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시집 다시 읽기
ㅡ 최정애 시인의 시집 『일식』
열린시학 시인선 064
■ 시집 속의 시 소개
난간을 마시다 / 최정애
눈을 뜨면 내 앞에 난간이 도착한다 난간은 내가 마셔 온, 마시지 못한 수만 개의 모래알이다 모래를 날리며 나는 추워지고 춥다고 외치면 난간이 껴안는다 두근거림이 묻어 있는, 내 허리에 달라붙는 난간 위에서 난간이 늘어난다 미끄러운 그의 모서리에 앉아
나는 매일 모래를 마신다 난간이 넘어간다 비린내를 풍기는, 난간은 뾰족하다 꿈틀거린다 차갑게 등을 노출한 아스팔트에서 핸들을 잡고 달린다 난간으로 머리가 날린다 다리가 빠진다 속력을 거부하는 몸체의 부작용일까? 아니다 난간에 긁혀야만 하는 감정의 거부 반응일지도 몰라 물 속의 파장처럼 파장의 경계처럼 나는 난간을 발목에 걸고
꼭지점에서 직선과 곡선을 연출한다 직선과 곡선이 사방에서 난간을 모으는 동안 나는 휘어져 버린다 쉼 없이 숨을 삼킨 몸 속에 난간이 곤두선다 난간 너머로 나는 점점 멀어지고, 적막해진 내 가슴에서 난간이 팽창한다 난간이 나를, 내가 난간을 통과하고 있다
코끼리 그림자 / 최정애
렌즈 속에 내 얼굴을 가득 채웠지 모서리에 잘리지 않으려고 그에게 웃음을 보내 주었지 눈 밖으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렌즈를 꽉 물고 있는 어금니, 속엔 고층 빌딩과 샌들이 걸어가고 나의 사랑과 짖어 대는 개와 봄날의 젖은 밤이 째각거리고 있었지
몸이 흔들렸지 로데오 거리에서 배가 불룩해지고 있었지 코끼리 그림자가 내 목으로 넘어가
어제는 나팔꽃이었고 내일은 출입문에서 혼자 뭉게구름을 뭉개는 내 생각이 죽은 척 하고 있었지
눈만 감으면 지하로 이동하는 너는, 하지만 오늘 나를 습득할 수밖에 없지
옹이 박힌, 나의 그림자 하나를 끌고 추억의 갠지스 강을 찾아가야 하지 흙 속에 발자국을 던져 놓고
한 장의 벽 / 최정애
그를 소유하지 못하고 직선과 사선을 내가 감상할 때 그는 외면한다 눈을 감은 채 어두워지고
굳은살이 기어다니는 바닥으로 비가 내린다 벽지 속에서 눈망울들이 흘러나온다 빗물에 갇혀 꼼짝 못하는 벽, 수많은 입술이 벽과 벽 사이에서 안녕하세요, 방싯거린다 물에 지워지고 흔들리는 안개 속에서
풀잎 하나 지워지는 저녁 무늬가 퇴색한 달빛과 곰팡내 풍기는 방에서 빗물은 어둠 한 줄을 칠하고
모든 내일이 저장된 5초 전 창문에선 불빛이 꺼진다 어둠이 무성한, 바깥을 종일 채우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들 벽에서 얼룩을 지우고 있다 12월 한 페이지 건너갈 수 없는 유리문에선 수북한 달이
몸을 말리고 있다 수천 개의 눈이 묻어 있는 저 한 장의 벽, 속으로 내가 이동하고 있다
아이를 만들다 / 최정애
야심한 밤, 희미한 스탠드 아래 누워 잉태에 필요한 음식을 조리하는, 나는 아이 만드는 사람
1시간이 70분이면 넉넉할 텐데, 언제나 십 분씩 모자라는 시계를 차고
아침이면 방을 떠났다 저녁이면 다시 돌아오는, 시계 바늘을 꽂은 달빛 속으로 들어가
시니피앙 정자와 시니피에 난자가 혼합된 알전구 만한 태아를 잉태시킨다
한쪽 눈이 없거나 입술이 세 개인 기형아가 탄생하면 최신 장비로 치료를 하는 한밤의 하얀집★으로 보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를 생산하러 이 세상에 온 기계라고) 혼자 중얼중얼 생각하다가 잠시 머뭇머뭇 고민하다가
우량아에 필요한 재료를 몽땅 사들인다
혈통에게 물려받은 질긴 유전인자가 있어 나의 아이 만드는 습관은 죽는 그날에도, 어쩜 하나 더 낳고 떠날 결심을 한다
★금성
■ 시작과 끝이 없는 ‘그리고’라는 접속사의 중간
심은섭 (시인·문학평론가)
1. 시작하며
인간의 본질은 이성적 사고를 하는데 있다. 최정애 시인은 이성적 사고를 통한 시쓰기로 생산력이 낡은 시의식을 깨부수고 있다. 몇 편의 시작품으로 그 시인의 시세계를 짚어본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한 권 분량의 시집으로는 그 시인의 시세계, 또는 시의식이 어떤 세계에 와 닿아 있는지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물론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이 최정애 시인의 시집을 통해 그의 시(詩)세계나 시의식을 큰 틀에서 두 개의 본류(本流)와 몇 개의 지류(支流)를 구분하여 모색할 수 있다. 최정애 시인의 먼저 첫 번째 본류는 유목적 사유를 함으로써 서열의 지층화를 이루지 않는다. 그의 시세계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부표이며, 허공에서 몰입하는 정신의 푯대다. 계층구조를 깨뜨리며 지속적인 횡단운동을 한다. 또 다원적 무질서와 예측불허의 우발성이 시적 사유에 선명한 무늬로 삽입된다. 두 번째로는 언어에 밝은 색을 칠하며, 성찰하는 자아를 반추하는 최정애 시인의 시세계가 ‘자성(自性)’과 함께 노마드적 삶의 방정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시간’의 무게로부터 이탈을 시도한다. 또 그의 시의식은 치열한 삶과 치열한 예술성이 함께 동행한다. 그리고 그는 삶과 예술을 동시에 찬미한다. 이처럼 크게 두 개의 본류로 구분 지을 수 있으나, 몇 개의 지류가 시작품 도처에서 발견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시적 사유를 탈근대적인 인식으로 병렬 접속을 하며, 모더니티(modernity)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최정애 시인이 추구하는 모더니티의 본질 또한 영원성과 새로움이다. 낡은 전통으로부터의 단절과 극단적인 전통 파괴로 현재를 구성한다. 요약하면 최정애 시인은 예술성의 궁극적인 목적을 영원성에 둔다고 하겠다.
2. 횡단하는 쪽으로 시를 완성하는 사유
최정애 시인의 사유의 종착점은 정신분열증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근대로부터의 탈출이다. 그리고 전복하는 행동이다. 근대를 탈출하여 새로운 영혼과 인간해방을 가지려 한다. ‘여간 해선 별이 뜨지 않는 방’(「장마」)에 별을 띄우려고 한다.
눈을 뜨면 내 앞에 난간이 도착한다 난간은 내가 마셔 온, 마시지 못한 수만 개의 모래알이다 모래를 날리며 나는 추워지고 춥다고 외치면 난간이 껴안는다 두근거림이 묻어 있는, 내 허리에 달라붙는 난간 위에서 난간이 늘어난다 미끄러운 그의 모서리에 앉아 -「난간을 마시다」일부
에서 ‘난간’은 난간으로써 그 자체가 불안이다. 여기서의 ‘난간’은 경험했던 불안과 아직 경험하지 못한 불안의 총체적인 불안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불안과 단절을 꾀하며, 또는 멀리 하려고 한다. 그러나 최정애 시인은 이 세상의 모든 불안들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다. 오히려 불안과 소통을 통하여 대립적인 관계를 청산하려고 한다. 바로 고통을 고통으로 맞섬으로써 고통을 떨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의 작품 속을 면면히 들여다 보면 주정시(主情詩)에 돌멩이를 과감히 던지고 있다. 그 예로 ‘난간이 나를, 내가 난간을 통과하고 있다.’고 시적 진술의 한 부분을 그 한 예로 꼽을 수 있다. 이것은 아이러니(Irony)이고, 이 아이러니는 모더니즘의 시에서 많이 나타나는 수사법이고, 이 아이러니를 통해 현대의 부조리, 부패, 무능 등을 비판하며 풍자하는 이중적 의미와 기능을 가진다. 또 모더니즘의 시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지성주의를 앞세우고 성찰, 반성, 통찰, 압축, 상징을 통해 시의 깊이를 만들고, 언어의 밀도를 높여 난해함을 만든다. 거기에 당혹감마저 준다. 첨언하면 성찰, 반성, 통찰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통사규칙 파괴도 서슴지 않는다. 최정애 시인의 시의식 역시, 근대의 모든 것과 대척점(對蹠點)에 서 있고 그들을 적으로 삼고 있다. 특히 그는 과거의 모순이나 문제를 모더니티(modernity)로 극복하고 해결하고자 한다. 그는 근대적인 모델로는 어떤 제도(현실)도 설명할 수 없으므로, 새로운 모델로 제도(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탈근대의 의식을 불러들이고 있다. 그런 연유로 말미암아 그는 파편적 글쓰기를 한다. 그러면 파편적 글쓰기란 무엇인가? 「후기현대와 파편적 글쓰기」에서 정의한 바 있는 윤호병의 말을 요약해보면 “반―유기적 형식의 글쓰기이자, 정의가 유보된 글쓰기”라고 파악했다. 반―유기적 글쓰기는 통일성의 해체, 다시 말하면 이것은 콜리지(Coleridge, Samuel Taylor)가 강조했고 신비평에서 시 읽기의 기본원리로 인식했던 시의 유기체론에 대한 반전 혹은 뒤집기라고 볼 수 있다.
꼭지점에서 직선과 곡선을 연출한다 직선과 곡선이 사방에서 난간을 모으는 동안 나는 휘어져 버린다 쉼 없이 숨을 삼킨 몸 속에 난간이 곤두선다 난간 너머로 나는 점점 멀어지고, 적막해진 내 가슴에서 난간이 팽창한다 난간이 나를, 내가 난간을 통과하고 있다 -「난간을 마시다」일부
난간, 즉 불안을 끌어 안아야 평온을 얻을 수 있듯이, 곡선을 포용해야 직선이 될 수 있다. ‘사방에서 직선과 곡선이 난간을 모으는 동안’ 그는 휘어져 버린다. 그러나 휘어진 것에 대해 우리는 ‘절망’의 본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휘어질 수 있는 부드러움이 없다면 난간을 마실 수 없고, 뾰족한 난간 위로 달릴 수도 없다. 또 휘어짐은 ‘여유’이며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하는 수용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관용인 것이다. 그는 ‘난간’에 대해, 또는 ‘불안’에 대해, 어찌 보면 실존하는 현상학을 추구하고 있다. 즉 팔이 없어도 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실존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곧 시는 고안되고 제작되는 것으로 인식할 뿐, 감정에 의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최성애 시인은 그의 시 작품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생각하는 자아, 사유하는 자아로서 단일성, 즉 단일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 ‘난간이 나를, 내가 난간’이라는 결국 ‘난간=나’라는 등식이 성립되므로 그의 ‘자아’는 단일자아임을 말 한다. 즉 그의 ‘자아’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어 대체가 불가능한 자아이다. 따라서 자아는 ‘자아중심주의(egocentrism)’의 자아다. 첨언하면 ‘네’가 누구인가를 ‘내’가 설명해 주고 있다. 시적 화자는 ‘빗소리’이고, 이 ‘빗소리’는 비명이다. 그 비명은 최시인에겐 음악이다. 결국 ‘나’는 ‘음악’이다. 그러므로 ‘빗소리’를 ‘비명’으로, ‘비명’을 음악으로 은유 시켜 전통적인 감정의 그 무엇과 대립 시키며, 사물을 사단(四端)의 하나인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아픔으로 보고 있다.
그를 창살에 매달아 놓았어 부드러운 동작을 내 귀에 고정시켜 놓았어 마음껏 다리를 흔들어 보렴 천 개의 발가락이 자정을 건너가고 있어 선율을 따라 춤추는
건널목에 그의 비명이 쌓이고 있어 이럴 때 나에겐 따뜻한 입술이 필요해 그의 눈빛을 저장할 오선지가 필요해 또각 또각, 구두 소리를 내는
내 혀가 자라고 있어 드라마가 끝나고 녹음기도 꺼졌는데 종일 기둥에서, 벽에서 멜로디가 흐르고 있어 그림자만 바닥으로 쏟아 내는, 그는 도대체 어디 숨은 걸까?
그의 몸, 마디마디 악보가 있을 꺼야 젖어 있을 꺼야 울음을 그치고 내 아늑한 포켓으로 몸을 던져도 좋아 지금 나는 비의 탱고를 쓸쓸히 부르는 중이거든 -「빗소리」전문
서로 몸을 부대끼며 내리는 소리, 이 빗소리는 최정애 시인의 시 몸 속에서 나오는 삶의 아우성이다. 이 비명소리는 건널목에도 높게 쌓이고, 악보에도, 아늑한 포켓 속에도 쌓인다. 이렇게 시는 인간의 체험을 언어로 그려 놓는 재현성의 결과물이다. 그의 체험에서 얻어낸 시의 모티브는 슬프지 않다. ‘빗소리’가 삶의 ‘비명’소리이고, 이 비명소리는 온전한 음표이기 때문이다. 이 음표는 비명소리로 절규하는 것이 아니라 리듬으로 오선지에 머무른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은 ‘빗소리’와 ‘비명’을 상호적인 언어의 유희를 통해 삶의 애환을 미적으로 승화 시키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모더니스트라 할 수 있는 최정애 시인의 시적 가치는 아이러니, 위트, 언어의 경제성, 그리고 시인과 시적 화자가 단절되는 현대시의 몰개성(impersonality)과 형식의 완벽성에 근거를 둔다. 어찌 보면 그의 시적 모험은 시적 가치에 대한 도전의 양상이다. 최 시인은 형식에 억압된 삶의 본능적 흐름을 시작품에 그대로 투사하고 있다. 그래서 최정애 시인의 시세계엔 초월적 현실, 혹은 이상적 유토피아가 존재한다. 무질서를 표현하면서 원형 혹은 신화 세계를 지향한다. 따라서 모더니스트들에게는 이런 자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공적이고 반자연적인 문명의 세계를 표방할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형식의 완벽성은 형식의 폐쇄성이며, 이 폐쇄적 형식은 내적 유기성, 통일성, 수미일관성, 표층을 뚫고 들어 가려는 중심주의를 강조하다. 최정애 시인을 모더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또 다른 측면의 시세계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는 ‘빗소리’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즉, 탐구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는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라며 ‘중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최 시인이 ‘비의 탱고를 쓸쓸히 부르는 중’인 유목적 사유를 적극 받아들이는 까닭이다. 이런 시작(詩作)의 태도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추구하는 차연(difference)이며, 개방성, ‘탈중심’의 의미를 생성 반복하는 것이다. 앞의 시 「빗소리」에서도 최 시인은 형식의 개방성을 지향하는 해체시를 추구한다. 이 개방성은 미적 형식과 관련되는 인위적 세련성보다는 자발적 직접성을 강조한다.
몸이 흔들렸지 로데오 거리에서 배가 불룩해지고 있었지 코끼리그림자가 내 목으로 넘어가
어제는 나팔꽃이었고 내일은 출입문에서 혼자 뭉게구름을 뭉개는 내 생각이 죽은 척 하고 있었지 -「코끼리 그림자」일부
흔히 미술의 기법 중의 하나인 고전적인 방식으로 ‘유화’가 있다. 이 방식은 순간적인 동작들을 잡아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크로키(croquis)는 짧은 시간 내에 움직이는 대상물의 형태를 그리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최정애 시인은 ‘코끼리 그림자’가 내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은 어제의 나팔꽃이었지만 내일은 출입문에서 혼자 뭉게구름을 뭉개는, 그리고 죽은 척하고 있는 내 생각들을 크로키로 ‘찰라’를 포착하고 있다. 이것은 최정애 시인의 과거에 대한 현재의 반란이다. 또 과거의 안정성에 대한 끊임없는 도피이며 반복에 대한 차이(差異)인 것이다. 이런 정황들이 최정애 시인이 시적 대상의 인식의 주체로서 순간적으로 포착된 현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요약하면 ‘현재’라는 정당성 확보 차원인 것이다. 과거의 ‘~주의’와 현재에 싸우는 중이다. 그는 ‘현재’의 위치에서 과거와의 전쟁이고 ‘현재’의 발목을 잡는 ‘과거’의 어떤 것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일에 몰두한다. 그는 「난간을 마시다」는 이 시에서 근대적 단일자아를 보여 오다가 「코끼리 그림자」에서 와서 복수의 자아를 보이고 있다. 즉 두 개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예컨대 코끼리 그림자가 ‘나팔꽃’이고, ‘뭉게구름’이고, 죽은 척 하는 ‘내 생각들’이 그렇다고 함의 할 수 있다. 이것은 피폐해져 가는 현대인의 불안한 정신의 울혈증(鬱血症)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문학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 최정애 시인의 시정신이며, 그의 문학성에 대한 본질이다.
모든 내일이 저장된 5초 전 창문에선 불빛이 꺼진다 어둠이 무성한, 바깥을 종일 채우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들 벽에서 얼룩을 지우고 있다 12월 한 페이지 건너갈 수 없는 유리문에선 수북한 달이
몸을 말리고 있다 수천 개의 눈이 묻어 있는 저 한 장의 벽, 속으로 내가 이동하고 있다 -「한 장의 벽」일부
벽은 소통을 단절시키는 근본이다. 그는 ‘벽에서 얼룩을 지우고’라도 단절된 벽과 벽 사이에서 무한한 소통을 꾀하려 한다. 최정애 시인이 이 작품에서 소통은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곧 ‘죽음’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죽음으로 말하지 않고 심미적으로 소통을 끌어 들여 조용히 탐미한다. 천국의 계단을 가볍게 오르려면 누구나 몸을 말려야 한다. 몸을 말리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무소유의 일환이다. 그래서 ‘수북하던 달’도 몸을 말리고 있다. 몸을 말리는 것은 보름달이 그믐달로 가기 위한 절차상의 절대적 통관의례다. 이것은 달이 달로 태어나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매개체가 필요한 윤회사상이 바탕이 된다. 앞의 시 「한 장의 벽」에서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시의식이 표층에서 심층을 뚫고 들어 가려는 ‘중심주의’에서 언어가 표층에서 표층으로 미끄러지는 ‘다원주의’로 이동됨을 알 수 있다. 소통을 위해 벽 속으로 뚫고 들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벽 속으로 이동’하며 미끄러지고 있다. 어쩌면 중심이 없는, 행위가 종결되지 않고 계속 유예되는, 다시 말해 차이에 대해 연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 최 시인이 횡단하고 미끄러지는 이 운동 그 자체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오직 수평적인 비대칭만의 고집이며, 기존의 규범을 파괴하는 생산이고, 리좀(rhizome)과 같은 다원주의와 비(非)위계질서를 본질로 하는 다양체이다. 지금도 ‘수천 개의 눈이 묻어 있는/저 한 장의 벽,/속으로’ 최 시인은 횡단이라는 운동을 하며, 이동하고 있다. 이렇게 횡단하고, 미끄러지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며, 허허로움을 추구하는 최정애 시인을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낭만주의로의 회귀(?)로 보는 견해는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다.
처음엔 그 소리가 바닥을 쓸고, 책장에서 흘러내린 낙서이거나 ①귀에 잠시 머무는 이명耳鳴이려니, 오후를 지나가는 구름의 균열이려니, 끝없이//지워진 안테나를 지나 나를 회전하는 반사경을 지나 몸을 끌어당기는, 터널로 이어지는 소파 위에서 모래 가득한 ②혀를 내밀고 날름거리는 바람,//……<중략>……//③목에 손을 넣었다 ④귀를 잡아당기다 바람은 계속 불고 있다 고단한 침대에선 ⑤머리칼이 한 올 두 올 부서져 모서리를 날아다니고 -「몸을 엿듣다」일부
귀와 혀, 그리고 목, 머리카락 등의 신체 일부를 통해 몸을 엿듣고 있다. ‘몸을 엿듣’는다 것은 표층에서 간접적으로 엿 듣는 행위를 통해 시적 화자의 내면세계를 성찰한다는 것이고, 이 성찰은 소통을 위한 엿 듣기인 것이다. 외부세계와 내면세계의 소통을 위해 ‘벽에 걸린 새장’마저 허물고 있다. 내면세계를 찾는다는 것은 결국 자성이고, 반성이고, 자아를 찾는 일이다. 앞의 시작품인 「한 장의 벽」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양상을 보이다가「몸을 엿듣다」의 시작품에서는 모더니즘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결국 두 경계를 허물고 있다는 뜻도 된다. 또 두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초월성을 보이고 있다는 방증(傍證)이기도 하다. 다른 측면으로 생각해보면 두 경향, 즉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서로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동행을 하지만, 서로 상반된 특성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 두 개의 세계를 최정애 시인은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이것 역시 그의 시적 사유가 초월성에 근거를 둔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심주의’에서 ‘탈중심주의’로, ‘탈중심주의’에서 ‘중심주의’으로, ‘수목적 체계’에서 ‘노마드적 체계’로, ‘노마드 체계’에서 ‘수목적 체계’로, ‘단일자아’에서 ‘복수자아’로, ‘복수자아’에서 ‘단일자아’로 넘나드는 그의 유연한 시세계는 영역과 영토가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최정애 시인의 시의식이, 그리고 시적 사유가 경직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이런 까닭으로 최정애 시인에게서 확인되는 것은 문학과 예술적 감각을 재배치하는 시의식이 감춰진 이교도(異敎徒)적 시간관의 발견이다. 그는 지금도 대칭과 비대칭의 경계에서 고유한 언어로 집 짓기를 계속하고 있다.
나는 뱀의 고통을 슬퍼하지 않는다
꿈틀대는 구름 속, 터널에서 이별의 거리는 눈 위에 떨어지는 눈금일 뿐 벼랑을 목에 걸고 뱀과 바퀴가 회전하는 속력 위에서
이별은 초침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컨베이어 벨트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온, 사람들은 눈알이 번득이는 하루의 꼬리를 손가락으로 풀어헤친다 -「컨베이어 벨트」일부
시적 화자는「컨베이어 벨트」의 시에서 ‘뱀의 고통을 슬퍼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가 슬퍼할 이유가 없는 것은 ‘뱀’은 ‘컨베이어 벨트’이고 ‘컨베이어 벨트’는 인간 삶의 양식이다. 그것도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을 구속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컨베이어 벨트」는 문명을 비판하는 의미도 되지만, 바퀴와 바퀴에 걸쳐 일정하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와 같은 획일적인 인간 사회의 형상화다. 서양의 물심이원론은 대립적인 삶으로써 인간성 본질을 늪으로 한층 가라앉게 한다. 바퀴와 바퀴를 연결하는 컨베이어 벨트 역시, 두 바퀴의 상호소통이라는 미명아래 공간을 점령하고 이성적 사고를 마비 시킨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최정애 시인은 ‘눈알이 번득이는 하루의 꼬리를 손가락으로 풀어헤’치며 산다고, 인간의 영원성과 불멸성을 시라는 미적 양식으로 담론화하고 있다. 그는 또 비리와 허망, 그리고 욕망에 맹목적인 현대인의 ‘수많은 눈’과 ‘발자국’은 선악과를 따먹기 위해 뱀 꼬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최정애 시인은 ‘벼랑에 목을 걸고’ 회전하는 ‘뱀의 고통’을 절대 슬퍼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원죄를 신화에서 구원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원죄는 인간의 삶을 규격화한다. 규격화는 일종의 억압이고, 이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예술은 예술을 낳는다. 시의 소재에 대한 인식의 주체인 최정애 시인은「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형식주의적 태도를 보여온 부조리한 사회성, 관료성, 인간 본성의 취약으로 ‘안개에 손을 말리는 사람’(「시계가 고장나」)들을 보곤 한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이 보들레르가 말한 모더니티의 우연성, 순간성, 일시성으로 전통시를 봄볕에 고드름 녹이듯 거리를 두는 이유는 기존의 담론과 제도들에 의해 구현된 규범을 무너뜨리고 ‘탈영토화’에 시적 사유를 두려는 그의 믿음이다.
3. 언어에 색칠하고 봉사하는 견자
칸트는 “언어를 목적으로 사용할 때 시가 나온다”고 했다. 언어란 시인으로부터 고통의 외침을 자아내는 통점의 기호이다. 이런 언어로 시인은 타자를 인도(引導)해야 한다. 타자를 인도한다는 것은 언어로 그려 놓은 높은 빌딩을 보고, 타자는 부조리한 사회를 비판하고, 때로는 분노를 자아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분노와 비판의 소리를 통점의 기호로 나타내는 최정애 시인의 「그녀가 접히고 있다」는 시를 감상해 보자
그 시간 나는 회전문 속에 있었다
에스카레이터가 2층을 관통하고 있을 때 그녀의 발목이 접히고 있었다 절반으로 잘리는 건널목에서 그녀의 허리가 접히고 있었다 빨간 샌들이 함께 접히고 있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절반으로 잘리고 ……<중략>…… 나는 회전문을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접히고 있다」일부
최정애 시인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보여 주었던, 일시성과 우연성, 그리고 순간성을 보았다. 예시된 「그녀가 접히고 있다」는 이 시 역시 「컨베이어 벨트」의 시와 같은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식의 주체인 최정애 시인과 시적 화자가 같은 목소리를 내는 단일 자아로서 개성론에 가깝다. ‘그녀’가 시적 화자이고, 시적 화자는 시인이고 최정애 시인은 시인으로서 시적 화자가 된다. 따라서 ‘그녀’가 ‘최정애’라고 할 때 최 시인이 ‘회전문을 나오’려면 몸을 접어야 한다. 접는 행위는 자세를 낮추는 태도이고, 자세를 낮추는 태도는 수목적 사유체계가 가진 위계질서로 형성된 계급사회의 지층을 흔드는 일이다. 접힌 발목의 ‘샌들이 함께 접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절반으로 잘’린다는 사유는 인간, 동식물, 무기물 등과 같은 모든 우주 만물들이 만나서 관계를 맺으며 감화 시키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최정애 시인의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시정신이다. 예컨대 적당한 수분과 햇볕, 그리고 바람과 땅이 유기적인 관계망를 형성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피어날 수 있다. 그는 낡은 전통을 아무 조건 없이 버리자는 극렬 분자는 아니다. 익히고 배우되 지층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에겐 ‘동시대’란 말은 폭력이다. 그가 ‘회전문’을 나오는 것은 ‘나와 함께 태어난 사람이 나와 동일한 시간을 공유했다’고 보지 않는 행위이다. 최정애 시인이 「그녀가 접히고 있다」의 시에서 보여주는 시의식은 ‘나’는 ‘나’와 다르고, ‘너’는 ‘너’와 다르다. 그러므로 ‘나’와 ‘너’의 자아가 상호 ‘다름’의 동일성을 보이고 있다. 인격체로서 ‘나’와 ‘너’는 다른 것이지만 ‘아픔’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서로 같은 동질성을 갖는다. 시적 진술은 자성과 해명이 작품의 축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그의 진술은 ‘성찰’이라는 깨달음을 핵으로 한다. 이질적인 모든 것에 대해 새로운 접속의 가능성을 허용한다. 또 다른 어떤 것과도 접촉할 수 있고, 접촉되어야 하는 접속의 원리를 양산한다.
돌멩이를 던졌는데 꽃 한 송이가 피고 있다 꽃을 피우며 돌은 호수 가득 적막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한 겹 한 겹 껍질을 벗는다 어제의 빗물을 흘리다가 바람의 뼈대를 쏟아 낸다 붉은 공기가 팽창하는 틈새에서, ‘돌이 살아 있나 봐’ 돌멩이 한 알의 숨소리를 듣는다 물의 경계를 가르며
-「돌이 핀다」일부
‘허공에 색칠하며 사는 것이’ (「거미 소리」) 거미의 운명이라면 언어에 색칠하면 사는 일은 최정애 시인의 운명이다. 그 동안 온 몸에 색칠하던 그는 언어에 색칠 하기 시작한 것은 순간성의 ‘현재’에 있다. 즉 낡은 전통성으로부터 과감한 이탈의 정신에서 비롯된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돌이 핀다」에서는 몸과 언어에 동시적으로 색칠 한다. 온 몸엔 저녁 노을빛을 색칠하고, 언어엔 새파란 청춘을 색칠 한다. 지난날의 시간은 ‘돌멩이를 던졌는데 한 송이 꽃을 피’우게 할 만큼 최 시인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지금 어느 곳을 가고 있을까?(「밤의 근육질」)’라고 회고한다. 실험적이고 파편적인 글쓰기를 하던 최정애 시인의 시의식이 황급하게 ‘인생론’으로 돌아선다. 그의 ‘목에 걸린 쇠 방울이 눈에서 불똥을 일으’(「일식」)킬 만큼 삶을 달려왔으나 이젠 ‘스웨터의 검은 털들이 놀라 등에 납작 엎드(「일식」)’리고, 이따금 어두운 골목길에 들어서면 내 뒤에 아련하게 따라오는 소리/오늘도 그 소리를 덮고 그 쪽으로 기울다 잠들(「아직도 살아있다」)’고 있는 모습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꽃으로 피어나던 돌은 호숫가에 가득 쌓인 ‘적막을 밀어’ 낸다. 시간이 최정애 시인에게 가져다 준 숙명의 결과다. ‘운명’과 ‘숙명’은 분명히 다른 개념을 각각 함의 한다. ‘운명’은 본능적으로 피할 수 있거나 개척할 수가 있다. 그러나 ‘숙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순환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개념이든, 일직선으로 흐르는 시간의 개념이든, 시간은 최정애 시인과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만남이다. 이 숙명적인 시간과의 만남이 최정애 시인을 ‘인생론’으로 몰고 갈수 밖에 없었던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이처럼 세월은 ‘푸른 절벽’이 최정애 시인의 ‘발목을 부수고’ 설상가상으로 ‘빠른 속도로 몸이 가라앉’ (「돌이 핀다」)게 한다. 그러나 황혼빛으로 곱게 물들어가는 시적 화자는 ‘돌멩이 한 알에서 숨소리를’ 듣는 듯이 삶에 애착하는 경계의 끈을 놓지 않는다. “다 왔습니다” 라는 ‘소리 들리는 길에서 가던 길을 놓치고 마는, 나는 한 마리 물고기 (「어항 속으로 들어가다」)’가 될 때까지 그는 언어에 색칠할 것이다.
늦가을 오후가 날린다 과수밭에서 배 봉지를 흔드는 바람의 한쪽 모서리가 날린다 ……<중략>…… 밤이슬에 젖으며 내가 만장輓章처럼 날리고 있다 -「내가 날리고 있다」일부
오후가 날리는 늦가을 ‘과수밭에서 배 봉지를 흔드는/바람의 한쪽 모서리’로 날리던 시적 화자는 ‘만장(輓章)처럼 날리’며 ‘밤 이슬에 젖’는다. 최정애 시인은 특히「내가 날리고 있다」는 시에서 그의 시의식이 ‘인생’ 쪽으로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지도를 보지 않고도 길을 잃지 않고 가야 하는, 나는 한 마리 물고기’가 되려고 물고기처럼 뜬 눈으로 죽음을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존하려고 한다. 그는 ‘누렇게 익은 배 밭이 날’리고, ‘내 방이 하얗게’ 날린다는 인식으로 조용히 죽음을 탐미한다. ‘늦가을 오후가 날리’는 것도, ‘바람의 한쪽 모서리가 날리’는 것도, 모두 상상적 질서 속에서 가능하다. 이 상상적 질서는 환상과 이미지의 영역이며, 상징적 질서는 사회적 문화적 상징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주체가 욕망이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 가능하다. 또한 주체가 재현되거나 구성되는 것 역시 상징적 질서, 곧 언어를 통해서 가능하다. 최 시인은 언어로 날리고 있다. 그것도 ‘잔뜩 발기된 달의 표면처럼’ 접신(接神)된 광기로 날리고 있다. 그는 ‘둥근 배가 봉지 속에서 불룩 불룩’하게 날린다. 그는 ‘누렇게 익은 배 밭’처럼 날리고 또 날린다.
머리 속엔 아침부터 스카프에서 빠져 나온 새들이 나선형 방향을 돌며 날고 있다 ……<중략>…… 날이 저물도록 내 몸에서 새들이 날아다니는 건 내가 온통 구름이기 때문이다 스카프가 구름이기 때문이다 -「스카프가 난다」일부
돌 속에서 한 송이의 꽃을 피워도 어차피 인간은 한 장의 스카프로 날릴 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개체로서 고독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이라는 고통을 감내하고 인간에게 무상의 은총을 내려주었던, 예수의 그 고통에 필적할 만한 자신의 고통이 수반될 때 시인은 언어로 본질의 실체를 탐구할 수 있다. 이러한 고통을 스스로 받아 들이는 최정애 시인은 낡은 언어로는 존재의 성안에 들어갈 수 없고, 낡은 의식의 언어로서는 실존하는 사물을 포착할 수 없다. 그래서 그에겐 ‘스카프’가 언어이고 기호가 된다. 그 ‘스카프’가 언어인 것은 ‘내가 온통 구름이기 때문’이고 ‘스카프가 구름’인 까닭이다. ‘스카프’란 언어로 ‘스카프’의 실체를 증명하려고 한다. 그는 언어로 모든 존재의 실체를 증명 하고자 한다. 그것도 ⓐ‘날이 저물도록 내 몸에서/새들이 날아다니는 건/ⓑ내가 온통 구름이기 때문이다/ⓒ스카프가 구름이기 때문이다’에서 ⓑ와 ⓒ구절은 도치된 ⓐ의 조건 절이다. 다시 말해 ‘스카프가 구름이기 때문’에 ‘날이 저물도록 내 몸에서/새들이 날아다닐’수 있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조건’을 만들고, 그 조건을 언어로 진술하게 함으로써 존재하는 사물과 사물로서 상생의 관계를 만든다 그의 언어는 ‘온통 구름’이고, ‘스카프’이고, ‘구름’이다. 이것을 도식화하면 ‘나=구름’이고, ‘스카프=구름’이다. 그렇다면 ‘나=스카프’가 된다. 따라서 ‘나=구름=스카프’는 동일한 존재이고, 최정애 시인은 언어로 이 동일성의 실체를 밝히고 있다. 언어는 사물의 안쪽을 파고 들어가 본질을 파악하려고 몸부림친다. 그것은 본질 파악의 주역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스카프’를 ‘스카프’라고 불러주지 않으면 ‘스카프’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못한다. ‘스카프’를 ‘스카프’라고 불러 주었을 때 ‘스카프’는 ‘스카프’가 된다. 따라서 언어는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는데 기여하고, 따라서 시인은 언어를 버릴 수 없고 최정애 시인 역시 언어를 떠난 시쓰기란 상상 조차할 수 없다. ‘스카프 속에서 빠져 나온 새들’의 행위는 언어만이 이미지화할 수 있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이 언어와 치열하게 싸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카프가 점점 두꺼워’지는 현상을 타자에게 가시화 내지 가청화하는 주체도 역시 언어이다. 때문에 언어는 혼돈을 질서화 한다.
시니피앙 정자와 시니피에 난자가 혼합된 알전구 만한 태아를 잉태시킨다
한쪽 눈이 없거나 입술이 세 개인 기형아가 탄생하면 최신 장비로 치료를 하는 한밤의 하얀집★으로 보낸다 ……<중략>…… 우량아에 필요한 재료를 몽땅 사들인다
혈통에게 물려받은 질긴 유전인자가 있어 나의 아이 만드는 습관은 죽는 그날에도, 어쩜 하나 더 낳고 떠날 결심을 한다 -「아이를 만들다」일부
인간의 출생은 탄생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우주를 만드는데 기여한다. 인간의 생명은 신(神)을 제외한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이「아이를 만들다」의 시는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는 인간의 위대한 승전의 역사를 보여 주고 있다. 로만 야콥슨은 「언어학과 시학」에서 “어떤 언어 공동체나 어떤 화자(話者)에건 언어는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명명행위가 이루어질 때 실체는 존재로서 동일성의 의미를 지닌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언어의 기능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언어는 명명행위의 도구일 뿐 존재의 주체는 아니다. 사물에 대한 인식의 주체인 시인 최정애는 ‘시니피앙 정자’이고 시인 최정애의 삶의 타자는 시니피에 ‘난자’이다. 따라서 어둠 속에서 빛으로 잉태한 ‘알전구’는 최정애 시인의 시세계인 동시에 삶의 무늬가 된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처럼 언어로 ‘아이’를 만들 때 시인은 본질의 현상과 존재의 가치를 동시에 향유할 수 있다. 작금의 시대에서 시(詩)가 중요시 하는 것은 ‘상상력’과 ‘언어’다. 최정애 시인은 ‘우량아에 필요한’ 언어를 ‘몽땅 사들’이고 있다. 이것은 존재로부터 창조된 언어(langage)의 힘을 옹호하는 일이다. ‘죽는 그날에도 어쩜’ 언어 ‘하나 더 낳고 떠날 결심을’하는 최 시인은 진정한 언어의 봉사자이다. 언어로 탑을 쌓는 일, 즉 언어로 ‘아이’를 만드는 일이 곧 시인이며, 창조적 행위자이다. 이렇게 그 언어는 토대가 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뮤즈(Muses)가 시인의 몸 속으로 들어와 시를 낳았다. 그러나 지금은 시인이 시의 주체가 된다. 즉 시를 만드는 원천은 영감(inspiration)이 아니라 상상력(imagination)으로 인지하고 있다. 여기 최정애 시인 역시 영감으로 사물을 인지 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시적 대상을 인지하고 관찰한다.
4. 마치며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시인은 실패하는 쪽으로 인생을 완성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또 그는 “시인은 언어에 봉사하고, 산문가는 언어를 사용한다”고 했다. 발레리(Velery)는 “산문은 보행이고 시는 춤”이라고 했다. 이 세 가지의 명제를 가지고 지금까지 말해왔던 최정애 시인의 시세계에 대해 마무리하고자 한다.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던 ‘실패’는 ‘성공’이라는 역설의 의미다. 그렇다면 최정애 시인은 ‘성공’의 시를 한층 더 나아가 ‘완성’해 가고자 한다. ‘이제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너’ (「12월 31일」) 즉,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언어를 버리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전통시에서 사용해 왔던 언어로는 존재의 성 안으로 자유롭게 들어 갈 수 없으므로 철저히 언어 고르기로 봉사한다. 또 하나는 최정애 시인의 시는 보행을 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정지 버튼을 누르면 go go가 달려와’ 춤을 춘다. 이「빗소리」의 시에서도 ‘천 개의 발가락이 자정을 건너가고 있어 선율을 따라 춤추’고 있고 ‘벽에서 멜로디가 흐르’는 태도로 보아 그의 시는 일관되게 춤추고 있다. 그는 음악이 흐르는 시에만 그 가치를 부여한다는 말이다. 시는 최정애 시인에게 억압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만 최정애 시인 스스로 억압을 필요로 한다. 그 필요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시쓰기 작업이다. 최정애 시인의 시는 참 젊다. 젊다 못해 매우 푸르다. 푸르다 못해 연초록빛이다. 최정애 시인의 시가 젊다는 것은 시가 건강하다는 것이고, 그의 시가 건강하다는 것은 한국의 문단이 건강하다는 것이다. 젊은 시는 나이와 무관하다. 그것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무관하다. 다만 예술의 치열성과 관계가 깊을 뿐이다. 한 권의 시집을 내기 위해 걸어온 긴 여정 속의 피곤함을 잠재우기 위해 이 평자는 최정애 시인에게 “몰입의 낭만은 오직 젊은 시에서 나온다”는 이 한 마디 꼭 들려주고 싶다.
■ 시인의 말 시는 내 마음에서 나오는 노래이고 동시에 울음이기도 하다. 어느날은 고통과 놀고 어느날은 고독과 놀면서 내 상상력이 닿는, 어느 곳이라도 날아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을 소유할 수 있다. 밤이 낮이 되고 낮이 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서성거리며 나를 확인하고 조명한다. 세월이 거슬러 이쪽으로 오기도 하고 저쪽으로 가기도 하는, 마치 내가 시간을 갖고 노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따금 나를 목마르게도 하지만 행복한 존재임이 분명한 건, 시는 내 온몸을 적시는 사랑의 환유이기 때문이다.
최정애 시인
강원도 강릉 출생 1998년 수필과 비평 수필 등단, 2001년 《시현실》시 등단, 2003년 수필집 『바람든여자』 2006년 시집 『손가락 끝에서 달냄새가난다』 2010년 시집 『일식』(열린시학 시인선) 문학미디어 문학상 수상
[출처] 최정애 시인의 시집 『일식』|작성자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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