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씨실

遺墟碑文<유허비문>

자크라캉 2006. 6. 26. 17:02

유허비문(遺墟碑文)

  선조(先祖) 신재공(信齋公)이 고려(高麗) 말엽을 당하여 기미를 살펴보고 진주군(眞珠郡)으로 물러나니 공민왕(恭愍王)은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내려 주고 칙명(勅命)으로 죽서루(竹西樓)에 놀게하여 신재공을 영광스럽게 해 주었다. 자주 중서(中書) 집현(集賢) 등의 임명도 있었지만 끝내 취임하지 아니하자 그대로 채읍(采邑)을 봉해 주어 만년에 해암정(海巖亭)을 짓고 한가롭게 노닐면서 일생을 마쳤다. 우리 심씨(沈氏)가 삼척(三陟)으로 본관(本貫)을 삼은 것은 신재공의 치명(治命 : 죽을 무렵에 맑은 정신으로 하는 遺言)에 따른 것이다.

  신재공이 은거했던 곳을 세상에서 「심대감(沈大監) 터」라고 부르는데해암정에서 서쪽으로 수엄 걸음쯤에 위치해 있다. 산을 등지고 대(臺)가 만들어졌으며 들을 바라보고 국(局)이 열리어 있으니 「휴산(休山)」·「퇴평(退坪)」등의 명칭이 그 터에 기인하여 전해온 것이다. 그런데 세대(世代)가 오래됨에 황폐(荒廢)하여지금에는 남이 차지하여 경작(耕作)하는 땅이 되어 버렸으니 어찌 후손들의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선조의 우물이나 연못을 차마 묵힐 수 없는 것이며 뽕나무나 가래나무도 오히려 아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선조의 일을 계승하는 방도는 대대로 물려온 터보다 소중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종친(宗親)들이 언제나 옛터를 되찾아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표시할려고 하던 중에 이제 다행히 그 일이 성취되었으니 수백년 동안 미처 못하였던 일이 또한 시기를 기다림이 있는 것 같다. 이 일을 도와 성취시킨 것은 여러 종친들이 참으로 내 마음에 흡족하였거니와 선조를 위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줌에 있어서도 증거가 없을 수 없다 이래서 대략 기록하여 둔다.

  공민왕(恭愍王) 신축(辛丑 : 공민왕 10, 1361)후로 561년만인 신유(辛酉 : 4254, 1921) 10월 어느날에 후손 상룡(相龍)은 삼가 짓고 후손 지황(之潢)은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