 우뢰가 진동하고 해무리가 생기는 변이 일어나자
공은 걱정하며 시류에 대한 폐단을 고쳐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 중종 24년 기축(1529) 43세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다.
임금에게 열 가지를 점차로 고쳐야 한다는 소를 올렸다. 7월에는 임금의 분부를 받들어 열가지 허물을 닦아 재앙을 그치게 하는 도리에 대하여 소를
올렸다.
예문관응교와 홍문관전한에
승진되었다. 공은 임금에게 야인을 토벌하지 말라는 글을 올렸으며 또 간사한 무리들이 투서로 기묘사화가 일어난 일에 대하여도
주청하였다.
가을에는 임금에게 여가를 얻어
강릉 선영의 묘소를 다녀갔다. 이 때 승지를 지내시는 큰 형님 적연공께서도 함께 왔으며, 고향 부로들이 모두 나와서 공을 위문하였다. 겨울에
우뢰에 대한 변괴가 있자 상소를 올렸으며, 지금 힘써야 할 일에 대하여도 글을 올렸다.
12월 홍문관직제학에
임명되었으며 후한서를 하사받았다. 또 임금께 군덕을 닦아 성현에 이를 것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 중종 25년 경인(1530) 44세
정월 경기도어사에 제수되어
지방수령들이 백성을 돌보는 일들을 낱낱이 살펴보고 잘못된 것을 가려 바로 잡도록 조치하였다.
다시 조정에 돌아와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또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어 경포 윗쪽에다 해운정을 지었다. 해운정은 강릉부에서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남쪽으로 10여리 떨어진 곳에
공이 태어난 용지촌이 가까이에 있다. 또 남쪽으로는 청량선산이 15리쯤 떨어져 있다.
공은 강원도 안절사로 있을 때
이곳 호수와 바다가 인접한 빼어난 경치를 좋아 하였기 때문에 이곳에 정자를 지었으며 만년에 벼슬길에서 물러나 조용히 쉬면서 지낼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다시 부름을 받고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다. 8월 정현황후가 승하하시자 명을 받들고 빈전에 나아가 향문을 지어 올렸다. 또 10월 명을 받들고 정현황후 애책문 및 만시를 지어
올렸다.
● 중종 26년 신묘(1531) 45세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또 사간원 대사간, 승정원 승지로 자리를 옮겼다. 문신 들이 보는 정시에서 “문과 무를 겸하여 오래도록 쓸 수 있는 술책에
대하여”라는 시제에 “칠언배율”을 지어 당당히 장원을 하였다. 8월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 해 손자 「장원」이
태어났다. 12월 휴가를 얻어 강릉에 돌아왔다. 어머니 삼년상을 마친 이후 벼슬길에 있다보니 겨를이 없어 정월 초하루 조상의 묘소에 성묘를
한지가 오래되어 늘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이에 앞으로 정월 초하루에 성묘를 하기 위하여 돌아왔던 것이다.
● 중종 27년 임진(1532) 46세
초하루 성묘를 하고 어머니를
추모하는 시를 지었다. 8월 정현황후가 돌아가신지 2주년이 되어 곡반에 참여하였으며, 명을 받들고 정현황후를 합장한데 대한 글을 지어 올렸으며,
태조의 종묘에 노래를 지었다.
● 중종 28년 계사(1533) 47세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 4월
부인 박씨가 돌아가자 곡을 하고 강릉 시루봉에다 장사를 지냈다. 부인을 강릉으로 운구할 때 임금께서 시를 지어 주었다.
임금에게 하늘을 감응케하여
재앙을 멈추게 하는 도를 논하는 글을 지어 올렸다.
● 중종 29년 갑오(1534) 48세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며, 연이어
예조,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이 때 조정에서 세자빈을 뽑으려하자 이에 대하여 논하였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윤개 및
「윤원량」등의 딸을 들이려 하자 「김안노」가 그의 사위 「박춘란」의 딸을 들이려고 은밀히 부추겼다. 대간들이 모두 공정치 못한 일이라고 하자
「김안노」는 버럭 성을 내며 “하늘에 해가 밝게 비치는데 내가 어찌 그런 짓을 하겠소”하니 공은 이는 허구에 불과한 맹서라고 하자 「안노」가 그
소리를 듣고 드디어 「김안노」와 틈이 생교 멀어지게 되었다.
● 중종 30년 을미(1535) 49세
겨울에 공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 때 학문에 힘쓰고 인재를 등용하는 도리에 대하여 상소를 올리자 임금은 그의 올곧은 성품이 있음을 보고 특별히 명을 내려 대제학에
천거하였으나 상소를 올려 이를 사양하였다.
● 중종 31년 병신(1536) 50세
정월 종가에 이르러 증직이 된
때에 관고의 부본을 무덤 앞에서 불사르고 예식에 참여하였다. 부친 좌랑공께서는 의정부좌찬성, 조고 학생공은 병조판서에 증조고 사정공께서는
이조참판에 증직된데 대하여 분황례를 올렸다.
3월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경연을 맡았으며, 의금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오위도총부도총관에 특별히 배명되었다.
● 중종 32년 정유(1537) 51세
3월 관반사의 명을
받았다. 중국 명나라 황제의 아들이 탄생하였을 때 정사 한림원수찬 「공용경」과 부사 호과급사 「오희맹」이 조서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왔다. 호음
「정사룡」이 원접사가 되고 공이 관반사가 되어 이들을 상대로 시를 수창하였다.
특히 태평루 「칠언배율」
육십운의 장시는 가히 점수를 논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경회루에서 부사 「오희맹」이 지은 시의 운에 따라 지은 “십운배율”은 사신들이 찬탄하며
감복해 마지 않았다. 그의 명민하고 넉넉한 문장력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사신들에게서
두정선생의 화상을 얻었다. 관반사로서의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고 홍제원에서 사신들을 보내고 복명하였다.
정사 「공용경」이
“경호어촌”이라고 큰 글씨로 네자를 써 주었으며, 또 화선에다 오언시를 써서 공에게 주었다. 부사 「오희맹」은 “해운소정”이라고 큰 글씨로 써
주고 아울러 비단부채 하나를 선물하였다. 공은 또한 흰 부채에다 각각 칠언절구를 한 수씩을 써서 주었다.
8월에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할 생각을 하였다. 임금께서 비단 옷과 가죽옷, 붉은색을 칠한 활과 화살을 내려 주었다. 「김안로」가 적소에서 죽자 의정부
좌참찬에 임명되었다.
● 중종 33년 무술(1538) 52세
2월에 관직삭탈의 명을 받자
고향으로 돌아와 망서정을 지었다. 「망서정」은 「해운정」 서쪽에 있었으며, 「망서」는 대궐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는 마음을 뜻하는 것이다.
“정자에 한번 올라 백번을 바라보니 아득히 먼 궁궐 구름에 가렸구나. 이몸은 영원히 임금에 매인 몸, 다행히 종남산을 꿈에서 볼 줄이야”라는
시가 있다.
● 중종 34년 기해(1539) 53세
「운계사」에서
봄놀이를 하였다.
● 중종 35년 경자(1540) 54세
9월 6일 병으로
경호 별장에서 별세하였다. 12월 시루봉 해좌에 장사지냈다.
선조 7년(1574)에 강원도감영에서 공의 손서인 「홍춘연」과
공의 손자 「장원」과 상의하여 문집을 간행하였다.
숙종대왕 5년(1579) 8월에 공의 행장이 완성되었다. 公의
5代孫인 沈澄(심징)이 三次에 復官 上言하여 마침내 숙종 10년(1684) 9월 임금의 특명으로 복관되었다. 지난 경신년(1680) 윤 8월
25일 5대손 「징(澄)」이 전하는 문적을 골고루 찾아 이를 바탕으로 임금에게 아뢰어 9월 6일 삭탈(削奪)되었던 관직을 다시
찾았다.
復官(복관)된 敎旨(교지:사령장) 내용은 資憲大夫(자헌대부)
吏曹判書(이조판서) 知經筵(지경연) 義禁府使(의금부사) 弘文館大提學(홍문관대제학) 藝文館大提學(예문관대제학)春秋館 成均館事(춘추관 성균관사)
世子左賓客(세자좌빈객) 五衛都摠府都摠管(오위도총부도총관) 贈諡文恭公(증시문공공)
吏曹判書(이조판서) 「이상진(李尙眞)」과 參判(참판)
「이민서(李敏敍)」, 參議(참의) 「이선(李選)」 등이 임금의 물음에 대하여 이를 살펴 답변을 하였으며, 領議政(영의정) 「김수항(金壽恒)」,
左議政 「민정중(閔鼎重)」, 右議政(우의정) 「이상진(李尙眞)」, 判府事(판부사) 「정지화(鄭知和)」등이 임금에게 復官(복관)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아뢰었다.
1695년 焚黃禮(분황례)를 올렸다. 이 해 6代孫
「世綱)」등이 선생의 遺志를 받들어 河南洞에다 二程先生의 畵像을 모실 수 있는 집을 짓고 부르기를 程夫子影堂이라 하였다. 그후 1717년 공의
8代孫 「尙顯」등이 影堂을 增修하고 朱子影幀을 추가로 配享하였다.
英祖大王 37년(1761) 4월 文恭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는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文이라 하였고, 이미 허물을 알고 이를 고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니 恭이라 한 것이다.
이해 2월 7世孫 「」가 그의 아들 「尙顯」으로 하여금
文庵(문암) 「이의철(李宜哲)」에게 諡狀(시장)을 보이고 禮曹에 올리자 수당(首堂) 「한익모(韓翌謨)」가 예에 따라 太常으로 보냈으며, 4월
대신들이 諡狀에 대하여 논의하자 임금께서 특별히 시호를 내릴 것을 명하였다.
10월 17일 시호를 받들고 江陵府에 내려와 20일
「海雲亭」에서 延恩禮(연은례, 조상에게 내린 시호를 받들고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에서 올리는 의식)를 올렸다. 이때 執事官은 楊口縣監
李慶甲, 平陵察訪 安昭, 平海郡守 李弘器, 蔚珍縣令 鄭宅濟, 江陵府使 尹坊, 觀察使 金孝大 등이었다.
29일에는 또 焚黃禮(분황례)를 올렸다.
1782년 6월 「이택징(李澤徵)」이 허위 사실의 啓를 올리는
바람에 程夫子影堂은 철거되었다. 影堂이 철거되자 二程先生의 影幀과 尤庵(우암), 漁村(어촌) 두 선생의 位板은 花浮山에다 묻었으며, 朱子影幀은
五峰書院에 옮겨 모셨다. 이에 이르기까지 무릇 9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1798년 3월 神道碑가 섰으며, 高宗 22년(1885)에 年譜가
완성되었다.
또 1889년 6월 海雲亭에서 文集을 重刊하였으며, 1937년
9월 다시 海雲亭에서 세 번째 문집을
발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