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잡동사니>님의 블로그에서
만년필 / 송찬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 두었다 이것으로 경매
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룻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
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
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만년필은 백
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
다-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
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
가 산다
2005년<현대문학> 10월호
2005년 문예지에 발표된 162명 전문가가 좋은 2006년 최고의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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