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소개

한라일보에 실린 <신발론>

자크라캉 2006. 5. 12.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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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에 실린 <신발論> | 다락방 2006/05/07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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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그림이있는한라

마경덕, ‘신발論’ 전문


입력날짜 : 2006년 05월 02일

 

신발論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 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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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노트] 

 

 내 슬리퍼를 내려다본다. 학년이 바뀌며 학생들이 버리고 간 것들 중, 신을 만한 것이 내게로 왔다. 책상 아래 구석에는 몇 년을 신은 메이커가 정박해 있다. 이제 종이 울리면 나는 이걸 끌고 교실로 가야 한다. 맨발로는 안 된다. 일과가 끝나면 나는 또 구두에 몸을 싣고 집으로 간다. 나는 이걸 신고 어디로든 간다. 아, 이렇게 나를 위해 혹사당하는 이 신발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본 적 있었던가. 이러다 언젠간 신발이 나를 버릴 것 같다. 내 어머니도, 아내도 내겐 그런 신발이다. 아니 나는 얼마나 많은 신발을 신고 여기까지 왔나.

<나기철(시인)>



[그림] 고민철 작 / 빛바랜 향수

 

 

나기철 시인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나 제주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시문학’ 추천으로 등단하여 시집「섬들의 오랜 꿈」「남양여인숙」을 펴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한국시인협회 회원, ‘깨어있음의 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