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소개

분홍색 흐느낌 / 신기섭

자크라캉 2006. 6. 3. 22:36


 
분홍색 흐느낌
신기섭 지음
121*186 | 128쪽
ISBN 89-546-0142-1 02810
2006년 5월 22일 발행
값 7,000원

세찬 바람에, 혹은 떼를 지어 지나가는 죽은 새들의 혼에
꽃 花자를 지우고 속박에서 벗어난 듯
오롯하게 몸을 세우고 있는 한 마리 極樂鳥


 

지난해 12월 4일, 하염없이 폭설이 쏟아지던 날, 우리는 한 젊은 시인을 잃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그의 나이는 겨우 만 스물여섯이었다. 등단한 지 채 일 년도 안 된 시인이었지만 예기치 못한 비보에 안타까워하는 문인들이 많았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그가 보여준 열정과 재기는 그만큼 아까운 것이었다.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나무도마」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 신기섭. 그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 되어버린 『분홍색 흐느낌』이 출간되었다. 시집에는 별다른 부의 구분 없이 모두 53편의 시가 실려 있다. 등단 후 『문학동네』『창작과비평』『현대문학』 등 여러 문예지에 발표한 시 20여 편과 평소 시집 출간을 염두에 두고 시인 스스로 정리해둔 습작 및 미발표작들을 묶었다. 편집에는 시인의 은사이기도 했던 문학평론가 신수정, 소설가 윤성희를 비롯한 모교 서울예대의 문우들이 참여했다.

생의 안쪽에 아로새겨진 슬픔과 고통의 무늬를 비추는 환한 진정성의 빛

생전의 시인은 늘 웃음을 잃지 않는 밝은 얼굴이었으나 그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간 한 권의 시집은 대체로 어둡고, 무겁고, 쓸쓸한 시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하여 문태준 시인은 그가 “생전에 쓴 시에는 눈동자들이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고 빛난다”고, “통증이 온다”고 했던가. “새벽 파란불 맞아 다시 촘촘하게 모여 한세상 건너가는 눈발들”이 “싱그러운 풀밭 소풍을 가 눕고 싶은 새파란 풀밭”(「봄눈」)으로 치환되는 아름다운 찰나에서도 “울음으로 꽉 잠긴 듯 환해진”(「울지 않으면 죽는다」), 생의 감출 수 없는 슬픔이 배어나온다. 그리고 그 슬픔은 존재의, 온몸이 저릴 만큼 뻐근한 고통과 아주 가까이 맞닿아 있다. 시인의 등단작인 「나무도마」는 식육점 앞에 놓인 칼자국투성이 나무도마의 비유를 통해 생의 비감과 통증을 잔인할 정도로 직핍하게 묘파해 보인다.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나무도마」중에서

“고통의 근육을 느끼게 하는 생동감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은 이 시는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는 숨막히는 고통과 그 고통이 육화(肉化)하는 궤적을 보여줌으로써 어두운 생의 안쪽을 정직하게 비춘다.

분홍색 흐느낌, 시원 혹은 상처로서의 추억

할머니가 있었다. “늙은 구름들을 묻은 정거장 담벼락 아래”에서 나와 “맞담배를 태우고 오늘도/집으로 돌아”(「안개」)가는, “아프지 않다고, 다 나았다고, 힘을 쓰다 그만” 또 똥을 싸지만 “향기로운 나무껍질처럼 내 몸을 감싸”(「추억」)는 그런 할머니. 첫 시집 출간을 준비하며 시인이 미리 써놓은 자서에서도 알 수 있듯, 『분홍색 흐느낌』은 오롯이 그가 “언제나 곁에 계신 할머니에게 바친” 시집이다. 그러나 돌아가신 할머니는 이제 추억으로만 존재한다. 추억의 완성은 표제작 「분홍색 흐느낌」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밤 마당의 양철쓰레기통에 불을 놓고
불태우는 할머니의 분홍색 외투
우르르 솟구치는 불씨들 공중에서 탁탁 터지는 소리
그 소리 따라 올려다본 하늘 저기
손가락에 반쯤 잡힌 단추 같은 달
(……)
분홍색 외투를 입은 수많은 할머니들이
나의 몸속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이제는 추억이 된 몸속의 흐느낌들이
검은 하늘 가득 분홍색을 죽죽 칠해나간다
값싼 외투에 깃들어 있는 석유 냄새처럼
비명의 냄새를 풍기는 흐느낌
확 질러버리려는 찰나! 나의 몸속으로
다시 돌아와 잠잠하게 잠기는 분홍색 흐느낌
분홍색 외투의 마지막 한 점 분홍이 타들어가고 있다
―「분홍색 흐느낌」중에서

돌아가신 할머니의 분홍색 외투가 타오르는 가운데 들려오는 “이제는 추억이 된 몸속의 흐느낌”, 권혁웅 시인은 해설에서 그 흐느낌으로 신기섭의 시가 “늘 울린다”고 말한다. 또한 시인이 “추억을 통해 이 세상과 저 사랑 사이에 놓인 거리를 측정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추억은 시원이 되지만, 추억할 때마다 그 대상의 부재를 떠올릴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은 “상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여기 없는 할머니를 통해서만 사랑이 찾아왔으므로 “상처로서의 추억은 사랑의 질료”이며, “상처가 상처와 잇닿아 이루어지는 소통이 있”으므로 그것은 또한 사랑의 형식이라고 덧붙인다.

어쩌면 마지막 봄날, 그러나 지금은 따뜻한 봄날……

작년, 꼭 이맘때, 시인은 자신의 홈페이지(http://xodd1234.netian.com/newhwmain.html)에 꽃 핀 철쭉 앞에서 찍은 독사진과 이성복 시인의 시 한 편을 올려놓고는 왜 그랬는지, ‘어쩌면 마지막 봄날’이라고, 애잔한 제목만 덩그러니 붙여놓았다. 혹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던 것일까, 그는 “노을이 화단 가득 번져/점점 더 붉어진 極樂鳥”처럼 “훨훨훨훨 훨훨훨훨/노을빛과 똑같은 색으로 날아”(「극락조화極樂鳥花」)가버리고 말았다. 시인의 좋은 독자이자 선배였던 권혁웅의 말대로 “그는 원치 않은 곳으로 너무 일찍 떠났고 순정하고 아름다운 몇몇 기록들만을 남겼다. 그 줄글과 귀글들 위에 막막히 서 있는 우리는 갈 곳이 없다”. 누군가에게는 또 어쩌면 마지막이 될 봄날이 저물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 그의 시가 남아 있어 갈 곳 없는 우리의 봄은 아직 따뜻하고, 또 오랫동안 따뜻할 것이다.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고 빛나는 시의 눈동자

기스바! 네 할머니 톤으로 너 불러보자. 노래의 날개를 달고 이 세상에 와서는 이승을 저승처럼 살다가 노래의 나라로, 그 아득한 곳으로 가버렸구나. 네 시와 삶 속에 가득 들어찼던 죽음 버리고, 네가 그리 시 속에서 찾아 헤맸던 죽음 속에 깃든 삶의 나라로 날아가버렸구나. 거기선 기저귀 차고 목침 들어 할머니 얼굴 짓이기던 할아버지, 한 번도 불러보지 않은 아버지, 모두 잊어버려라. 네가 이 세상에 혼자 남는 것 안타까워 너 불러가신, ‘엄마라고 부르면 늘 할머니 되던’ 할머니, ‘비명 같은 엄마’ 계시는 그곳에서 재미나게 살거라. 그곳에선 라이터로 변소 줄 태워 할머니께 혼나지 말고, 너 행생 나갔다 늦게 돌아와 할머니 기다리게도 말고, 네가 그리워하는 연인 속에서 글썽한 그 큰 눈으로 웃고 살거라. 노래의 나라에서 그렇게 살거라, 기스바!
김혜순(시인)

시에는 눈동자가 있다. 신기섭 시인이 생전에 쓴 시에는 눈동자들이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고 빛난다. 시집을 펼치거나 덮을 때 “투명한 발이 달린 눈물들이 기어나온다”. 읽는 사람에게도 통증이 온다. 저곳에 그가 인공눈물을 사들고 비명 속을 절뚝절뚝 걸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그는 모든 상처와 광풍을 황홀하다고 담대하게 말한다. 고통의 품에 오래 안겨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대긍정이 그의 시에는 있다. 궁곤(窮困)을 환락으로 바꿔놓는 힘이 있으니 놀랄 일이다. 그는 스물여섯 해의 짧은 생을 살고 갔다. 너무나 애석하다. 몸은 큰 강을 건너갔지만, 비와 바람에도 씻기지 않을 언어의 비석이 세상에 남았다. 이 비석에 꽃을 바친다.
문태준(시인)

신기섭(1979~2005)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나무도마」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 초판발행|2006년 5월 22일
* ISBN|89-546-0142-1 02810
* 121*186|128쪽|7,000원
* 책임편집|조연주, 오경철(031-955-8865, 3572)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교통사고로 스물여섯살에 세상을 등진 신기섭 시인의 유고시집 '분홍색 흐느낌'(문학동네)이 출간됐다. 신 시인은 경북 문경 출신으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나와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유고시집에는 등단작 '나무도마'를 비롯해 여러 문예지에 발표한 20여 편의 시, 시집 출간을 위해 스스로 정리해 두었던 습작과 미발표작 등 모두 53편이 실렸다.

 

"오래 자다 일어난 것 같은데 어둡다 문득 잠결에 친구의 전화를 받은 기억, 그러나 그 친구 이미 오래 전 스스로 목을 매달고 죽은 기억"('봄눈' 중)이나 "시체를 머금은 그 붉은 물이/잠 속으로 쏟아지는 밤"('안 잊히는 일' 중)이나 "늙게 살면 빨리 죽는 거야/희망을 말하면 빨리 죽는 거야"('문학소년' 중)처럼 유달리 '죽음'을 다룬 시가 많다. 128쪽. 7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